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바를 찾은 한 손님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쪽지에 적고 있다.
10월 말, 취재를 위해 경기 고양시 대화동 먹자골목에 위치한 라이브 클럽을 찾았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1970년대 유행하던 팝송이 귀청을 울리며 일행을 맞았다. 100㎡(30평) 남짓한 공간의 한쪽은 드럼과 기타, 마이크, 반주기가 설치된 무대가 차지했고, 그 위로 과거 나이트클럽에서나 볼 수 있던 울긋불긋한 ‘사이키조명’이 어지럽게 돌았다.
실내에 놓인 테이블 6개 가운데 손님은 단 2명. 주문을 받으러 온 50대 사장에게 “가게가 너무 한산하다”고 말하자 “주말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다. 오늘은 평일인 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조용하지만 30분쯤 지나면 테이블이 찰 거다. 이곳은 밤 10시부터가 피크타임”이라고 말했다. 맥주와 함께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안주를 찾자 주인은 선뜻 “메뉴에는 없지만 삶은 국수를 곁들인 골뱅이무침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 귀청을 울리는 1970년대 팝송
30~40분 지나자 손님 두 무리가 차례로 들어와 각각 무대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40~50대 직장동료로 보이는 남자 손님 5명은 근처에서 1차를 끝내고 온 듯 술기운을 풍기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잠시 뒤 일행 중 한 명이 무대 반주자에게 다가가 신청곡 쪽지와 함께 1만 원을 건네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신청한 곡은 박중훈과 안성기가 주연한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박중훈이 부른 ‘비와 당신’이었다. 전주곡이 홀 안을 가득 메우자 함께 온 일행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무대에 오른 40대 남자는 익숙한 듯 한껏 폼을 잡으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중년남자들은 의자에 앉은 채 엉덩이를 들썩이고 팔을 흔들며 춤을 췄다.
또 다른 테이블을 차지한 50대 초반 남자 2명은 고교동창이자 동네친구라고 했다. 그중 한 명인 조성태(53) 씨는 일산에서만 20년 넘게 산 토박이로 자칭 ‘7080라이브 바 단골’이었다. 그에 따르면, 5년 전부터 일산에 7080라이브 바가 하나둘 생기더니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그 수가 늘어 현재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라이브 바에선 손님이 무대에 나가 직접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조씨 친구 김영준 씨는 “7080라이브 바보다 조용하게 팝송을 즐길 수 있는 LP카페가 더 좋다”고 했다. 그는 “우리처럼 중년쯤 되면 애들은 애들대로 공부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친구들과 노느라 바쁘다. 일찍 퇴근해 집에 가봐야 대화할 사람도 없고 같이 놀아줄 상대도 없으니 마음 맞는 친구끼리 모여서 놀게 된다. 라이브 바나 LP카페는 중년남자들 놀이터”라고 말했다. 이들은 일행과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며 함께 무대에 올라 1980년대 대학가요제 히트곡 ‘꿈의 대화’,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등 노래 3곡을 연달아 열창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옛날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있을 때 통금 위반으로 경찰서에 자주 붙잡혀 갔습니다. 그때마다 가곡 ‘보리밭’을 불러 경찰서에서 제 별명이 보리밭이었죠.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리며 노래 신청합니다.”
“대학 다닐 때 음악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도나 서머(Donna Summer)의 ‘I feel love’를 들려주세요.”
작은 쪽지에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적어 DJ에게 건네면 벽면을 빼곡히 메운 수많은 LP 음반 속에서 손님이 신청한 곡을 찾아 틀어주는 추억의 음악다방이 복고바람과 함께 10여 년 전부터 다시 등장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명 ‘LP카페’라고 부르는 이곳은 라이브 바와 함께 7080세대의 또 다른 해방구가 되고 있다.
# 벽면을 가득 메운 음반과 포스터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루 앞두고 찾은 서울 중구 정동의 LP카페 ‘음악과 사람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벽면을 가득 메운 오래된 음반 재킷과 영화 포스터, 그 사이로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휘갈겨 놓은 낙서가 눈에 띄었다. ‘시와 그림, 음악과 인생. 우주가 운다, 술잔 속에 갇힌 술’ ‘2010년 2월 8일, 박○○ 이○○ 강○○ 그들이 모였다’….
