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한중일 연금 전문가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발표를 마치니 연금 업무를 담당하는 일본 공무원이 주저하다 질문하더라. ‘한국은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 보험료를 부담하는데, 어떻게 훨씬 많은 연금액을 줄 수 있느냐’며 비법을 묻는 것이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이 5월 7일 주간동아와 인터뷰에서 한국 국민연금에 대한 외국의 시선을 이같이 전했다. 윤 명예연구위원은 제1~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모두 참여한 연금 전문가다. 그는 현 국민연금제도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오랜 기간 견지해오고 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 [홍태식]
경악할 만한 대참사
국민연금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국민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다.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가 시민대표단 500명을 모집한 배경이기도 하다. 공론화 결과 국민연금 개혁 향방은 이른바 ‘더 내고 더 받는 안’으로 맞춰졌다. 시민대표단이 3차 설문조사에서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리는 1안에 56% 지지를 보낸 것이다. 보험료율을 9%에서 12%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현행을 유지하는 2안은 42.6% 지지만 받았다. 21대 국회에서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한 여야 합의가 불발되면서 연금개혁은 22대 국회로 미뤄진 상태다.문제는 당초 국민연금 개혁이 논의된 배경이 재정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보험료율은 4%p만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10%p 올리는 이번 개혁안이 도리어 재정 안정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윤 명예연구위원은 “소득대체율 40%를 지급하는 나라들의 평균 보험료율이 18%를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윤 명예연구위원과 나눈 일문일답.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의 공론 조사 결과를 어떻게 봤나.
“경악할 만한 대참사다. 한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의 상황은 다르다. 독일, 스웨덴 등 복지국가들은 이른바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은 많은 사람이 보험료를 내고만 있을 뿐 본격적인 연금 수령 단계에 들어서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1000조 원 상당의 적립금이 쌓였다. 이것이 굉장한 착시효과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착시효과를 준다는 의미는.
“‘다른 나라는 적립금 없이도 연금제도가 잘 굴러간다. 우리는 1000조 원이나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하지만 미적립부채를 고려해야 한다. 지급하기로 약속한 연금 액수가 2800조 원이 넘는다. 적립금을 감안해도 1825조 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할 경우 보험료율은 20% 근방으로 올려야 한다. 그런데 보험료율은 4%p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10%p 올리기로 결정했다.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 아닌가.”
시민대표단 결정을 옹호하는 측은 합계출산율이 반등하는 등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고 하는데.
“국민연금 제5차 재정계산 당시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하고 보험료율을 15%로 올리더라도 재정 안정 달성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추계마저 상당히 낙관적인 가정을 채택한 결과였다. 2040년 이후 합계출산율이 1.21명으로 반등한다고 가정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2명이었고, 4분기에는 0.65명으로 떨어졌다. 여러 측면에서 봤을 때 소망사항이자 희망고문일 뿐이다.”
국고 투입?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나
보험료율 인상 대신 ‘사전적 국고 투입’으로 대응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는데.“국민이 보험료율 인상을 너무 싫어하다 보니 ‘보험료율은 조금 올리고 세금을 투입하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미 해결해야 할 미적립부채만 1825조 원에 달한다. 국고 투입에 사용되는 재원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결국 경제활동인구가 부담해야 한다. 다음 세대는 보험료율이 13~15%고, 별도로 세금도 많이 내야 한다는 소리다. 이들이 받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기성세대보다 훨씬 떨어질 텐데 말이다.”
미래세대의 부담은 어느 정도로 커질까.
“1960년대 전후로 태어난 세대와 기금 고갈 이후(2055년 추정) 일하는 세대는 생애 부담하는 보험료율이 4배 가까이 차이가 날 것이다. 이미 발생한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고, 건강보험료도 2배가량 부담하게 될 전망이다. 장기요양보험료 역시 오를 것이다. 가뜩이나 한 해 20만~25만 명 태어난 세대가 70만~100만 명 태어난 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다. 부담을 4~5배 키운 상황에서 ‘걱정 마라. 공적연금제도라는 것은 원래 이런 식으로 세대 간 부양이 이뤄지는 시스템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추상적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기들은 책임지지 않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해버렸다.”
