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강한 시금치.
“여보, 여보! 시금치는 꽃이 두 가지야!”
암수가 따로따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우리는 부랴부랴 도감을 뒤지고 채소학 책을 다시 읽으며 공부했다. 그랬더니 시금치는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그루에 있고, 그 비율은 반반이란다. 그것도 모른 채 참 오래 길러왔고, 먹어왔으며, 씨앗을 받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쭉정이라고 여긴 것은 수그루. 씨앗은 당연히 암그루에만 맺는다.
시금치꽃은 풍매화라 우리 눈에 거의 띄지 않는다. 암꽃은 실 같은 암술대 몇 가닥이 전부요, 수꽃은 제 나름 고운 빛깔을 가졌지만 꽃이 워낙 작아 그냥 지나치기 쉽다. 꽃 처지에서 보자면 그저 바람에 꽃가루를 잘 날리고, 잘 받으면 그만이다.
6월 3일 같은 날, 아직 싱그럽게 수정을 기다리는 노처녀 시금치와 다 영근 시금치. 암 시금치와 수 시금치(왼쪽부터).
보통 5월 말이면 시금치 수꽃은 대부분 지고, 조금씩 단풍이 든다. 암 시금치 역시 씨앗들이 씨방 속에서 잘 영글어, 머지않아 거둘 때가 다가온다. 하지만 외딴 시금치는 여전히 잎과 줄기가 싱그럽고, 암술 역시 꽃가루받이를 기다리는 태가 확연하다. 지치지도 않고 아침마다 단장을 하고 임을 기다리는 듯….
그 모습이 짠해 마음 같아서는 나라도 수꽃을 가져다 수정을 해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때쯤 둘레 수꽃들은 거의 말라버린 상태. 수그루는 꽃가루를 날리고 나면 더는 살 이유가 없다. 가능하다면 일찍 목숨을 끝내는 게 씨앗이 영그는 데 도움이 된다. 암그루와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들한테 제 몸을 거름으로 던져주는 것이다.
수정을 못 하고 하루하루 늙어가는 처녀 시금치. 참 곱기만 하다. 6월 초, 무리 속에서 제때 꽃을 피운 시금치는 씨앗이 다 영글었다. 그렇다면 외딴 시금치는 어떨까. 싱그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처녀 시금치여! 하얀 암술을 꼿꼿이 하고서 여전히 임을 기다리고 있다. 꽃이 핀 지 얼추 한 달도 더 지났다.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며
그래서 좀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사이 일부가 수정돼 씨방이 제법 통통하니 굵다. 그런데 그 곁에 여전히 하얀 암술 수십 개가 보인다. 이건 여전히 수정이 안 됐다. 이 시금치가 믿는 건 우리가 씨앗을 받기 위해 남겨둔, 집 둘레 시금치 수십 포기가 전부다. 외딴 시금치와는 100여m나 떨어진 상태. 수꽃 꽃가루가 바람 따라 이리저리 날리다 그 가운데 몇 개나마 운 좋게 이 외딴 시금치에 닿은 것이다. 나머지는 처녀로 늙어 죽게 된다.
작물을 제대로 돌본다는 게 참 어렵다. 어쩌면 자식 키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거 같다. 작물은 사람과 달리 말조차 없으니 말이다. 외딴 시금치를 통해 사랑, 그 근원을 조금이나마 엿본 거 같다.
두 종류의 시금치 씨앗, 공모양(왼쪽)과 뿔모양.
뿔모양 시금치는 로제트 상태로 겨울을 나고, 봄이 와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한가운데서 줄기가 올라온다. 줄기가 성인 허벅지 높이까지 자라며 4월 말부터 5월에 걸쳐 꽃을 피운다. 식용식물 가운데 특이하게 암수딴그루며 풍매화. 암꽃은 잎겨드랑이에 3~5개씩 모여 핀다. 수꽃은 줄기가 자람에 따라 이삭꽃차례나 둥근뿔꽃차례로 달리며 아래서부터 위로 시나브로 피고 진다. 수꽃에는 수술이 4개 있고 꽃밥은 노란빛이다. 꽃말은 ‘활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