2013년 11월 20일 서울대에서 학생들이 투표를 독려하는 현수막 아래를 지나고 있다.
새누리-민주 양당구도와 유사
그러나 속사정은 다르다. 서울 일부 대학의 비운동권 총학은 ‘특정 정파’에 장악돼 움직인다. 일부 대학에선 운동권에서 유래한 정파와 비운동권 정파로 나뉘어 ‘대권(?)경쟁’을 하는데, 파벌을 지어 움직인다는 점에선 둘의 성격이 같다. ‘비운동권-운동권 파벌정치’가 대학 총학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 기성정치가 보수 성향 새누리당과 진보 성향 민주당의 양당구도로 전개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어느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학생은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하기 매우 어렵다.
중앙대 경우 비운동권 성향인 ‘H정파’가 4년째 총학을 맡았다. 이 대학 한 학생은 “여러 해 동안 특정 라인에서 총학생회장이 잇따라 배출되면서 이 라인에 의해 총학생회가 좌지우지돼왔다”고 말했다. 이 대학 교지 ‘중대문화’는 이 라인을 ‘정파’라고 규정했다. ‘마스터키’라는 선거본부가 배출한 새 총학생회장도 바로 H정파에 소속됐다.
고려대는 비운동권 성향인 ‘고대공감대’, 운동권 PD 성향인 ‘전국학생행진운동’, 운동권 NL 성향인 ‘한국대학생연합’ 등 세 계열이 총학을 놓고 다툰다. 최근 몇 년간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온 유력 정·부 후보는 이들 계열과 인적 네트워크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들이 내건 정책도 자신들 계열의 노선과 거의 유사하다. 고려대 교지 ‘고대문화’는 중앙대와 달리 이들을 ‘계열’이라 부르는데, ‘정파’나 ‘계열’이나 용어만 다를 뿐 성격은 거의 같다.
연세대 경우 비운동권 성향인 ‘포커스 온’ 계열인 ‘포커스 온’ 선거본부가 2012년 총학을, ‘포커스 온 스토리’ 선거본부가 2013년 총학을 맡았다. 올해엔 ‘포커스 온 플러스’ 선거본부가 낙선했다. 조정원(불어불문 13학번) 씨는 “친구 대부분이 ‘포커스 온’ 같은 유력 계열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총학을 이끄는 정파는 이미 제도화된 권력으로 자리매김해 개인이나 소집단 단위의 다른 비운동권 학생은 아예 선거에서 대적할 엄두도 못 내는 편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새로운 학생회가 태동할 기회가 없어지는 양상이다. 고려대 한 학생은 “유력 계열은 소위 인력을 동원하는 조직력까지 후진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려대 총학은 2012년부터 3년 연속 ‘고대공감대’ 계열에서 ‘장기집권’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총학 사정에 밝은 한 학생은 “특정 계열이 총학생회를 맡으면 집행부 내부에서 후계자를 양성해 다음 총학 선거에 당선자를 낸다. 이렇게 거듭 당선자를 내면서 탄탄한 라인을 구성한다”고 설명했다. 성공회대 경우 29대 총학을 맡은 ‘스텐바이’ 출신 총학생회장은 전년도 부총학생회장이었다.
경희대 경우 5년째 A계열이 총학을 지배한다. 이번 총학을 맡은 ‘경희의 조건’ 선거본부도 이 계열로 지난해 선거에서 단일후보를 내 당선했다. 김재섭(정외과 10학번) 씨는 “다른 후보들은 출마해봐야 번번이 좌절만 할 뿐이다. 유력 계열의 뒷받침이 없이는 선거에 출마하기도 어렵고 설령 출마하더라도 강고한 진입 장벽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학생 자치에 계파밀실 구태?
서울 시내 한 대학의 총학생회 사무실.
선거본부 이름과 특정 계파의 관련성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란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제47대 총학 선거를 앞두고 고려대 인터넷 커뮤니티 ‘고파스’에선 ‘위캔’ 선거본부의 한 조직원이 수년 전 총학 고위 간부로 활동한 특정 계열 출신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큰 논쟁이 일었다. 일부 학생은 “위캔도 결국 그 라인이었나”라며 “표를 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종석(미디어학부 08학번) 씨는 “공약은 겨울방학만 지나면 잊게 된다. 많은 학생이 결국 세력을 보고 투표한다”고 했다.
대학생도 ‘소수파벌의 총학권력 독과점’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마치 기성정치의 유권자가 양대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것처럼 특정 파벌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시내 한 대학생은 “본선에서 학생의 심판을 받는 것보다 계파 내 의사결정권자들의 눈에 들어 계파후보로 낙점받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 자치에 계파밀실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전북대신문’ 윤재량 기자는 “총학 선출과 운영 과정에서 정치인이 하는 ‘안 좋은 짓’만 골라서 배우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 총학의 파벌정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상당수 학생은 “특정 정파나 계열이 학내 복지 등 학생 눈높이에 잘 부응하고 실행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총학을 맡은 것”이라고 봤다. ‘고대공감대’ 선거본부에서 활동한 안학수(국제학과 10학번) 씨는 “이전 총학에서 활동한 사람이 현안에 대해 잘 알고 해결책도 갖고 있어 다음 선거에 나가 당선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선배의 간섭이나 세력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의 수강생인 필자들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취재해 작성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