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이사회는 12월 7일 최창원 신임 수펙스 의장을 선임하고 SK㈜, SK이노베이션, SK온 대표이사에 각각 장용호 SK실트론 사장, 박상규 SK엔무브 사장, 이석희 전 SK하이닉스 대표를 임명하는 것을 뼈대로 한 인사안을 의결했다.
최창원 신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왼쪽). 최윤정 신임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 [뉴시스, SK그룹 제공]
‘서든데스’ 경고 2개월 만에 인사 물갈이
이번 인사의 핵심 메시지는 그간 SK그룹을 이끌어온 경영진의 전면 세대교체라 할 수 있다. 조대식 수펙스 의장과 장동현 SK㈜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등 기존에 그룹 및 핵심 사업부를 진두지휘한 부회장 4인방이 2선으로 물러나 고문(顧問) 역할을 맡게 됐다. 조 의장은 SK㈜로, 장 부회장은 SK에코플랜트로 자리를 옮기고, 김 부회장과 박 부회장은 각각 SK이노베이션과 SK하이닉스에서 부회장은 유지하면서 자문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 부회장은 2016년 당시 50대 나이로 최고경영진에 합류해 지금까지 최 회장을 보좌해왔다.인사 발표 전부터 SK그룹 안팎에선 큰 폭의 리더십 교체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재계에서는 “지난해 말 조대식, 장동현, 김준, 박정호 부회장의 용퇴론이 이미 흘러 나왔다”는 말도 나온다. 이런 전망의 근거는 최근 SK그룹의 핵심 사업 실적이 악화하는 등 대내외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업황 악화로 새로운 도전을 맞이했고, 전기차 배터리업체 SK온은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계열사 간 중복 투자로 각종 투자 실적까지 악화됐다. 최 회장은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CEO 세미나’에서 “급격한 대내외 환경 변화로 빠르게, 확실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기업의 서든데스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심사숙고 끝에 최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12월 7일 발표된 인사안을 최종 재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최 회장은 11월 30일 SK최종현학술원과 도쿄대가 주최한 ‘도쿄포럼’ 참석차 도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번 인사에서 최 회장의 사촌동생 최창원 부회장이 SK그룹 2인자라 할 수 있는 수펙스 의장으로 전격 선임된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포인트다. 평소 그룹 확대경영회의 등 중요 행사에서 최창원 부회장은 최태원 회장 바로 옆 자리에 앉는 등 최 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최 회장이 최창원 부회장과 극비리에 따로 만나 이번 인사 내용과 그룹의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의장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는 후문도 있다. 1964년생인 최창원 부회장은 SK그룹 최종건 창업주의 셋째 아들이다. SK가스·SK케미칼·SK플라즈마·SK디앤디 등을 자회사로 둔 SK디스커버리의 최대주주로, SK디스커버리 대표이사와 SK가스 사내이사, SK경영경제연구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그간 SK디스커버리를 중심으로 한 지주사 체제를 마련하는 한편, 신재생에너지, 친환경 소재 등 미래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촌형이자 총수인 최 회장의 신뢰를 바탕으로 최창원 부회장이 향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으로서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선 이번 인사를 두고 “SK그룹의 형제경영 전통이 사촌경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최종건 창업주와 최종현 회장의 형제 의기투합이 오늘날 SK그룹을 있게 했기 때문이다. 1944년 경성공립직업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입사한 최종건 창업주는 1953년 선경직물을 인수해 SK그룹의 기틀을 닦았다. 그는 직물 사업을 바탕으로 사세를 키워 정유화학, 무역 등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동생 최종현 회장이 미국 위스콘신대 졸업 후 시카코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1962년 귀국해 본격적으로 경영에 합류했다. 1973년 최종건 창업주가 40대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동생 최종현 회장이 기업 경영을 맡았다. 이후 SK그룹은 최종현 회장의 진두지휘 하에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 통신사업 진출 등 굵직한 도전에 연이어 성공하면서 오늘날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랬던 최종현 회장이 1998년 후계 구도에 대해 이렇다 할 뜻을 밝히지 않은 채 별세하자, 형제경영 전통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당시 최종건 창업주 집안을 포함한 오너 일가가 한데 모여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현 회장을 차기 총수로 추대한 것이다.
최태원 “후계 구도, 나만의 계획 있다”
최창원 부회장의 그룹 2인자 등극이 오너 일가의 친정체제 구축이나 구체적인 후계 결정이라기보다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구원투수 등판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태원 회장의 자녀 3명 모두 SK그룹 계열사에 적을 두고 있는 데다, 이번 인사에서 장녀 최윤정 씨가 부사장급 임원으로 승진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의 자녀 모두 자기 명의의 지분은 없으나 SK그룹 내에서 넓은 의미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이번에 승진한 최윤정 씨는 1989년생으로, 중국 베이징국제고와 미국 시카고대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2015~2017년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앤드컴퍼니를 거쳐 2017년 SK바이오팜 경영전략실 전략팀 선임 매니저(대리급)로 SK그룹에 첫발을 디뎠다. 2019년 휴직한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생명정보학 석사학위 과정을 밟았고, 2021년 7월 복직해 올해 1월 SK바이오팜 전략투자팀장으로 승진했다. 이번 승진은 신규 투자와 사업 개발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최 회장의 차녀 최민정 씨는 SK하이닉스를 휴직하고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막내아들 최인근 씨는 SK E&S 북미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최근 후계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이 있다. 10월 미국 블룸버그 통신과 인터뷰에서 최 회장은 “후계 구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내가 사고를 당한다면 우리 그룹을 누가 이끄냐”면서 승계에 대비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나만의 계획은 있지만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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