사실상 미래세대에게 책임을 넘겨버린 것 같다.
“지난 26년간 지금보다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고 인구구조도 안정적이었지만 보험료율을 단 1%p도 올리지 못했다. 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1안이 채택될 경우 2093년 보험료율이 43%를 넘길 전망이다. 정말 이 방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절반인 21.5% 보험료율이라도 부담해봐라. 그 정도 행동은 보여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고, 세대 간 형평성도 확보할 수 있다.”
국민연금 문제를 논의할 때면 항상 노인 빈곤 문제가 따라온다.
“노인 빈곤율 통계에는 함정이 있다. 노인 빈곤율이 높다지만, 정확히는 소득 차원에서 빈곤율이다. 소득과 자산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노인 가운데 25%가량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에게 여러 복지혜택을 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기초연금은 만 65세 이상 70%에게 똑같이 지급된다. 기초연금을 받는 노인 가운데 3분의 1은 OECD 기준으로 빈곤하다고 할 수 없다. OECD는 오래전부터 한국 기초연금제도는 노인 빈곤 완화에 효과가 적으니 진짜 어려운 노인들을 좀 더 집중적으로 지원할 것을 권고해왔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려 노인 빈곤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린다고 해서 노인 빈곤 문제가 해소될 수는 없다. 애당초 취약계층은 국민연금 제도권 밖에 있고 가입 기간도 짧아 월 지급액이 적다. 현 방식은 안정적으로 자산을 구축한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에게 막대한 부담을 물려주면서, 동시에 자산 양극화를 심화할 우려가 크다.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당시 이탈리아는 독재를 정당화하고자 연금제도 급여 수준을 굉장히 높였다. 당장은 좋았지만 국민연금·보험료 등의 압박에 우수한 청년들이 나라를 떠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 나라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시민대표단에 참여한 20대의 1안 찬성률이 53.2%라고 하는데.
“연금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안정성이다. 만일 20대에게 ‘지금 보험료를 많이 내지만, 훗날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면 이들이 같은 선택을 할까.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나중에 국가가 세금을 걷거나 해서 어떻게든 받게 해주겠다’며 가스라이팅을 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김상균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4월 22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연금개혁 공론화 논의 최종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국민 상대로 사기 치는 것
국민연금이 지속 불가능하다고 보나.“어떻게 지속가능하겠나. 스웨덴은 보험료율이 18.5%고 독일은 18.6%, 일본은 18.3%를 부담하고 있다. 스웨덴은 2050년이 되면 소득대체율이 33%로 떨어질 전망이다. 독일 역시 2050년 기준 소득대체율이 37% 안팎이며, 캐나다는 보험료율 11.9%를 부담하면서 소득대체율은 33% 안팎이다. 보험료율이 24.4%인 핀란드 역시 기대수명계수를 적용하면 장기적으로 소득대체율이 44.3%로 떨어진다. 한국 국민연금제도는 말도 안 되게 내고 받는 것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미 막대한 부채가 예정된 상황에서 젊은이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국가가 무조건 지급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식으로 국민연금을 개혁해야 한다고 보나.
“국민연금을 이대로 두면 망국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고통스러워도 개혁해야 한다. 단번에 개혁이 어렵다면 소득대체율을 현행 40%로 유지하고 보험료율만 15%로 올리자. 그것마저 어렵다면 보험료율을 13%로라도 인상하자. 일단 이렇게 응급조치를 한 후 확정기여(DC)형 연금제도로 지급 방식을 전환한 스웨덴식 모델을 집중 논의해 구조 개혁을 할 필요가 있다. 일생 납부한 보헙료에 이자(실질경제성장률)를 더한 금액을 매달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최진렬 기자입니다. 산업계 이슈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4만전자… 시가총액 300조 깨졌다
“89만 원에 사서 67만 원에 판다는데 누가 고려아연 지지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