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하는 거 직접 봤으면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못할 거예요. 타고난 실력도 실력이지만, 노력하는 자세도 그만한 애 또 안 나온다고, 내가 늘 그래요. 정말 독하게,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엎드린 거죠. 아이가 자기 할 바 다했는데, 그다음 일은 누가 해요. 부모가 해야지.”
노민상(60·사진) 전 수영 국가대표팀 감독은 바싹 마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박태환(27) 선수가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수영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만 있다면 ‘부모’로서 못 할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 인터뷰 도중 그는 수차례 자신을 ‘부모’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울먹이고, 때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뇨 때문에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연신 담배도 피워 물었다. 그러잖아도 마른 몸이, 박태환의 리우올림픽 출전을 놓고 벌어지는 각종 논란에 더욱 바싹 말라가는 듯 보였다.
노 감독은 스포츠 지도자다. 그리고 박태환은 불법약물을 사용했다. 페어플레이를 가르쳐야 하는 지도자로서 그가 제자를 무턱대고 감싸는 듯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노 감독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태환이는 큰 잘못을 저질렀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국제적으로 주어진 징계도 받았다. 내가 바라는 건, 그 18개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반성해온 선수에게 한 번만 일어설 기회를 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 ‘호소’의 바탕에 박태환에 대한 개인적 사랑이 놓여 있음도 부인하지 않았다. 스스로 ‘부모’라고 할 만큼, 그에게 박태환은 특별한 존재이니 말이다.
두 사람은 꼭 20년 전인 1996년 처음 만났다. 당시 박태환은 천식을 앓는 초등학교 1학년생 꼬마였고, 노 감독은 수영계 주류에서 멀찍이 떨어진 무명 지도자였다. 고등학생 시절 수영선수로 활동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노 감독은 그 무렵 지도자로 자리 잡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해외 수영 지도서를 구해 더듬더듬 읽어가며 ‘나만의 길을 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 그의 앞에 박태환이 나타났다. ‘재능이 있을 뿐 아니라 똑똑하고 심성이 고와’ 눈에 띈 꼬마는 그의 지도 아래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박태환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400m 금메달리스트로 ‘국민적 영웅’이 됐다 2009 로마세계수영선수권대회 전 종목 예선 탈락으로 나락에 떨어지고, 2010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 3관왕(자유형 100, 200, 400m)으로 부활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기대에 다소 못 미치는 성적(자유형 200, 400m 은메달)을 내며 흘러온 세월이다. 노 감독은 이 긴 시간,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내내 박태환을 지도했던 건 아니다. 그사이 한국 아마추어 선수로서는 전례가 없을 만큼 막대한 규모의 후원을 받은 ‘아이’는 세계 유수 지도자를 코치로 선임했다. 가장 화려한 순간, 박태환 곁에는 ‘전담팀’이 있었다. 하지만 고통에 빠졌을 때 그는 어김없이 노 감독을 찾아왔다. 2014년 9월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실시한 약물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고, 국제수영연맹(FINA)의 18개월 선수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대중의 지탄을 받으면서 훈련 장소조차 구하지 못할 처지가 된 박태환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노 감독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여기 이 커피숍에서 만났어요. 태환이가 지금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났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면서 고개도 잘 못 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참담한지…. 이거저거 더 물어볼 것도 없었어요. ‘태환아, 선생님이랑 같이 다시 수영하자. 그러면 된다’ 그랬죠.”
“수영하는 아이들에게 박태환은 여전히 영웅이에요. ‘형’ ‘형’ 하면서 따르니까 태환이도 차차 밝아지더라고요. 지난해 12월쯤 그 아이가 웃는 걸 처음 봤는데, 참 예쁘데요.”
노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며 인터뷰 도중 어쩌면 처음으로 싱긋 웃었다. 그 제자가 훈련만 시작하면 세상없이 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는 얘기도 했다. “동아수영대회를 앞두고는 50m 풀을 딱 29초에 맞춰 47번 헤엄친 뒤 48번째에는 28초, 49번째에는 27초, 50번째에는 26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되겠구나’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 감독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동아수영대회 성적을 오히려 아쉬워했다. “박태환이 목표를 세우고 제대로 훈련만 한다면 기록을 더 단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싶다고 했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노력하는 게 의미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젊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태환이를 통해 그런 본보기를 하나 만들어주시길 사회에 호소하고 싶습니다.”
노민상(60·사진) 전 수영 국가대표팀 감독은 바싹 마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박태환(27) 선수가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수영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만 있다면 ‘부모’로서 못 할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 인터뷰 도중 그는 수차례 자신을 ‘부모’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울먹이고, 때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뇨 때문에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연신 담배도 피워 물었다. 그러잖아도 마른 몸이, 박태환의 리우올림픽 출전을 놓고 벌어지는 각종 논란에 더욱 바싹 말라가는 듯 보였다.
