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년 차 주부 박모(35) 씨는 난임 치료를 위해 산부인과병원을 찾았다. 남편과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임신이 안 됐기 때문이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며 배란일에 맞춰 남편과 잠자리를 가져봤지만 임신에 실패했다. 남편의 정자를 채취해 시도한 3차례 인공수정도 소용없었다. 고민하던 중 의사로부터 “나이가 더 들기 전 난자를 채취해 냉동 보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박씨는 최근 자신의 난자 12개를 채취하고 그중 10개를 병원에 냉동 보관 중이다. 향후 수정란을 자궁 내 이식하기 위해 건강을 관리하며 난자 상태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박씨처럼 난자를 냉동 보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차병원 서울역 난임센터 37난자은행에 따르면 차병원그룹에 난자를 보관한 여성은 2015년 한 해 동안 128명이었다. 2014년 56명에 비해 2배 이상, 2013년 30명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냉동 난자는 무엇이며 왜 최근 급증하는 걸까.
국내 신선 배아보다 임신율 높아
냉동 난자는 말 그대로 여성으로부터 채취한 난자를 얼린 것이다. 얼리지 않은 신선한 상태의 난자는 체외로 배출되면 금방 죽지만, 동결 상태의 난자는 생체 기능을 유지한 채 수년 동안 장기 보존할 수 있다. 따라서 추후 해동해 정자와 결합시킨 뒤 배아를 생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얼려 놨다 임신이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한’ 난자인 셈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난자를 꺼내 냉동을 의뢰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현재 미혼이지만 노산에 대비하거나, 기혼인데 당장 임신 및 출산 여력이 안 되는 경우, 질병 치료를 앞둔 경우 등이다. 2013~2015년 여성 환자가 차병원그룹에 냉동 난자를 보관한 이유를 살펴보면 미혼으로 향후 노산 대비(62%), 시험관 아기(15%), 병 치료로 추후 임신을 못할 경우 대비(14%), 난소 기능 저하 및 기타 이유(9%) 등이었다. 미혼이라고 답한 여성 중에는 만 35~40세가 36%, 40대 이상이 35%, 30~34세가 34%, 20대가 14%를 차지했다. 제일병원 미래맘 가임보존센터는 2010~2015년 냉동 난자를 보관한 사례 49건의 목적은 항암 치료 대비(61%), 난소양성종양 수술(10%), 만혼(晩婚)에 따른 노산 대비(29%)라고 밝혔다.
채취한 난자는 상태가 좋은 성숙 난자의 경우 바로 냉동하고, 미성숙 난자인 경우 5~7일 동안 배양한 후 상태에 따라 냉동 여부를 결정한다. 냉동 난자 관련 시설을 살펴보고자 서울 중구 제일병원을 찾았다. 냉동시설 보관실에 들어가니 난자와 배아의 냉동 상태를 유지하는 질소탱크 25개가 있었다. 35~40ℓ의 질소가 들어 있는 탱크 내부는 영하 195도 초저온으로, 질소가 공기 중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에 주 1회 충전이 필요하다.
탱크를 열자 환자들의 이름이 적힌 시험관이 여러 개 나왔다. 환자명으로 시험관을 구분하기 때문에 한 탱크 안에 난자와 배아가 같이 들어 있다. 여성에게서 채취한 난자는 전처리과정 후 0.5초 만에 동결한다. 박동욱 제일병원 생식의학연구실 팀장(단국대 의대 부교수)은 “흔히 쓰는 냉동기법은 ‘유리화 동결법’이라 부르는 초(超)급속냉동방식으로, 해동 역시 상온에서 순간적으로 진행해 난자의 손상을 최소화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모든 냉동 난자가 해동 후 온전한 것은 아니다. 냉동 난자의 10%는 해동 과정에서 얼음결정에 의해 손상을 입어 폐기 처리된다(상자기사 참조).
