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기금 안내 책자.
최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국민기금으로 위안부 문제에 성의를 표했다”고 강조했다(홋카이도 신문 9월 28일자). 앞서 아사히신문은 8월 29일자에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법적으로 해결됐음에도 국민기금으로 보상하려고 노력했다. 평화헌법을 가진 일본의 전후 노력을 알아줬으면”이라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국민기금이란 무엇이며, 피해자에 대한 사죄 혹은 보상으로 볼 수 있는지 살펴보자. 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위안부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면서 ‘사과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사과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사죄를 표명하는 방식이 ‘보상’이 아니라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였다는 점이다. ‘이미 법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가 1995년 7월 19일 도의적 책임을 지는 ‘츠구나이(償い·위로) 사업’으로 설립한 것이 바로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인 국민기금이다.
그 내용은 위안부제도 피해자를 대상으로 △민간모금에 의한 츠구나이금(200만 엔) △총리의 사과편지 △국고로 의료복지 지원 사업(한국에서는 300만 엔 규모)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국민기금에 따르면 일본 국민에게서 실제로 모금한 총액은 약 5억6500만 엔(목표 10억 엔), 국고에서 지출하기로 한 의료복지 지원금은 7억5000만 엔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 필리핀, 대만 피해자 285명에게 위 3가지 조치를 모두 취하고, 네덜란드 피해자 79명에게는 총리의 사과편지와 의료복지 지원만 실시했다(2002년 종료). 인도네시아에서는 고령자사회복지추진사업을 시행했으며(2007년 3월 해산), 중국과 북한, 동남아시아 국가 피해자들은 제외됐다. 구체적인 국가별 내역은 공개하지 않았으나 9월 28일자 홋카이도 신문은 한국 정부가 인정한 위안부 피해자 234명 중 61명이 ‘츠구나이금’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한국 위안부 61명 ‘츠구나이금’ 수령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츠구나이금’이라는 일본말의 애매함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보도와 출판물에서 이를 ‘보상금(補償金)’ 혹은 ‘보상(補償)’이라고 번역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엄연한 오역이다. 최근 한국의 한 일간지는 “일본 정부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통해 군위안부 피해 여성에게 보상하려 했지만 당사자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대협)가 일본 정부의 관여와 사죄와 보상을 법으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되면 일본 정부가 국민기금을 통해 ‘보상’하려고 했음에도 피해자와 운동단체가 반대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국민기금에 의한 ‘츠구나이금’은 민간에서 모금한 것으로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라고는 하지만, 일본 정부에 의한 개인 보상(국가배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 일본어 ‘츠구나이금’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위로금’ 혹은 일본어 발음 그대로 ‘츠구나이금’이라고 해야 한다.
짚고 가야 할 점이 또 있다. 위에서 결정한 3가지 조치, 즉 위로금과 총리의 사과편지, 의료복지 지원을 세트로 실시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총리의 사과편지는 피해자 모두에게 오지 않고 위로금을 받은 피해자에게만 전달됐다. 위로금을 받지 않은 피해자는 사죄 대상에서도 제외된 것이다.
한국이나 대만에서는 국민기금의 모호한 성격 때문에 대다수 피해자가 위로금을 거부했다. 홋카이도 신문이 보도한 대로 한국인 피해자 234명 중 61명이 위로금을 받았다면, 4명 중 3명이 이를 거부한 셈이다. 1991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고발한 김학순 씨는 1997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국민기금에 단호히 반대했다. 또 다른 피해자 강일출 씨는 “일본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을 국민에게 미루고 있다. 국민에게서 돈을 모아 나눠준다는데 그건 이상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안 받고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일본 정부는 왜 이런 짓을 하는가”라고 말했다(2009년 11월 28일).
위로금 전달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1997년 국민기금 측이 피해자들의 거부에도 위로금 전달을 강행하면서 위로금 사취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점을 악용한 피해자 주변인이 정부로부터 받은 피해자인정증을 복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민기금 측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아 빼돌린 것이다. 위로금을 받은 적 없는 위안부 피해자 심달련 씨는 제삼자가 위로금을 챙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국민기금 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으나 계속 거부당했다. 그러다 국민기금이 해산된 2007년 3월 말에야 일본 변호사로부터 심씨의 위로금이 김모 씨 계좌로 입금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심씨는 계좌주인 김씨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국민기금이 피해자 본인 확인을 게을리한 결과인 만큼 비슷한 사례가 더 있을 개연성이 높다.
한국 정부는 법적 책임 요구
국민기금의 위로금은 피해자가 요구한 국가보상이 아니며, 총리의 사과편지가 위로금을 받은 피해자에게만 한정됐다는 점, 위로금을 둘러싸고 피해자 혹은 피해자와 지원 단체 사이에 균열을 초래했다는 점, 결정적으로 위로금을 받지 않은 피해자가 대다수며, 위로금을 받은 피해자조차 그 사실을 공표할 수 없어 궁극적인 ‘존엄의 회복’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라고 보기 어렵다. 위로금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슬픔과 혼란, 노여움과 불신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기금은 일본 정부가 법적 해결을 촉구하는 피해국의 요구나 유엔 등의 권고를 등한시하는 ‘알리바이’로 작용했다. 위로금 지급 실적 올리기에는 분주하면서 정치인이나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언동에는 침묵했다. 일본 내 여성·시민단체들이 입법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를 막은 것도 국민기금이다.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조사관 맥두걸은 보고서(1998)에서 “피해 여성에게 법적 배상을 한다는 일본 정부 책임이 국민기금으로는 달성되지 않았다”며 “국민기금의 위로금 지급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으킨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2007년 7월 미국 하원이 채택한 일본 정부에 대한 위안부 사죄 결의안도 국민기금에 대해 “공인 및 민간인의 노력과 정열은 인정하나 근본적인 해결이라고는 볼 수 없다”면서 “명쾌하고도 애매함이 없는 형태로 공적 사죄와 역사적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해 12월 유럽연합(EU)은 일본 정부 측에 역사적, 법적 책임을 다할 것을 요청하면서 피해자 및 그 유족에게 배상할 것, 개인이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1997년 1월 국민기금이 관계자를 서울에 파견해 기금사업을 강행하자 “너무나 유감스럽다”며 불쾌감을 표명했다. 이듬해 4월에는 위로금을 거부한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할 것을 결정하면서 국민기금에 사업 중지를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반영해 국민기금에 반대해왔고, 지금은 명확하게 일본의 법적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국제사회도 국민기금이 사죄로서 불충분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며, 일본 정부 측에 피해자 개개인에게 사죄와 법적 배상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가 바라는 사죄란 일본 정부의 국가배상을 동반하는 사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부자 교수는 재일 한국인 2세로 한신대 조교수를 거쳐 현재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어로 출판한 저서로는 ‘학교 밖의 조선 여성들-젠더사로 고쳐 쓴 식민지교육’(일조각, 2009)과 ‘역사와 책임-위안부 문제와 1990년대’(공저, 선인, 2008), ‘군대와 성폭력-한반도의 20세기’(공저, 선인, 2012)가 있다. 1990년대부터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참여했으며,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네트워크(VAWW-NET Japan) 일원으로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참가했다. 현재 VAWW 리서치액션센터 공동대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