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60년. 한반도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돈다. 북은 핵을 앞세워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남은 첨단 군사력 구축으로 맞선다. ‘주간동아’는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허리를 자르는 휴전선 155마일을 따라 군부대와 민통선(民統線·민간인출입통제선) 마을을 탐방하면서 분단 현실을 되짚어보고 평화공존 및 통일 비전을 그려보는 취재에 나섰다. 취재는 군사분계선 동쪽 끝인 강원 고성에서 시작해 서쪽 끝인 경기 김포·강화에서 막을 내릴 예정이다.
남북장관급 회담 관련 뉴스가 쏟아진 6월 10일. 한국 동북단에 위치한 강원 고성에는 활기가 넘쳤다. 5년간 중단됐던 금강산관광이 재개될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먹구름 속에서 잠시 얼굴을 내미는 반짝 햇살이라도 좋았다. 또 속거나 당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은 지역경제가 되살아나리라는 기대감에 묻혔다. 전쟁 포성이 멈춘 지 60년. 이제 이 땅에도 평화가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취재진을 맞은 육군 22사단(율곡부대) 공보장교 이성재 중위의 해맑은 얼굴이 평화로워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고성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의 분단군(郡)이다. 원래 이북 땅이었는데 6·25전쟁 중 치열한 전투 끝에 절반이 남한 영토로 바뀌었다. 지도에서 휴전선의 동쪽 끝이 삐죽이 올라간 이유다. 군청 소재지가 간성읍에 있는 것도 고성읍이 이북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주둔한 22사단은 육군에서 유일하게 지상 철책선과 해안 철책선을 함께 지키는 부대다. 금강산관광 통행로를 관할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고성군 동북쪽 끝자락인 현내면 명파리를 지나면 제진검문소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민통선 구역이다. 관광객이나 농사짓는 주민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된다. 관광객은 통일전망대 접수처에 들러 출입허가서를 받아와야 한다. 민통선 안쪽에서 농사를 짓는 주민은 상시 출입증으로 통과한다. 찜통더위에도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관광객 차량이 줄을 잇는다. 선글라스를 낀 위병이 탑승자 신원을 확인하고 트렁크를 검색한다.
강원 고성에서 경기 강화까지 이어지는 휴전선 155마일.
민통선 입구인 제진검문소.
남북출입사무소에는 관세청, 법무부, 국방부, 통일부 직원이 상주한다. 군운영단장 이모 중령 안내로 주요 시설을 둘러봤다. 북측과 관광 일정을 조율하는 한편 관광버스의 이동경로를 지켜보면서 유사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군운영단 임무다. 이 중령은 “(남북장관급 회담 소식에) 벌써 바빠지고 있다”면서 “그간 계속 준비를 해왔기에 당장 시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통일전망대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입구에 351고지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1951년 7월 15일부터 휴전 직전인 53년 7월 18일까지 적군과 수십 차례 공방전을 치른 끝에 고지를 확보한 장병들의 전공과 희생을 기리는 비다.
전망대에 오르자 오른쪽으로 청록색 바다와 백사장이 펼쳐지고 멀리 해금강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철책선(남방한계선)이 뻗어 있고 그 너머로 북한 월비산이 보인다. 월비산은 전쟁 때 아군이 차지했다가 다시 뺏긴 산이다. 절경(絶景)과 철책의 기묘한 조화가 전쟁과 평화의 공존을 상징하는 듯싶다. 몇몇 관광객이 북으로 향한 도로를 가리키면서 어디까지 우리 땅인지 논쟁을 벌였다.
오후 5시. 717관측소(일명 금강산전망대)에 올랐다. 정면으로 금강산 끝자락인 구선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바다 암석의 향연인 해금강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앞쪽으로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깃든 감호(鑑湖)가 누워 있다.
717관측소에서 바라본 해금강. 그 앞이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깃든 감호(鑑湖).
일찍이 절경을 본 사람은 많아도 비경(秘境)을 본 사람은 적다고 했다. 비경보다 한 단계 위가 선경(仙境)이다. 이곳의 풍광은 선경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신비롭다. 숨이 턱 막히는 빼어난 풍광에 절로 숙연해진다. 인생무상. 수천수만 년 세월을 버텨온 저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한순간의 티끌일 뿐. 그 티끌 간 이념을 내건 싸움이란 또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인가.
