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교예단의 공연은 서구식 서커스에 익숙한 우리의 상식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널뛰기 쌍그네 등 전통놀이에서 공연 종목을 발굴했는가 하면 장대재주와 탄력비행, 원통굴리기 등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목을 선보였다.
13박14일 동안 서울에 체류하며 북한 서커스의 진수를 보여준 평양교예단이 남북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6월11일 중국 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남북정상회담을 경축할 목적으로 서울에 온 김유식부단장 이하 102명의 평양교예단원은 5월31일 서울에 도착해 6월4~10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모두 11차례 공연을 가졌다. 서울을 떠나는 날 열린 오찬에서 이들은 “잠실체육관이 교예를 위한 전문극장이 아니라서 걱정했지만 남측 동포들을 위해 온몸을 던져 연기했다”며 공연에 만족해 했다.
평양교예단의 공연은 서구식 서커스에 익숙한 우리의 상식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널뛰기 쌍그네 등 전통놀이에서 공연 종목을 발굴했는가 하면 장대재주와 탄력비행, 원통굴리기 등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목을 선보였다. 장대재주에서 단원들은 원숭이처럼 철봉에서 뛰놀았고, 하체를 하늘로 치켜세운 물구나무 자세에서 팔 힘만으로 장대를 잡고 올라가기도 했다. 체조의 철봉 종목 이상으로 어려워 보인 장대재주는 서구의 서커스에서는 볼 수 없는 창조적인 기술이었다.
원통굴리기도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김유식부단장의 아들인 김정철씨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통을 여러 개 포개고 그 위에 널빤지를 놓은 다음 올라가 훌라후프를 빠져나오는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탄력비행은 요정이 하늘을 나는 듯 가느다란 고무줄에 의존해 17m 높이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이러한 묘기는 북한이 교예에서도 이미 나름대로의 ‘주체(主體)’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평양교예단 공연에서 눈길을 끈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들이 사용한 우리말 제목이었다. 각각의 공연 종목에 대해 이들은 발재주 모자재주 공재주하는 식으로, ‘재주’라는 말을 자주 붙였다. 재주는 ‘재조’(材操)라는 한자어에서 나왔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서커스를 가리킬 때도 쓴다. 이들은 마술이라는 단어에 밀려 거의 쓰이지 않는 ‘요술’과 친구라는 한자어로 이제는 사회주의의 상징어가 되다시피 한 ‘동무’라는 단어도 공연 제목(두 동무)으로 자주 올렸다.
서울이라는 자유로운 무대에서 마음껏 재주를 뽐낸 평양교예단은 6·25전쟁 중인 1952년 6월10일 국립교예단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단원은 300여 명이고 현재까지 2만여 회 이상 공연을 가졌다 한다. 이들은 각각의 공연 종목을 중심교예, 조형교예, 공중교예, 체력교예 등으로 구분한다. 중심교예는 원통굴리기처럼 균형을 잡는 것이고, 장대재주는 체력교예에 해당한다. 조형교예는 인간 바벨탑을 만드는 것.
교예단원은 인민학교 시절 재능을 보인 학생을 뽑아 평양교예학교에 입교시킴으로써 양성된다. 이 학교에서 각 3년씩의 예비반과 전문반을 거친 졸업생은 평양교예단이나 모란봉교예단에 들어간다. 교예단에서는 다시 6급 단원을 시작으로 기량 향상에 따라 1급까지 올라가는데 1급이 되면 ‘인민배우’로 불린다. 인민배우에 이른 40대쯤에 실력이 더욱 뛰어나면 ‘공훈배우’라는 칭호를 받는다.
평양교예단은 서울 공연을 위해 북한에서 직접 대형 트러스 구조물을 가져와 잠실체육관에 설치했다. 이 구조물은 그네와 탄력비행, 철봉비행 등을 위한 것인데 서커스가 사실상 소멸된 남한에서는 구할 수 없어 직접 북한에서 가져왔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문화활동은 자유에 속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문화활동은 인민을 위로하고 당 선전을 펼치기 위해 장려되는 특징이 있다. 북한은 대중적인 문화 수단으로 이러한 목적 달성을 추구해 왔는데, 이를 실현시킨 양대 문화 활동이 교예단과 전자악단이다. 교예단의 대표가 서울에 온 평양교예단이고, 전자악단에는 보천보 전자악단이 있다.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료는 상당히 비쌌는데도(최저 3만원), 생각 밖으로 일반시민들이 많이 찾았다. 이는 서커스가 우리 사회에서 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방증으로 해석된다. 평양교예단 측은 한국민이 보여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와 지방 순회공연을 펼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13박14일 동안 서울에 체류하며 북한 서커스의 진수를 보여준 평양교예단이 남북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6월11일 중국 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남북정상회담을 경축할 목적으로 서울에 온 김유식부단장 이하 102명의 평양교예단원은 5월31일 서울에 도착해 6월4~10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모두 11차례 공연을 가졌다. 서울을 떠나는 날 열린 오찬에서 이들은 “잠실체육관이 교예를 위한 전문극장이 아니라서 걱정했지만 남측 동포들을 위해 온몸을 던져 연기했다”며 공연에 만족해 했다.
