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거북스러운 느낌이 든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나 죄르지 리게티의 음악처럼 인간의 바닥 깊숙이 숨은 모순적 상황들. 예를 들어 우아한 미소 뒤에 감춰진 증오와 분노 같은 것, 때로는 코뚜레에 꿰여도 찍소리 못하는 황소처럼 원치 않는 도덕과 규범에 길들여져 눈물짓는 피(被)포박자의 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
인간의 모순적 상황을 다룬 예술작품은 많다. 특히 희곡을 포함한 문학에서는 이상과 현실, 혹은 에고와 슈퍼에고 사이의 갈등과 길항 이중구조가 거의 필수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의 ‘미할리스 대장’(열린책들 펴냄)처럼 고아한 차원의 철학을 담고 있든, 조정래의 ‘태백산맥’처럼 사상을 담고 있든,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같은 사랑 이야기이든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제외하고 얼개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이런 등식으로 규정해버리기엔 왠지 마뜩지가 않다. 먼저 그의 작품은 진지하다. 때로는 이야기의 서술이 과잉에 허덕이고, 혹여나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묘사에 묘사를 거듭하기도 한다. 더구나 그의 언어가 우리말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문자로 앉힐 때쯤에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다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보기에 따라 마치 초보 화가가 마음에 들 때까지 붓질을 거듭하다 캔버스에 덧칠된 물감의 두께에 스스로 질리는, 그런 느낌일 수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늘 인간과 신앙, 사회구조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는 신앙은 대부분 그리스 정교지만, 이는 현시대의 모든 종교와 신앙을, 그리고 그것들의 타락과 모순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또 그가 다루는 이데올로기와 착취 구조는 터키와 그리스의 이야기지만, 볼셰비키에서 파시즘까지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아우른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간이 철저히 소외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과 피조물의 관계로 규정되고,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의 도구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은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모두 주인공이 되고, 모두 조연이 되면서 때로는 주먹 쥐는 분노를, 때로는 어이없는 해프닝을 빚기도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펴냄)도 그렇다. 조르바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정신만 따져보면 초인에 가깝다. 조르바는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에서 이야기하는 ‘위버멘슈(¨Ubermensch·초인)’, 즉 경지에 오른 인물인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우연히 만난 실존 인물 조르바는 작가에 의해 ‘느낌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육(肉)과 영(靈)을 하나에 이르게 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주인공 조르바가 바로 자라투스트라인 셈이다.
이 책은 이야기에 집착하면 길을 벗어나게 된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는 보편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해석 여지에 따라 다양하게 읽힌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소설이라는 구조를 차용한 철학’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고,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는 성서의 얼개를 차용해 신앙의 본질을 탐험한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인간의 욕망과 본질을 탐구하는 실존적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성서의 얼개를 이용해 신앙을 조롱하는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작품이 터키의 지배에 허덕이는 조국 그리스의 고통을 다뤘다고도 할 수 있으며, 혹은 그리스의 고통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라는 구조를 차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한 편의 연애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난해하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노벨 문학상 후보가 되지만, ‘미할리스 대장’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로 금서목록에 오를 만큼 위험한 작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책은 그냥 읽어버리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그렇다고 함부로 규정하기엔 위험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우리가 사는 일상을 다룬 평범한 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 카잔차키스가 문학사에서 차지한 자리는 특별하다. 그럼에도 그가 명성만큼 국내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지 못한 이유는 필시 번역 탓일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책은 과거 우리말로 번역돼 출판된 적이 있지만, 번역은 난해했고 편집은 거칠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윤기의 번역으로 그의 작품들이 다시 소개되면서 그와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그러고 보면 외국 도서, 특히 문학작품에서 좋은 번역과 편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인간의 모순적 상황을 다룬 예술작품은 많다. 특히 희곡을 포함한 문학에서는 이상과 현실, 혹은 에고와 슈퍼에고 사이의 갈등과 길항 이중구조가 거의 필수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카잔차키스의 ‘미할리스 대장’(열린책들 펴냄)처럼 고아한 차원의 철학을 담고 있든, 조정래의 ‘태백산맥’처럼 사상을 담고 있든,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같은 사랑 이야기이든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제외하고 얼개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이런 등식으로 규정해버리기엔 왠지 마뜩지가 않다. 먼저 그의 작품은 진지하다. 때로는 이야기의 서술이 과잉에 허덕이고, 혹여나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묘사에 묘사를 거듭하기도 한다. 더구나 그의 언어가 우리말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문자로 앉힐 때쯤에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다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보기에 따라 마치 초보 화가가 마음에 들 때까지 붓질을 거듭하다 캔버스에 덧칠된 물감의 두께에 스스로 질리는, 그런 느낌일 수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늘 인간과 신앙, 사회구조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는 신앙은 대부분 그리스 정교지만, 이는 현시대의 모든 종교와 신앙을, 그리고 그것들의 타락과 모순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또 그가 다루는 이데올로기와 착취 구조는 터키와 그리스의 이야기지만, 볼셰비키에서 파시즘까지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아우른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간이 철저히 소외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과 피조물의 관계로 규정되고,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의 도구로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은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모두 주인공이 되고, 모두 조연이 되면서 때로는 주먹 쥐는 분노를, 때로는 어이없는 해프닝을 빚기도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펴냄)도 그렇다. 조르바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정신만 따져보면 초인에 가깝다. 조르바는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에서 이야기하는 ‘위버멘슈(¨Ubermensch·초인)’, 즉 경지에 오른 인물인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우연히 만난 실존 인물 조르바는 작가에 의해 ‘느낌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육(肉)과 영(靈)을 하나에 이르게 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주인공 조르바가 바로 자라투스트라인 셈이다.
이 책은 이야기에 집착하면 길을 벗어나게 된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는 보편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체계가 자리잡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해석 여지에 따라 다양하게 읽힌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소설이라는 구조를 차용한 철학’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고,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는 성서의 얼개를 차용해 신앙의 본질을 탐험한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인간의 욕망과 본질을 탐구하는 실존적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성서의 얼개를 이용해 신앙을 조롱하는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작품이 터키의 지배에 허덕이는 조국 그리스의 고통을 다뤘다고도 할 수 있으며, 혹은 그리스의 고통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라는 구조를 차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한 편의 연애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난해하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노벨 문학상 후보가 되지만, ‘미할리스 대장’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로 금서목록에 오를 만큼 위험한 작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책은 그냥 읽어버리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그렇다고 함부로 규정하기엔 위험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우리가 사는 일상을 다룬 평범한 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경철<br>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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