보관실 옆에는 배양실이 있는데 배양기 개당 환자 1~2명의 난자와 수정란을 키우고 있다. 기계 내부는 사람 체온과 비슷한 37도, 이산화탄소 농도 6%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동욱 팀장은 “성숙한 난자에는 ‘극체’라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선 극체가 없는 미성숙 난자가 성숙하는 중이다. 난자가 튼튼한 상태로 동결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냉동 난자는 실제 임신에 얼마나 유용할까. 동결과정 없이 난자와 정자를 결합한 신선 배아 대비 냉동 배아의 임신율 통계가 있다. ‘2014년 난임부부 지원사업 결과분석 및 평가’에 따르면, 신선 배아 이식 임신율은 2010~2014년 32.1~35.1%, 총 체외수정(시험관 아기) 임신율은 31.1~33.5%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냉동 배아 이식 임신율은 41.5~48.5%를 오갔다. 평균적으로 냉동 배아 이식의 임신 성공률이 높게 나타났다. 자료를 제공한 황나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사는 “난자나 정자, 또는 둘이 결합된 수정란을 얼렸다 녹이면 생물학적 기능이 저하될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냉동기술이 정교하게 발달해 생체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정, 이식 시기 조절 가능해 유용
난자는 한 번 얼려 놓으면 장기 보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미혼 여성이 결혼 전 젊고 건강한 난자를 보관하는 데 유용하다. 냉동 수정란은 생명윤리법에 따라 5년 동안 보관이 가능하지만 냉동 난자는 별도의 보관 기한이 없다.
국내에는 냉동 난자를 8년 이상 보관했다 해동해 임신, 출산한 사례가 있다. 2001년 22세였던 한 미혼 여성은 당시 만성 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여성은 의료진으로부터 “병 치료를 하면 난소 기능이 저하돼 조기 폐경을 맞아 임신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듣고 냉동 난자 보관을 결심했다. 여성은 과배란 유도 주사를 맞고 난자 7개를 채취해 냉동고에 보관했으며, 방사선 치료 후 폐경했다. 2006년 백혈병 완치 판정을 받은 뒤 2009년 결혼했으며 2010년에는 냉동 보관해온 난자 7개 가운데 5개를 좋은 상태로 해동했다. 2011년 임신에 성공해 2012년 초 아들을 낳았다.
난임을 치료하는 조정현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은 “냉동 난자는 일종의 ‘임신 보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원장은 “냉동 난자를 채취할 당시 여성 연령이 만 35세 미만이면 임신 성공률이 40%, 35~39세면 30%, 40~44세면 15%이다. 따라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건강한 난자를 채취해 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최근엔 여성의 만혼, 사회활동에 따른 스트레스 증가 등으로 임신율이 저하되고 있으므로 젊을 때 난자 냉동을 권한다. 난자의 기능에는 냉동 여부보다 연령이 큰 영향을 미치므로, 만 35세 이전에 채취해 냉동한 난자는 만 40세 이후 채취한 신선 난자보다 생체기능이 훨씬 나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냉동 난자는 개인 의향에 따라 해동 및 배아 이식 시기를 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배아 이식 시기까지 임신에 최적인 신체 상태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김진영 강남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교수는 “여성은 난자를 채취하기 전 과배란 유도 주사를 맞아 인위적으로 배란을 촉진하는데 이것이 자궁 내막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냉동하지 않은 신선 배아의 경우 자궁에 빨리 이식해야 하는데, 자궁 내막 상태가 나쁘면 수정란 착상이 안 돼 임신율이 낮아질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난자를 냉동 보관하면 자궁을 쉬게 하면서 임신에 대비한 건강관리를 할 수 있어 신선 난자를 사용하는 것보다 임신 성공률이 높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의료보험 지원 턱없이 적어 비용 부담
냉동 난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관련 비용은 여전히 비싸다. 과배란 유도 주사 및 약제에 100만~200만 원이 들고 난자를 1년 보관하는 데 30만~40만 원 보관료가 필요하다. 시험관 아기 시술에는 200만~300만 원이 든다. 국민건강보험 지원은 난임 진단을 받은 경우 냉동 배아 시술 회당 최대 60만 원을 3회까지 받을 수 있다. 전체 비용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5년 동안 냉동 난자를 보관한 주부 정모(36) 씨는 “냉동 난자를 이용한 배아 이식을 3회 시도했는데 몸도 지쳤지만 비용 부담이 너무 커 임신을 포기했다”고 말했다.해외는 어떨까. 일본은 43세 미만 여성에 한해 1회 최대 7만5000엔(약 79만 원)씩 2회까지 국고로 동결 배아 이식을 지원한다. 한 번 시술비용은 50만 엔(약 532만 원) 정도다. 