왼쪽으로 통일전망대 전투 전적비에 적힌 351고지가 솟아 있다. 월비산에 있는 이 고지를 앵커(anchor·닻)고지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남북한군이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일 때 고성 앞바다에서 미군 함정이 포사격으로 한국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양측 전사자가 1만 명이 넘었다니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가늠할 수 있다. 고지 뒤편으로 남강이 흐른다. 그 뒤로 금강산이 자리 잡고 있다. 아쉽게도 오늘은 날씨가 맑지 않아 어렴풋이 형체만 보일 뿐이다.
산 중턱의 대대본부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족구를 하고 있다. 밝고 씩씩한 모습이 보기 좋다. 건물 내부 벽에 나붙은 플래카드에 ‘북괴군의 숨통에 멸공의 총칼을!’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지난해 10월 북한군 병사가 아군 철책선을 넘어와 GOP(General Outpost·일반 전방초소) 문을 두드렸던, 이른바 ‘노크 귀순 사건’이 바로 이 부대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 여파로 사단장, 연대장 등 주요 지휘관이 다 날아갔다. 사고 이후 경계근무 수칙과 병력 운용 방식이 바뀌었다. 감시장비 과학화 속도도 빨라졌다.
1 망중한(忙中閑), 두 병사의 다정한 대화. 2 저녁식사를 하며 담소하는 병사들. 3 야간 경계근무 중인 청룡대대 초병.
“힘든 건 없다. 군인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병사들은 동해선을 관리하는 조국통일 선봉부대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내륙 1초소와 해안 1초소를 지키는 ‘넘버 원 부대’라는 자부심도 있다. 사기도 높고 사고도 없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22사단처럼 철책을 지키는 전방 부대에서는 적의 화력 도발에 대비한 훈련을 강화해왔다. 강판 방호벽 등 병사의 생존성을 보장하는 시설도 신축했다. 특히 ‘노크 귀순 사건’ 이후엔 철책 시설을 보강하고 성능이 뛰어난 감시장비를 도입했다. 한 중령은 “적이 철책을 뚫고 넘어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2인 1조로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 초소 안은 기자.
인근 소초로 이동하려고 차에 오르는데, 부대 울타리 너머 낮은 언덕에 멧돼지 떼가 보였다. 부대에서 버린 잔반을 처리 중이었다. 흥미롭게도 까마귀들이 마치 악어새처럼 멧돼지들 등에 올라타 놀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린 오후 7시. 야간 경계근무에 나서는 병사들이 무장점검을 받고 철책으로 향했다. 야상을 빌려 입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철책 근무는 순찰조와 초소 근무조로 나뉜다. 초소 근무는 2인 1조다. GOP에 배치된 지 3개월 됐다는, 작은 체구의 이모 일병. 대학 1학년 마치고 입대한 그는 “처음엔 힘들었는데 지금은 할 만하다”고 말했다. 가장 힘든 점을 묻자 “계속 서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 성탄절 트리 같은 경계등
민통선 안쪽은 곳곳이 지뢰밭이다(위). GOP 병사들의 임시 화장실.
GP엔 수개월치 탄약과 비상식량이 비축돼 있다. 병사들은 한 번 이곳에 들어가면 수개월이 지나야 나올 수 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그곳에서 그들은 아마도 적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서로 총 한 방이면 목숨을 교환할 수 있는 거리. 병사들에게 철책 안쪽과 바깥쪽의 간격은 생과 사만큼이나 아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초병들은 우리 일행이 다가갈 때마다 “정지”를 외친 후 암구호를 요구했다.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믿음직스럽다. 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긴장된다. 까딱하다간 총 맞을 분위기다. 대학 1학년에 재학하다 입대한 박모 상병은 “(GOP 근무가) 적성에 맞는다”며 웃었다. “북한군과 한 번 붙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묻자 “그런 적도 있지만 나라와 국민 안전을 생각하면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초소 근무는 주간, 전반야(前半夜), 후반야(後半夜) 3교대로 이뤄진다. 지금 근무하는 병사들은 자정이 넘어 소초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 날인 6월 11일 오전 화진포해수욕장에 있는 화진포의 성(일명 김일성 별장)을 둘러본 뒤 민통선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명파리를 찾았다.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쩍쩍 새소리만 요란하다. 도로변 식당의 여사장은 “길이 새로 나서 걱정”이라고 했다. 금강산육로관광을 위한 새 진입로가 완공되면 구(舊)도로에 있는 자신의 식당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였다. 새 길은 현재 일부 구간만 개통한 상태다. 남한의 동북단 마을인 명파리는 통일전망대와 금강산육로관광의 길목으로 유명한 곳이다. 남북간 사이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생기면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나무계단 1326개로 이뤄진 ‘천국의 계단’.
