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30번 국도의 동쪽 기점인 대구 근교에서는 차창 밖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달리는 차량 행렬에 휩쓸리다 보면 잠시라도 한눈 팔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주 읍내를 지나서부터는 한결 여유가 느껴진다. 오가는 차량도 많지 않을뿐더러 길가의 풍정도 평화롭고 아늑하다.
일찍이 성주군은 나라 안에서 땅이 가장 기름진 네 고을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 그 유명한 ‘성주 참외’는 성주 땅의 깐깐한 뒷심이 낳은 특산물이다. 성주 참외의 본고장답게 30번 국도변의 들녘은 온통 비닐하우스로 뒤덮여 있다. 비닐하우스가 뜸해질 즈음, 길은 성주댐의 호반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간다. 산중의 잔잔한 호수에 내려앉은 원색 가을빛이 일부러 그려놓은 듯 아름답다. 하지만 호수 아래에 잠긴 마을들의 가을 풍경은 그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구절양장처럼 구불거리는 가래재 너머의 김천시 대덕면 관기리에서 다시 동쪽으로 60여리쯤 달리면 나제통문(羅濟通門)에 이른다. 옛 신라와 백제의 접경에 자리잡고 있어 두 나라 사이의 관문 구실을 했다는 인공터널이다. 지금도 옛 신라 땅인 무풍면과 백제 쪽 설천면은 같은 무주군에 속하면서도 사투리와 풍속이 다르다.

적상산 서쪽 기슭에서 19번 국도와 갈린 30번 국도는 조금재터널을 지나고 밤재를 넘어 진안군 안천면에 들어선다. 안천면과 그 이웃의 상전면은 뭍의 절반 가까이를 용담호에 내준 수몰지역이다. ‘육지 속의 섬’ 죽도, 조선 선조 때 역신으로 몰린 정여립(鄭汝立)이 자결했던 그곳도 지금은 쉬리, 모래무지, 피라미 등이 모여 사는 용궁세계가 되었다.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지각 변동이 일어난 셈이다.
진안읍을 빠져나온 30번 국도는 지극히 평범하고 한가로운 시골길로 접어든다. 말의 귀처럼 쫑긋한 마이산을 제외하고 길 가까이에 이렇다 할 관광지 하나 없다. 하지만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만은 누구라도 고향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정겹고 편안하다. 진안 마이산 남쪽의 마령면과 500리 섬진강 물길의 발원지가 있는 백운면, 그리고 성수산·매봉·고덕산 등의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임실군 성수면 등지의 풍경들은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런 풍경은 임실군 임실읍과 청웅면을 지나 옥정호의 호반길에 올라서기 직전까지도 계속된다.

정읍시 산내면의 구절재를 넘어 칠보 땅에 접어든 30번 국도는 가없이 펼쳐진 호남평야의 한복판을 가로지른다. 산은 없고 들만 보이는 풍경이 매우 상쾌하면서도 지루하다.
부안 읍내를 지나자 서해 바다와 내변산에 가로막힌 호남평야가 마침내 그 끝을 드러낸다. 대구에서 변산반도 사이의 318km에 달하는 30번 국도의 종점 구간에 들어선 것이다. 사실 여태껏 지나온 길은 변산반도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과 바다가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는 변산반도는 30번 국도의 모든 노정을 함축해 놓은 듯이 다채롭고 수려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바다에는 산, 계곡, 호수, 바다, 고개, 평야, 역사유적, 고찰 등이 다 있다. 그래서 변산반도는 30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행의 시점이 아니라 종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