평양교예단의 공연은 서구식 서커스에 익숙한 우리의 상식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널뛰기 쌍그네 등 전통놀이에서 공연 종목을 발굴했는가 하면 장대재주와 탄력비행, 원통굴리기 등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종목을 선보였다. 장대재주에서 단원들은 원숭이처럼 철봉에서 뛰놀았고, 하체를 하늘로 치켜세운 물구나무 자세에서 팔 힘만으로 장대를 잡고 올라가기도 했다. 체조의 철봉 종목 이상으로 어려워 보인 장대재주는 서구의 서커스에서는 볼 수 없는 창조적인 기술이었다.
원통굴리기도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었다. 김유식부단장의 아들인 김정철씨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원통을 여러 개 포개고 그 위에 널빤지를 놓은 다음 올라가 훌라후프를 빠져나오는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탄력비행은 요정이 하늘을 나는 듯 가느다란 고무줄에 의존해 17m 높이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이러한 묘기는 북한이 교예에서도 이미 나름대로의 ‘주체(主體)’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평양교예단 공연에서 눈길을 끈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들이 사용한 우리말 제목이었다. 각각의 공연 종목에 대해 이들은 발재주 모자재주 공재주하는 식으로, ‘재주’라는 말을 자주 붙였다. 재주는 ‘재조’(材操)라는 한자어에서 나왔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서커스를 가리킬 때도 쓴다. 이들은 마술이라는 단어에 밀려 거의 쓰이지 않는 ‘요술’과 친구라는 한자어로 이제는 사회주의의 상징어가 되다시피 한 ‘동무’라는 단어도 공연 제목(두 동무)으로 자주 올렸다.
서울이라는 자유로운 무대에서 마음껏 재주를 뽐낸 평양교예단은 6·25전쟁 중인 1952년 6월10일 국립교예단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단원은 300여 명이고 현재까지 2만여 회 이상 공연을 가졌다 한다. 이들은 각각의 공연 종목을 중심교예, 조형교예, 공중교예, 체력교예 등으로 구분한다. 중심교예는 원통굴리기처럼 균형을 잡는 것이고, 장대재주는 체력교예에 해당한다. 조형교예는 인간 바벨탑을 만드는 것.
교예단원은 인민학교 시절 재능을 보인 학생을 뽑아 평양교예학교에 입교시킴으로써 양성된다. 이 학교에서 각 3년씩의 예비반과 전문반을 거친 졸업생은 평양교예단이나 모란봉교예단에 들어간다. 교예단에서는 다시 6급 단원을 시작으로 기량 향상에 따라 1급까지 올라가는데 1급이 되면 ‘인민배우’로 불린다. 인민배우에 이른 40대쯤에 실력이 더욱 뛰어나면 ‘공훈배우’라는 칭호를 받는다.
평양교예단은 서울 공연을 위해 북한에서 직접 대형 트러스 구조물을 가져와 잠실체육관에 설치했다. 이 구조물은 그네와 탄력비행, 철봉비행 등을 위한 것인데 서커스가 사실상 소멸된 남한에서는 구할 수 없어 직접 북한에서 가져왔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문화활동은 자유에 속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문화활동은 인민을 위로하고 당 선전을 펼치기 위해 장려되는 특징이 있다. 북한은 대중적인 문화 수단으로 이러한 목적 달성을 추구해 왔는데, 이를 실현시킨 양대 문화 활동이 교예단과 전자악단이다. 교예단의 대표가 서울에 온 평양교예단이고, 전자악단에는 보천보 전자악단이 있다.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료는 상당히 비쌌는데도(최저 3만원), 생각 밖으로 일반시민들이 많이 찾았다. 이는 서커스가 우리 사회에서 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방증으로 해석된다. 평양교예단 측은 한국민이 보여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와 지방 순회공연을 펼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