함께 헤엄쳐온 20년
그렇게 고민하고, 혼자 속을 끓이다 한 행동이 대중 앞에서 큰절을 올리는 거였다. 4월 말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해 열린 제88회 동아수영대회가 끝난 뒤다. 박태환은 이 대회에서 출전 종목(자유형 100, 200, 400, 1500m) 전체 우승을 기록함으로써 ‘그간의 노력’을 입증했다.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노 감독은 불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중은 깜짝 놀랐고 박태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 감독은 “기자회견이 끝난 뒤 태환이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내게 ‘죄송합니다’ 그러더라. 마음이 안 좋은 듯 보였지만, 도리가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라고 했다.노 감독은 스포츠 지도자다. 그리고 박태환은 불법약물을 사용했다. 페어플레이를 가르쳐야 하는 지도자로서 그가 제자를 무턱대고 감싸는 듯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노 감독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태환이는 큰 잘못을 저질렀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국제적으로 주어진 징계도 받았다. 내가 바라는 건, 그 18개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반성해온 선수에게 한 번만 일어설 기회를 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 ‘호소’의 바탕에 박태환에 대한 개인적 사랑이 놓여 있음도 부인하지 않았다. 스스로 ‘부모’라고 할 만큼, 그에게 박태환은 특별한 존재이니 말이다.
두 사람은 꼭 20년 전인 1996년 처음 만났다. 당시 박태환은 천식을 앓는 초등학교 1학년생 꼬마였고, 노 감독은 수영계 주류에서 멀찍이 떨어진 무명 지도자였다. 고등학생 시절 수영선수로 활동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노 감독은 그 무렵 지도자로 자리 잡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해외 수영 지도서를 구해 더듬더듬 읽어가며 ‘나만의 길을 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 그의 앞에 박태환이 나타났다. ‘재능이 있을 뿐 아니라 똑똑하고 심성이 고와’ 눈에 띈 꼬마는 그의 지도 아래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박태환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400m 금메달리스트로 ‘국민적 영웅’이 됐다 2009 로마세계수영선수권대회 전 종목 예선 탈락으로 나락에 떨어지고, 2010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 3관왕(자유형 100, 200, 400m)으로 부활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기대에 다소 못 미치는 성적(자유형 200, 400m 은메달)을 내며 흘러온 세월이다. 노 감독은 이 긴 시간,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내내 박태환을 지도했던 건 아니다. 그사이 한국 아마추어 선수로서는 전례가 없을 만큼 막대한 규모의 후원을 받은 ‘아이’는 세계 유수 지도자를 코치로 선임했다. 가장 화려한 순간, 박태환 곁에는 ‘전담팀’이 있었다. 하지만 고통에 빠졌을 때 그는 어김없이 노 감독을 찾아왔다. 2014년 9월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실시한 약물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고, 국제수영연맹(FINA)의 18개월 선수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대중의 지탄을 받으면서 훈련 장소조차 구하지 못할 처지가 된 박태환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노 감독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여기 이 커피숍에서 만났어요. 태환이가 지금 자기 옆에 아무도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났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면서 고개도 잘 못 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참담한지…. 이거저거 더 물어볼 것도 없었어요. ‘태환아, 선생님이랑 같이 다시 수영하자. 그러면 된다’ 그랬죠.”
다시 돌아온 제자
그게 전부였다. 스승과 제자는, 혹은 ‘부모’와 ‘아이’는 그렇게 다시 만났고, 지난해 6월부터 함께 물살을 갈랐다. 노 감독이 서울 올림픽수영장에서 운영 중인 ‘노민상 수영교실’에 박태환이 성인회원으로 등록하는 방식이었다. 노 감독은 ‘노민상 수영교실’ 연령대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초등학교 3학년생부터 태환이까지”라고 답했다. ‘제2의 박태환’을 꿈꾸며 노 감독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오늘의 ‘꼬맹이’ 20여 명과 같은 수영장에서, 전직 세계 수영챔피언은 매일 헤엄을 쳤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컨디션을 끌어올렸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갔다.“수영하는 아이들에게 박태환은 여전히 영웅이에요. ‘형’ ‘형’ 하면서 따르니까 태환이도 차차 밝아지더라고요. 지난해 12월쯤 그 아이가 웃는 걸 처음 봤는데, 참 예쁘데요.”
노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며 인터뷰 도중 어쩌면 처음으로 싱긋 웃었다. 그 제자가 훈련만 시작하면 세상없이 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는 얘기도 했다. “동아수영대회를 앞두고는 50m 풀을 딱 29초에 맞춰 47번 헤엄친 뒤 48번째에는 28초, 49번째에는 27초, 50번째에는 26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되겠구나’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 감독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동아수영대회 성적을 오히려 아쉬워했다. “박태환이 목표를 세우고 제대로 훈련만 한다면 기록을 더 단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싶다고 했다.
“사람이 살면서 잘못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노력하는 게 의미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젊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태환이를 통해 그런 본보기를 하나 만들어주시길 사회에 호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