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은신했던 별장 내부(왼쪽). 7월 22일 경기 안성시에서 경찰이 수배 전단을 들고 검문검색을 하고 있다. 검찰과 경찰은 장남 유대균 씨와 측근 양회정 씨 등 관련자 검거에 주력할 방침이다.
6월 12일 전남 순천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유병언(73) 전 세모그룹 회장이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가 나온 그다음 날인 7월 23일. ‘동아일보’ 기자를 만난 최재경 인천지검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하늘이 무섭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최 지검장은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유 전 회장 일가의 비리 수사를 총괄 지휘해왔다. 책임을 회피한 ‘황제 도피’의 끝은 결국 노숙과 객사이며, 검사가 심판하지 못하면 결국 하늘이 심판한다는 얘기로 들렸다. 유 전 회장을 생포해 처벌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최 지검장은 7월 24일 사표를 내고 검사 옷을 벗었다.
여비서의 결정적 거짓말
이날 수사팀장인 김회종 인천지검 2차장과 수사팀, 검거팀을 이끌었던 부장검사들도 최 지검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최 지검장은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유 전 회장의 장남인) 유대균(44)의 검거 등에 만전을 기하라”고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이들의 사표는 반려했다.
죽은 유병언 때문에 살아 있는 검사들이 줄 사표를 낸 사태는 사실 전날 예견돼 있었다. 7월 23일 인천지검은 유 전 회장이 전남 순천 별장 ‘숲 속의 추억’ 통나무 벽 안 비밀공간에 숨어 있었지만 놓쳤다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그간의 수사와 추적 과정을 상세히 공개하면서 최선을 다해왔다는 점도 강조했다. 국민 평가를 받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실수와 난맥상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노력에 대한 평가보다 사정없는 비판만 들이닥쳤다.
“유병언이 숨어 있던 통나무 벽 안을 보지 못한 걸 통탄할 뿐이다, (중략) 무능하다는 질책과 비난은 얼마든 감수할 수 있지만 유씨 일가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검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일해왔다. 밤낮 휴일 없이 잠복하며 일해온 수사관들의 노력과 고생은 내가 보증한다. 유병언 부자의 검거 과정은 모두 수사팀장인 내 지시에 의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잘못에 대한 비난은 오로지 내 몫이다.”(7월 23일 김회종 인천지검 2차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7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수사 관련 현안보고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검거가 결정적으로 꼬인 시점은 검찰 내부에서조차 “유 전 회장을 거의 다 잡았다”고 알려졌던 5월 25일 순천 별장에 대한 수색 때부터다. 검찰은 이 사실을 한 달이나 지난 6월 26일 뜻밖의 진술을 듣고 뒤늦게 알게 됐다. 유 전 회장과 별장에서 함께 은신하다 구속된 여비서 신모(33) 씨가 돌연 진술을 바꾼 것이다.
“수사관들이 별장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려 유 전 회장을 2층 통나무 벽 안에 있는 은신처로 급히 피신하게 했다. (검찰과 경찰이) 수색을 마칠 때까지 (유 전 회장은) 그 안에 숨어 있었다.”
신씨는 체포 당시부터 “5월 25일 새벽에 잠을 자고 있는데 인기척이 나서 눈을 떠보니 모르는 남자가 유 전 회장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유 전 회장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날 새벽에 유 전 회장이 제3자의 도움을 받아 별장을 빠져 나갔다는 얘기였다. 이후 검찰은 신씨 진술을 토대로 유 전 회장이 순천 일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도피 중이라는 점을 전제로 검거 작전을 펼쳤지만 허탕이었다. 모두 신씨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사실 검찰의 추적 작업은 문제의 별장을 덮치기 전까지 거침없었다. 유 전 회장이 검찰 소환 요구에 불응한 직후인 5월 16일부터 추적팀을 구성해 검거 작업에 들어간 검찰은 5월 24일부터 순천에서 유 전 회장의 도피를 도왔던 구원파 관계자를 줄줄이 체포했다. 경기 안성시 금수원에서 생수와 마른 과일, 생필품 등을 챙겨 순천으로 운반했던 한모(49) 씨로부터 별장 존재를 파악한 검찰은 25일 오후 9시 30분부터 2시간가량 수색을 진행했으나 유 전 회장은 찾지 못했고 홀로 남아 있던 신씨만 체포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신씨가 “유 전 회장을 안전하게 도피하게 하려고 그동안 거짓 진술을 했다”면서 통나무 벽 안을 얘기했고, 검찰은 이튿날 부랴부랴 다시 순천으로 가 별장을 압수수색했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은 없었고, 그가 언제 별장에서 빠져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검찰 확인 결과 신씨 진술대로 별장 2층에는 통나무 벽을 잘라 만든 9.9㎡(3평)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좌우 끝 부분은 지붕 경사면으로 돼 있고, 공간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잠금장치도 있었다.
검찰이 7월 23일 인천지방검찰청에서 6월 27일 전남 순천 ‘숲 속의 추억’ 별장에서 찾아낸 현금을 공개했다.
통나무 벽 비밀공간은 유 전 회장의 측근인 양회정(56) 씨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목수인 양씨는 유 전 회장이 이곳에 은신하기 전 미리 내려와 별장 창문을 가리는 등 내부 공사를 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양씨는 창문에 부직포를 붙여 빛이 새나갈 틈을 모두 막는 등 별장 내부 수리를 했는데, 비밀공간 역시 이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신씨의 바뀐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면, 검찰이 처음 별장을 수색한 이후에도 통나무 벽 안에 숨은 유 전 회장을 붙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놓쳤다. 신씨를 체포한 이튿날인 5월 26일에도 검찰은 정밀 감식을 실시해 유 전 회장의 체액 등을 확보하느라 별장에서 상당 시간 작업을 했다. 이후 유 전 회장의 조력자들이 다시 올 수 있다고 판단해 감시용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지만 별도 인력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스쿠알렌 등 발견에도 깜깜
구속영장이 청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친형 유병일 씨(위)와 유 전 회장의 부인 권윤자 씨.