“여행사를 다니며 음악이 좋아 취미삼아 LP카페를 운영한다”는 50대 후반의 박용훈 사장에 따르면, 며칠 전 주말 이곳에서 손님들을 감동시킨 깜짝 연주회가 열렸다고 한다.
“40~50대 남녀 대여섯 명이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손님으로 와 있던 유명한 색소포니스트가 그들에게 다가가 축하 연주를 해주겠다며 색소폰을 꺼내들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사람들이 연주가 한 곡 끝나자 박수 치며 앙코르를 신청해 내리 세 곡을 연주했다. 그 덕에 조용하던 카페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박 사장은 “뜻밖의 생일선물을 받은 여자 손님이 그 후 매일 카페를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가수 이용 씨가 손님으로 왔다가 ‘바람이려오’를 부르며 즉석 라이브 공연을 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밤 11시를 넘자 군데군데 비었던 테이블이 손님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40~50대뿐 아니라 20~30대 젊은 층도 눈에 띄었다. 40대 후반인 이광훈 씨는 “LP카페에 가면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새삼 ‘아, 저 친구가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졌지’ 하는 생각에 반갑다”고 말했다. 1950년대 올드팝부터 80년대 음반에 이르기까지 LP 음반 약 6000장을 보유한 이곳에서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음악은 비틀스와 비지스, 이글스 등 1960~80년대를 주름잡았던 그룹의 노래다. 주요 손님 층은 주변 직장인으로 “일이 바빠서 어쩌다 자주 못 오면 술이 고프듯 음악이 고프다” “음반에서 왜 레코드가 튀는 빗소리가 안 나느냐, 혹시 CD를 틀어주는 거 아니냐”라고 농담 삼아 항의하는 LP 음악 마니아가 대부분이다.
한편 3D(3차원) 관련 사업을 하는 이선표(49) 씨는 “8년 전 동대문운동장 부근을 걷다 우연히 ‘LP時代 음악의 숲’이라는 작은 간판을 발견하고 ‘LP’라는 단어가 무척 반가워 그곳에 들어가 5시간을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곳 단골손님이 되었다는 그는 “LP 음반으로 흘러간 팝송을 들으면 한 곡을 듣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지난 10년, 20년 세월이 농축되어 흘러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7080세대에게 인기가 좋은 LP카페 ‘음악과 사람들’.
7080세대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공간이 늘면서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라고 여겼던 청춘이 여전히 자기 안에 실재함을 깨닫고 행복감에 젖는 사람은 이씨만이 아니다. 또 다른 단골손님 방미숙(53) 씨는 “우리 학창시절에는 소풍갈 때 ‘야전(야외전축)’이라고, LP용 휴대 턴테이블을 들고 다녔다. 우리나라에 막 디스코 열풍이 불 때였는데, 야외전축을 틀어놓고 엄청나게 춤을 췄다. 여기서 올드팝을 들으면서 맥주 한 잔 마시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처음 보는 손님들이 한데 섞여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춤출 때도 있다. 추억을 공유하는 세대라서 어색하거나 쑥스러움도 없다”고 말했다.
‘LP時代 음악의 숲’ 김재원 사장은 “중학교 때부터 수집한 음반 9000여 장을 보관하려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어 지인들을 초대하다가 아예 카페를 열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단골손님이 우리 카페를 하도 부러워해서 3년 전 종로구 통인동에 지점을 내고 운영을 맡겼다”고 말했다.
일명 ‘대학가요제 세대’를 상징하는 7080세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중문화’ 세례를 흠뻑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 인기를 끌면서 최근 7080세대를 겨냥한 놀이공간이 세분화하는 추세다. 라이브 바와 LP카페가 합쳐진 ‘LP바’가 등장하는 것.
