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가 보낸 드론이 6월 17일(이하 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건물을 향해 낙하하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폴란드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국 영공에도 드론을 보내고 있다. 뉴시스
최근 러시아는 드론(무인기)과 전투기 등을 동원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의 영공을 침범하는 등 교묘한 하이브리드 전술을 통해 나토와의 대결에 나서고 있다. 시작은 9월 10일(이하 현지 시간) 폴란드였다. 폴란드군은 F-16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자국 영공을 침투한 러시아 드론 4대를 격추했다. 나토는 회원국인 폴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F-35 스텔스 전투기와 이탈리아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등을 동원해 드론 대응 작전에 참여했다. 격추된 드론 중 일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방공망 교란을 위해 투입하는 미끼용 드론인 게르베라(Gerbera)인 것으로 확인됐다.
군사시설·공항·발전소 정찰하는 러시아 드론
폴란드 정부는 즉각 나토에 조약 제4조 발동을 요청했다. 회원국 중 하나가 영토 보전·정치적 독립·안보 등이 위협받는다고 판단할 때, 모든 회원국들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북대서양이사회(NAC)에서 이를 논의하고 공동 대응 방안을 협의한다는 내용이다. 1949년 창설 이후 제4조가 발동된 것은 지금까지 모두 8차례뿐이다. 가장 최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2022년 2월 24일이었다. 나토는 폴란드 요청을 받아들여 제4조 조약을 발동했다. 이는 즉각적인 군사적 행동을 의미하진 않지만 나토가 향후 군사 조치를 포함한 공동 대응에 나서는 첫 단추라고 볼 수 있다. 나토는 이번 사태를 묵과하지 않겠다며 ‘이스턴 센트리(Eastern Sentry·동부전선 감시경계)’라는 새로운 작전에 돌입했다.
덴마크 경찰이 9월 22일 코펜하겐 공항을 순찰하고 있다. 러시아 드론이 덴마크 공항 상공에 출연해 공항 운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뉴시스
드론 출몰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덴마크 정부는 9월 29일부터 10월 3일까지 전국적으로 민간 드론의 비행을 아예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10일 1일 유럽연합 27개국 정상들의 비공식 정상회의가, 10월 2일에는 유럽 40개국 정상이 모이는 유럽정치공동체(EPC) 회의가 연이어 개최된다. 나토는 드론 출몰 사태에 대응해 발트해에 방공 호위함 최소 1척과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을 투입했다. 나토는 1월부터 ‘발틱 센트리(Baltic Sentry)’ 작전을 통해 발트해에서 감시·경계 활동을 펼쳐왔다. 나토의 이번 조치는 기존의 임무에 더해 드론 영공 침범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나토의 레드라인 시험
서방 군사전문가들은 드론 영공 침범이 우발적 사건이 아닌 러시아가 치밀하게 계산한 ‘의도적 도발’이라고 지적했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러시아가 나토와 유럽연합(EU)을 상대로 하이브리드 전술을 확대하려는 신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의도는 나토 방공망 취약점과 동맹 내부 결속력을 파악하기 위한 노림수라는 것이다. 벤 호지스 전 유럽 주둔 미국 육군 사령관은 “이번 사건은 나토 조기경보 시스템과 반응 시간을 떠보려는 예행연습”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의 마리온 메스머 수석 연구원은 “러시아가 나토의 레드라인이 어디인지 시험하려는 목적”이라고 분석했다.러시아는 한술 더 떠 전투기까지 동원해 나토 회원국들의 영공을 침범하고 있다. 러시아의 미그(MiG)-31 전투기 3대는 9월 19일 오전 나토 회원국인 에스토니아 영공을 침범해 12분간 머물다 이탈리아 공군 F-35 전투기가 긴급 발진한 뒤에야 물러났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은 자체 공군기가 없어 나토 회원국 공군기들이 발트 3국의 영공을 보호하고 있다.
나토는 조약 제5조까지 거론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제5조는 회원국들 중 한 국가가 공격받을 경우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다른 회원국들이 군사행동을 포함한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NAC는 “에스토니아 침범 사례는 갈수록 무책임해지는 러시아 행동의 연장선”이라며 “나토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모든 위협을 억지하기 위해 국제법에 따라 모든 필요한 군사적 및 비(非)군사적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러시아에 경고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도 “의도적이든 아니든 러시아의 반복적인 위험한 행태가 지속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나토 회원국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 항공기를 격추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나토 회원국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9월 23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자리에서 기자들이 “나토 회원국들이 러시아 항공기가 자국 영공에 진입하면 격추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취임 후 러시아에 강경한 입장을 보인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격추에는 갈리는 EU내 의견

경찰들이 9월 10일 폴란드 보힌에서 당국이 추격한 물체 잔해를 조사하고 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이날 오전 러시아 드론이 자국 영공을 침범했다면서 격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뉴시스
발트 3국을 비롯해 덴마크,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유럽연합 10개 회원국 국방장관들은 9월 26일 긴급회의를 갖고 ‘드론 장벽(drone wall)’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안드리우스 쿠빌리우스 유럽연합 우주·방위 집행위원은 “우리의 드론 탐지 역량이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매우 분명하다”며 “드론 격추를 위해 레이더, 음향 탐지 장비 등 다층적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이 회의에선 드론 장벽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드론 장벽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드론 장벽을 유럽 전역으로 확대해 국경과 중요 인프라에 구축하기로 했다. 서방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앞으로도 군사적 충돌 대신 드론, 영공 침범, 사이버 공격 등 하이브리드 전술을 통해 압박을 가하며 서방의 대응 의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나토와 러시아가 우발적으로 충돌할 가능성도 제기되며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