유 전 회장의 시신이 발견된 6월 12일 검찰과 경찰은 안성시 금수원 2차 압수수색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틀간 1만여 명이 유 전 회장이 누워 있던 순천으로부터 260km 떨어진 곳에서 유 전 회장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검경은 금수원 지하 땅굴이나 벙커에 유 전 회장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첩보를 확인하려고 땅굴 탐지기까지 동원했을 정도로 유 전 회장이 이미 사망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주민 박윤석(77) 씨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한 현장엔 유 전 회장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경찰은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온 7월 21일 저녁에야 뒤늦게 이들 유류품을 정밀 조사했다. 이성한 경찰청장은 22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달 발견된 시신이 유 전 회장일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못했고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오고서야 알게 됐다”면서 “초동수사에서 실수가 있었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변사자 보고를 받고 사건 처리를 지휘한 검찰도 안이하긴 마찬가지였다.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담당 검사는 ‘사망자에게 금니가 10개 있다’는 등의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일반 변사자 처리 절차에 따랐다. 금니 10개가 유 전 회장의 신체 특징과 유사하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유류품 보고는 올라왔다”면서도 “민생 사건을 처리하는 형사부 검사가 신문을 못 보는 처지였을 수 있고 유 전 회장에 대한 지식도 한계가 있었을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검찰 관계자는 “한 사람만 경계를 제대로 서도 전쟁을 막는다고 하지 않았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국민 앞에서 공개 망신도 당했다. 7월 21일 대검찰청은 세월호 관련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유 전 회장의 사전 구속영장을 6개월 기한으로 재청구했다. 그러면서 “추적의 꼬리를 놓지 않고 있다. 유 전 회장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4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시신이 유 전 회장인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에 통보하면서 혼란이 벌어졌다. 경찰이 인천지검에 연락한 뒤 인천지검은 오후 9시쯤 대검찰청 지휘부에 보고했다. 부랴부랴 검찰과 경찰 지휘부는 각기 심야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검찰은 유 전 회장의 시신이 본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면 ‘공소권 없음’으로 그에 대한 수사를 종결할 방침이다. 공소권 없음은 불기소 처분의 한 유형으로, 피의자가 사망하면 내리는 처분이다. 국내외에서 추적 중인 유 전 회장의 아들과 딸, 측근은 붙잡히는 대로 수사가 이뤄진 혐의에 따라 처벌한다는 게 검찰 측 방침이다.
유병언 공소권 없음, 측근들 재판 비상
7월 21일 오후 임정혁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세월호 사건 수사 개시 후부터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구속영장 재청구까지 수사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그 몇 시간 후 유 전 회장의 죽음이 알려졌다.
담당 재판부인 인천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이재욱)는 이미 한 차례 정식 재판과 두 차례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했다. 측근 ‘8인방’은 대체로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회사에 손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6월 16일 열린 첫 공판에서 세월호 참사 후 미국으로 도주한 김필배(76) 전 문진미디어 대표를 윗선으로 지목했다. 주범인 유 전 회장이 사망함으로써 향후 재판에서 검찰 수사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것이 확실한 상황이라 8인방이 유 전 회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혐의를 부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될 경우 유죄 입증이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그러나 인천지검은 “이 사건은 유병언 전 회장과 계열사 사장 등 다수 관련자가 저지른 기업 비리”라며 “유 전 회장과 관계없이 관련자들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객관적 물증 등을 바탕으로 청해진해운과 관계 회사의 경영 비리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경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몸통은 놓치고 깃털만 건드리는 힘 빠진 재판이 될 수 있다”며 “책임 소재를 가린다 해도 가벼운 처벌로 끝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 전 회장이 사망함에 따라 수천억 원대로 추산되는 재산의 국고 환수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관심사다. 검찰은 현재 유 전 회장 일가의 재산 1054억 원을 추징보전·가압류 등을 통해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게 묶어뒀다. 이 가운데 유 전 회장의 실명 및 차명 재산은 645억 원 정도. 추징보전은 형사상 유죄판결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유 전 회장에 대한 공소권이 사라지면 취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민사적으론 재산과 채무가 함께 상속되므로 세월호 사고 수습 비용과 관련해 국가는 여전히 유 전 회장 측에게 2000억 원 상당의 채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게 검찰 측 판단이다.
검찰은 이 재산을 세월호 침몰 참사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금 등으로 쓸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국가가 먼저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뒤 민사소송을 통해 사고 책임이 있는 유 전 회장 일가와 청해진해운 등 계열사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이다. 검찰 관계자는 “유 전 회장이 사망했다 해도 사고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통해 일가 재산을 사실상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검찰은 유 전 회장이 사실상 청해진해운 최고경영자 구실을 해왔고, 무리한 증축과 과적 운항 등 세월호 침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을 보고받은 만큼 민사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
검찰은 유 전 회장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돼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더 확실하겠지만, 지금까지 수사를 통해 확보한 증거와 진술로도 유 전 회장에게 민사적 책임을 물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 유 전 회장 가족이 재산을 상속받을 경우 채무도 함께 상속되기 때문에 구상권 청구는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것이 검찰과 법무부의 판단이다. 가족이 상속을 포기할 경우 유 전 회장 재산은 국고로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