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서울 서교동 한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들국화. 왼쪽부터 최성원, 고(故) 주찬권, 전인권.
1986년 2집 이후 오리지널 멤버가 27년 만에 뭉쳤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성찰이, 노래에는 묵직함이 있다. 삶의 질곡과 대하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노래 같다. 삶과 음악이 선율과 가사에 동시에 녹아 있다.
전인권의 보컬, 최성원의 베이스, 고(故) 주찬권의 드럼을 필두로 한상원, 정원영, 함춘호, 김광민 등 이제 세션을 넘어 한국 음악교육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이 기꺼이 친구이자 동료의 앨범 작업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들국화의 음악을 듣고 자란 이들이 음악산업의 주역이 돼 레코딩, 홍보, 마케팅, 뮤직비디오 등의 업무를 기꺼이 맡았다. 말하자면 1980년대와 2010년대가 들국화의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전인권과 최성원, 그리고 고 주찬권은 이 무게를 배신하지 않는다. 리메이크 곡과 자신들의 옛 노래를 다시 부른 버전을 포함해 총 21곡을 실은 이 앨범에서 그들은 신곡 5곡을 공개했다. 많은 곡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허투루 들을 수 있는 곡이 없다. ‘행진’부터 ‘제발’까지, 그들의 이름을 30년 가까이 줄곧 회자하게 했던 바로 그 감성과 정서의 고갱이들은 퇴색하지 않고 새 노래들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왔고 지금 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준다. 어떤 곡도 밝지 않지만 거침도 없다. 이 노래들을 야구에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한 시절, 온 국민을 열광하게 했던 투수가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등판해 공을 던진다. 홈런을 맞든 삼진을 잡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던지던 바로 그 공을.
그야말로 질곡의 시간을 거쳐 온 전인권의 목소리는 과거에 비해 한결 세심해졌다. 그 거센 기운을 유지하되 전성기에는 느낄 수 없던 감성을 보여준다. 마약으로 심신이 피폐해졌던 그가 재활하려고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을지 음악을 듣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들국화 재결성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고 주찬권의 드럼은 그런 염원을 드러내듯 정확하면서도 힘 있는 비트를 들려준다. 그가 만들고 전인권이 가사를 쓴 ‘하나둘씩 떨어져’. 주찬권의 유작이 된 이 노래는 그래서 더 처연하다. 오랜 숙원이 이뤄지는 걸 눈앞에 둔 채 갑자기 먼 곳으로 떠난 그 아픔이 그려진다.
들국화의 웬만한 팬이 아니고서는 잘 모를 만한 사실이 이 앨범에는 숨어 있다. 두 번째 트랙인 ‘노래여 잠에서 깨라’는 1집과 2집에도 존재하지 않던 전인권과 최성원의 합작품이다. 역시 전인권이 가사를, 최성원이 곡을 썼다. 들국화의 성공 비결이자 해체 요인이기도 했던 둘의 서로 다른 음악세계는 이 노래를 통해 결국 하나가 돼 앨범의 가장 빛나는 요소를 만들었다.
2012년 봄, 첫 재결성 콘서트를 시작으로 그들은 몇 번의 공연을 통해 새 앨범에 대한 기대감을 들끓게 했다. 그리고 새 앨범이 나왔다. 기대 이상의 작품이다. 그러나 마냥 기쁘게 들을 수만은 없는 앨범이다. 주찬권의 죽음으로 남은 두 멤버가 이 앨범으로 활동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기 때문이다. 원컨대 이 앨범을 듣고 감동받을 이들이 있다면 모두 함께 그들의 활동 재개를 기원했으면 한다. 2013년 끝자락, 27년간 기다린 선물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