민통선 안쪽 영농지역을 둘러본 후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철책으로 향했다. GOP 경계를 전담하는 쌍호부대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군용차량이 얼마나 덜컹거리는지 내장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공보장교 머리가 출렁출렁했다. 게다가 안개가 자욱해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다음 날로 예정된 남북장관급 회담이 무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시간여를 달려 ○○소초에 도착했다. 휴대전화에 통화불가 표시가 나타났다.
오후 3시 반. 안개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의를 걸치고 철책 탐방에 나섰다. 작전분대장(하사)이 앞장섰다. 목표지점은 건봉산 정상의 대대본부. 그곳에 오르려면 계단 1326개를 거쳐야 한다. 이른바 ‘천국의 계단’이다. 계단 입구에 도착하기 전 경치가 빼어나고 야생동물이 많다는 고진동 계곡을 지났다. 전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이 계곡에는 산양, 고라니가 뛰어다니고 연어 떼가 춤춘다. 일행은 경치도 볼 겸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천국의 계단은 철책을 따라 만든 나무계단인데, 지형이 가파른 데다 간격이 넓어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산허리쯤에서 뒤를 돌아보니 고진동 계곡에서 반대쪽 철책으로 오르는 길이 기다란 뱀이 언덕배기로 기어오르는 모양이다. 거의 직각으로 보일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 반대쪽에서 보면 우리 쪽이 그렇게 보일 것이다.
# 동물 피 보면 사고 난다
GP 관문인 ○○통문.
“정말 끝까지 올라갈 거냐”는 공보장교의 숨찬 목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계속 걷기를 1시간 20분. 950m 지점인 ○○통문에 이르렀다. 장병 걸음으로는 1시간이라는데 사진촬영을 하느라 몇 차례 멈춘 탓에 시간이 더 걸린 것이다. 통문은 GP 관문이다. 이 지역 GP로 들어가는 아군 장병은 다 이 통문을 거쳐야 한다. 만약 통문을 이용하지 않고 DMZ로 들어가면 월북(越北)으로 간주해 쏴버리는 것이 이곳 규칙이다. 이곳엔 멧돼지가 많이 출몰한다고 한다. 중사 계급장을 단 통문장에게 “멧돼지 안 잡느냐”고 묻자 “‘동물 피를 보면 사고 난다’는 속설이 있어 잡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15분 더 걷자 ○○소초가 나타났다. 해발 970m로 건봉산 꼭대기 지점이다. 이 일대에서 이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GOP 부대는 없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선지 부대 안이 시끌벅적했다.
# 인화와 인권을 중시하는 병영문화
초소로 떠나기 전 총기를 점검하는 병사들.
건봉산에선 1951년 4월 20일부터 53년 7월 27일 휴전 당일까지 2년여 동안 16차례 공방전이 펼쳐졌다. 아군 측에선 국군 5·8·9사단과 미 10군단, 적 진영에서는 북한군과 중공군 5개 사단이 동원됐으며, 미 7함대 전함 20척이 동해에서 함포지원을 했다. 전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북한군 2개 사단과 중공군 1개 사단이 섬멸됐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현재의 거진읍이 남한 땅으로 귀속됐다.
상황실에 들어서자 ‘해오름병영문화혁신 752일차’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철통같은 경계근무 못지않게 인화와 인권을 중시하는 전방부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병영문화혁신의 핵심이 뭐냐고 묻자 안내 장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시로 계급별 간담회를 열고 그 결과를 토대로 매월 1회 대대 단위의 평가모임을 갖는다. 분기에 한 번씩 시내에 있는 군부대 회관에서 토론회와 장기자랑대회도 연다. 이 자리엔 병사들의 부모도 초청한다. 토론회 주제는 병영 악습 폐지다.
전반야 근무자들이 부대 앞마당에 집합했다. 개인화기의 주종은 K1, K2 소총이다. 거기에 한 조에 하나씩 K201 유탄발사기가 지급된다. 병사들은 소대장의 선창에 맞춰 “오발을 예방하자”를 세 차례 복창했다. 그들은 ‘약실 확인’ ‘노리쇠 전진’ ‘격발 이상무’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총기 상태를 점검했다. 일부 병사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다. 매일 되풀이하는 동작이지만 허투루 할 수 없다. 총기는 유사시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 노무현과 남재준
건봉산 대대 지휘소에 있는 ‘노무현 벙커’.
빗줄기가 거세졌다. 군용차량을 타고 하산했다. 천국의 계단 반대편 길이다. 한반도 상황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로 같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