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가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이를 보도하는 한국 언론의 태도가 가관이다. ‘조선일보’는 ‘노벨위원회가 디턴 교수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긴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부 경제학계에서 피케티류의 평등주의적 접근 방식에 힘이 실리는 것에 대한 경계감’을 나타낸 것이고, ‘노벨위원회의 판단은 불평등의 대안이 복지 확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웅변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썼다. 디턴의 책 ‘위대한 탈출’을 출간한 ‘한국경제신문’은 디턴이 ‘토마 피케티의 대항마’이고, 그가 “불평등이야말로 성장의 또 다른 기회”라고 역설했다고 보도했다.
경제 불평등과 정치 민주주의
역설적으로 한국 언론의 노벨상 기사는 디턴이 어떤 업적이 있기에 노벨상을 수상했는지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 노벨상 보도마저 이념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모습이 엿보일 뿐이다. 이런 보도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적절하다. 첫째, 디턴과 피케티의 실제 주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작문했다는 점이다. 둘째, 객관적 증거로 증명하고 논쟁하기보다 노벨상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 논법상 문제점이다.
먼저 두 번째 문제부터 따져보자. 방법은 디턴의 실제 주장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수파 경제학자도, 진보파 경제학자도 모두 노벨상을 수상했다. 자유시장경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보수주의자 공격의 선봉에 서 있는 폴 크루그먼도 이 상을 받았다. 반면 세금의 부정적 효과를 연구해왔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활성화 법률인 ‘미국 재건과 재투자법’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던 에드워드 프레스콧도 200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보수성향 학자인 제롬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도 노벨상 수상자고,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는 토빈세의 제안자 제임스 토빈과 복지경제학의 거두 아마르티아 센도 노벨상 수상자다. 노벨상 수상이라는 후광효과를 이용해 이념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은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 가운데 하나인 ‘권위에 의한 논증의 오류’다.
권위에 의한 논증도 답답하지만, 권위를 가진 당사자가 했던 얘기와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디턴은 저서 ‘위대한 탈출’에서 피케티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피케티는 그를 사회과학계의 록스타로 만든 ‘21세기 자본’이 출간되기 전 이미 불평등의 장기 변화에 대한 논문으로 유명해졌고, 불평등 연구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학자가 됐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자본의 수익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그가 이전 저작에서 실증한 소득 불평등의 증가에 대해서는 대다수 학자가 동의한다. 디턴도 예외가 아니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서 왜 극심한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인지 그 메커니즘을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화할 경우 부를 가진 소수가 정치적 영향력을 과도하게 갖게 되고 대다수 시민의 정치력 영향력은 약화된다. 이로 인해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훼손되고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약화된다. 민주주의의 약화는 사회적 웰빙에 직접적인 손상을 가져오는데,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정치적 참여의 저하가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약화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와 건강 평등, 부자들의 재산을 늘리는 데 희생양이 되지 않을 권리 등 다른 영역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증가하는 불평등, 특히 선진국에서의 불평등 증가에 대한 디턴의 생각은 ‘불평등이 성장의 기회’라는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오히려 소득 불평등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민주주의라는 정치 문제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을 복원하는 피케티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태도에서 디턴과 피케티가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 언론은 피케티를 성장 반대론자처럼 보도하지만, 피케티는 그의 책에서 경제성장의 위대함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다. 디턴과 피케티 모두 경제성장은 많은 인류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기술한다. 디턴은 이에 더해 아직 많은 사람이 빈곤 상태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피케티에 따르면 높은 경제성장률은 세대 간 사회이동, 즉 ‘개천에서 용 나는’ 일도 쉽게 만든다. 경제성장의 긍정적 효과를 부정하는 견해는 디턴의 것도, 피케티의 것도 아니다.
실증적 연구의 대가, 걸맞은 대접해야
피케티가 자본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경제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20세기 인류가 누렸던 경제성장을 앞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디턴과 피케티의 의견이 다른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디턴은 미래 경제성장률 예측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 역시 낮은 경제성장률에서는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경제성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희망적으로’ 전망한다. 다만 이러한 그의 희망은 선진국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현재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의 경제성장 가능성에 방점이 찍힌 희망이다.
미래 경제성장률에 대한 비관적 전망은 피케티의 고유한 주장도, 좌파 학자들만의 레퍼토리도 아니다. 경제성장론의 대가 가운데 한 명인 로버트 고든도 앞으로 선진국 성장률은 1%대로 떨어질 것이라 주장했고, 보수적 경제학자로 피케티를 비판했던 타일러 카우언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도 장기 저성장을 예측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제성장률 1%는 재앙처럼 느껴지지만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연 1% 정도였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정작 디턴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건 불평등과 성장의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 아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밝힌 디턴의 공로는 서베이 데이터를 이용한 개인의 소비와 저축 성향을 정교하게 측정해 거시적 경제 문제에 공헌한 것이다. 디턴의 2010년 미국경제학회 회장 연설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빈곤율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직접 비교하는 것이 왜 부적절한지, 기준을 바꿈에 따라 빈곤율 측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웅변하고 있다. 서울 물가가 전 세계 몇 위인지를 계산하는 것 같은 지역별 구매력 환산 지수 측정도 그의 중요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다.