최근 서울 창동역 부근에 문을 연 ‘나 오늘 한가해요’는 LP 음반 2만5000여 장을 갖춘 바뿐 아니라 드럼과 건반, 베이스 기타 등 밴드 연주가 가능한 악기를 갖춘 별실을 따로 뒀다. 전직 기자 출신인 50대 초반 구은서 사장은 “분기별로 7080세대에게 익숙한 국내 가수를 초청해 밴드 연주를 겸한 음악회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북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다 보니 이 지역 7080세대가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TV를 통해서만 7080문화가 유행하는 현장을 접해 아쉽다는 지역 사람이 많아 가게를 열게 됐다”고 덧붙였다. 1년 전부터 40~50대를 주축으로 한 ‘LP동호회’ 모임을 이끌어온 구 사장은 7080세대에 익숙한 주간지 ‘선데이서울’을 모방한 무크지 ‘먼데이서울’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강북에서 7080세대 문화전달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라이브 바나 LP카페에 만족하지 못하는 중년 중에는 직접 턴테이블을 구비해 LP 음반을 듣는 마니아도 늘고 있다. 이들이 즐겨 들르는 곳이 서울 용산 아이파크백화점 오디오 전문매장이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주로 독일 등 유럽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오디오 기기로, 세트당 200만 원 하는 제품에서부터 3000만 원에 달하는 고가품까지 있다. 마케팅팀 김영민 부장에 따르면, 주 고객층은 아날로그에 향수를 느끼는 40~50대 LP 음반 마니아로 기업 대표나 연예인, 고소득 전문직이 많다고 한다. 그는 “주말이면 고객 100여 명이 이곳을 찾는데 매장이 고가 기기로 채운 청음실(음악감상실)로 꾸며져 있어 음악을 듣고 가는 중년 고객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한편 7080세대를 겨냥한 축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지방자치단체도 늘고 있다. 2년 전 울주문화예술회관이 처음 마련한 ‘추억의 음악다방 전(展)’은 원래 일회성 행사로 시작했다가 중년층의 반응이 뜨겁자 3월 3회째로 이어졌다. 오만석(48) 기획실장은 “지방이다 보니 중년층이 즐길 만한 문화나 놀이장소가 없는 게 늘 아쉬웠다. 그 점을 오랫동안 고민해오다 나와 동년배인 중년을 위한 문화행사를 열자는 취지에서 음악다방을 재현했는데, 뜻밖에도 행사 2주간 수천 명이 다녀갈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어 연중행사가 됐다”고 말했다. 행사 기간 중 다방을 찾았던 김주일 씨는 “옛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추억 속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무척 그립습니다”라는 관람후기를 남겼다.
LP카페나 라이브 바 외에 최근 7080세대의 놀이문화로 인기를 끄는 것이 ‘추억의 수학여행’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지난 주말 초등학교 동창들과 경주로 1박2일 추억의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30여 년이 지나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긴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같은 후기와 함께 교복을 입은 중년들의 사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경북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문화원이 2007년부터 시작한 ‘추억의 경주수학여행’ 프로그램은 해마다 2000명이 넘는 중년이 찾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어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참가가 어렵다. 신라문화원 양형 국장에 따르면, 수학여행객 90%가 초중고교 동창 혹은 부부동반 동창 모임이고, 그 밖에 직장동료나 동호회 사람들이 단체로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찾는다고 한다. 신라문화원에서 마련한 학창시절 교복을 입은 중년들이 1박2일로 수학여행을 즐기면서 가장 많이 하는 놀이는 말뚝박기, 닭싸움, 수건돌리기 같은 추억의 놀이다. 양 국장은 “교복을 입혀 놓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딱 10대 시절로 돌아가더라”며 웃었다.
7080세대의 놀이문화로 ‘추억의 수학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치열한 일터에서 퇴장을 앞둔 7080세대는 한때 자신도 뜨거운 청춘이었음을 LP카페나 라이브 바, 추억의 수학여행 등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7080세대가 과거 젊은 시절 문화에 열광하며 빠져드는 이유는 뭘까.
취재 도중 만난 40대 후반 박재호 씨는 “30대까지는 치열한 직장생활에 치여 앞만 보고 달리기 때문에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40, 50대가 되면 은퇴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게 젊은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문화에 빠져드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라이브 바에서 만난 김영준 씨는 “요즘 초조감과 위기감을 느끼는 중년남자가 많다. 직장을 그만둘 날은 코앞인데 살날은 과거보다 훨씬 길어졌고 노후준비는커녕 퇴직 후에도 자식들에게 들어갈 돈이 많다 보니 미래가 불안하고 캄캄한 것이다. 그렇다고 집이나 회사에서 속을 다 꺼내 보일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또래를 만나 청춘시절 문화를 공유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취재 중 만난 7080세대는 “젊은 시절 추억을 공유하며 즐기는 ‘우리만의 공간’이 점점 많아져 반갑고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