디턴은 새로운 경제이론을 주창한 학자라기보다 마이크로데이터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에서 빛을 발한 학자다. 역대 노벨경제학 수상자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연구 분야 역시 광범위하다. 언론의 이념 투쟁 소재로 삼기에는 그가 일궈온 궤적이 무척이나 정교하다.
경제 불평등과 정치 민주주의
역설적으로 한국 언론의 노벨상 기사는 디턴이 어떤 업적이 있기에 노벨상을 수상했는지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 노벨상 보도마저 이념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모습이 엿보일 뿐이다. 이런 보도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적절하다. 첫째, 디턴과 피케티의 실제 주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작문했다는 점이다. 둘째, 객관적 증거로 증명하고 논쟁하기보다 노벨상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 논법상 문제점이다.
먼저 두 번째 문제부터 따져보자. 방법은 디턴의 실제 주장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수파 경제학자도, 진보파 경제학자도 모두 노벨상을 수상했다. 자유시장경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보수주의자 공격의 선봉에 서 있는 폴 크루그먼도 이 상을 받았다. 반면 세금의 부정적 효과를 연구해왔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활성화 법률인 ‘미국 재건과 재투자법’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던 에드워드 프레스콧도 200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보수성향 학자인 제롬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도 노벨상 수상자고,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는 토빈세의 제안자 제임스 토빈과 복지경제학의 거두 아마르티아 센도 노벨상 수상자다. 노벨상 수상이라는 후광효과를 이용해 이념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은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 가운데 하나인 ‘권위에 의한 논증의 오류’다.
권위에 의한 논증도 답답하지만, 권위를 가진 당사자가 했던 얘기와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디턴은 저서 ‘위대한 탈출’에서 피케티의 주장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피케티는 그를 사회과학계의 록스타로 만든 ‘21세기 자본’이 출간되기 전 이미 불평등의 장기 변화에 대한 논문으로 유명해졌고, 불평등 연구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학자가 됐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자본의 수익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그가 이전 저작에서 실증한 소득 불평등의 증가에 대해서는 대다수 학자가 동의한다. 디턴도 예외가 아니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서 왜 극심한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인지 그 메커니즘을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화할 경우 부를 가진 소수가 정치적 영향력을 과도하게 갖게 되고 대다수 시민의 정치력 영향력은 약화된다. 이로 인해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훼손되고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약화된다. 민주주의의 약화는 사회적 웰빙에 직접적인 손상을 가져오는데,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정치적 참여의 저하가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약화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와 건강 평등, 부자들의 재산을 늘리는 데 희생양이 되지 않을 권리 등 다른 영역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증가하는 불평등, 특히 선진국에서의 불평등 증가에 대한 디턴의 생각은 ‘불평등이 성장의 기회’라는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오히려 소득 불평등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민주주의라는 정치 문제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을 복원하는 피케티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대한 태도에서 디턴과 피케티가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 언론은 피케티를 성장 반대론자처럼 보도하지만, 피케티는 그의 책에서 경제성장의 위대함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다. 디턴과 피케티 모두 경제성장은 많은 인류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기술한다. 디턴은 이에 더해 아직 많은 사람이 빈곤 상태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피케티에 따르면 높은 경제성장률은 세대 간 사회이동, 즉 ‘개천에서 용 나는’ 일도 쉽게 만든다. 경제성장의 긍정적 효과를 부정하는 견해는 디턴의 것도, 피케티의 것도 아니다.
실증적 연구의 대가, 걸맞은 대접해야
피케티가 자본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경제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20세기 인류가 누렸던 경제성장을 앞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디턴과 피케티의 의견이 다른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디턴은 미래 경제성장률 예측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 역시 낮은 경제성장률에서는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경제성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희망적으로’ 전망한다. 다만 이러한 그의 희망은 선진국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현재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의 경제성장 가능성에 방점이 찍힌 희망이다.
미래 경제성장률에 대한 비관적 전망은 피케티의 고유한 주장도, 좌파 학자들만의 레퍼토리도 아니다. 경제성장론의 대가 가운데 한 명인 로버트 고든도 앞으로 선진국 성장률은 1%대로 떨어질 것이라 주장했고, 보수적 경제학자로 피케티를 비판했던 타일러 카우언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도 장기 저성장을 예측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제성장률 1%는 재앙처럼 느껴지지만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연 1% 정도였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정작 디턴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건 불평등과 성장의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 아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밝힌 디턴의 공로는 서베이 데이터를 이용한 개인의 소비와 저축 성향을 정교하게 측정해 거시적 경제 문제에 공헌한 것이다. 디턴의 2010년 미국경제학회 회장 연설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빈곤율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직접 비교하는 것이 왜 부적절한지, 기준을 바꿈에 따라 빈곤율 측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웅변하고 있다. 서울 물가가 전 세계 몇 위인지를 계산하는 것 같은 지역별 구매력 환산 지수 측정도 그의 중요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다.
디턴은 새로운 경제이론을 주창한 학자라기보다 마이크로데이터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에서 빛을 발한 학자다. 역대 노벨경제학 수상자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연구 분야 역시 광범위하다. 언론의 이념 투쟁 소재로 삼기에는 그가 일궈온 궤적이 무척이나 정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