하지만 일본 산부인과학회는 2015년 2월 “난자 냉동을 권장하지 않는다”며 그 이유는 “난소 출혈이나 감염 등의 우려가 있고 수정란이나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없으며 임신 및 출산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일본의 경우 2015년 40대 여성이 냉동 난자를 이용해 출산한 사례가 최초로 밝혀졌다. 그전까지 질병 치료를 앞둔 여성들이 냉동 난자를 사용한 적은 있었지만, 건강한 여성이 만혼에 대비해 난자를 얼렸다 임신과 출산에 성공한 경우는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냉동 난자는 국민건강보험 대상에서 제외된다. 다만 기업을 중심으로 난자의 냉동 보관을 촉진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페이스북과 애플은 2015년부터 여직원들의 난자 냉동 시술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여성 인재들이 일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데 대한 배려 차원의 정책이다. 미국에서 여성의 난자를 추출, 동결하는 데 드는 비용은 1회 최대 1만 달러(약 1209만 원). 페이스북과 애플은 난자 냉동을 원하는 직원에게 2회 시술 비용인 최대 2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박찬우 제일병원 미래맘 가임보존센터장(단국대 의대 교수)은 “난자 냉동기술은 난임 치료 효과를 입증하고 있으며 인체에 안전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아직 국내에서 감염이나 오염 등에 의한 사고가 발생한 적은 없다”며 “미혼인데 결혼 예정이 없는 30대 이상 여성, 질병 치료를 앞두거나 조기 폐경의 가족력이 있는 여성은 추후 임신을 위해 고려해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냉동 난자, 맹신해선 안 되는 이유얼음결정이 난자에 상처 입히기도…채취 못지않게 임신 시기 중요
냉동 난자는 난임을 해결할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의료 전문가들은 “냉동 난자가 임신 및 출산에 능사는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먼저 동결과 해동 과정에서 난자가 상하는 경우다. 박찬우 제일병원 미래맘 가임보존센터장은 “난자를 냉동할 때 형성되는 얼음결정(ice crystal)이 염색체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러면 수정 후 배아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거나 자연 유산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냉동 난자의 상태가 좋아도 자궁 내 환경이 나쁘면 임신이 어려울 수 있다. 조정현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은 “수정까지 성공해도 자궁 내막이 좋지 않으면 착상이 안 된다. 자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약제를 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론 엄마의 연령과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궁 내막은 초음파로 두께 진단이 가능하지만 그 외 요소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을 모른 채 수정란 착상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젊을 때 난자를 채취해도 만 45세 이후 임신을 시도하면 정상적인 임신 및 출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김진영 강남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교수는 “‘냉동 난자가 있으니 언제든 임신해도 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여성은 40, 50대에 접어들면 난소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건강하게 임신하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결혼과 임신을 무작정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무엇보다 냉동 난자는 채취 당시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 냉동은 생체기능을 유지하는 것일 뿐 개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진영 교수는 “난자는 상태를 좋게 할 방법이 별로 없다. 정자는 수백만 마리 가운데 활동성이 좋은 것을 고를 수 있지만 난자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며 정자를 잘못 주입했다가는 터져버린다. 냉동 난자를 맹신해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난자 추출 및 냉동 기술 어디까지 왔나가장 흔한 ‘성숙 난자 유리화’부터 ‘난소 조직 동결’까지
국내 최초로 난자 유리화 동결이 이뤄진 것은 1998년 차병원에서다. 이후 18년 동안 난자 냉동 기법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보해왔다. 가장 흔하게 쓰는 방법은 성숙 난자의 유리화 동결이다. 여성에게 과배란 유도 주사제를 투여하고 약 2주 후 난자 다수를 채취한 뒤 질소로 이뤄진 동결 보존액을 사용해 급속 냉동시켜 냉동고에 보관하는 방식이다. 추후 해동한 뒤에는 미세한 바늘로 정자를 주입해 수정란을 만든다.
수정이 어려운 미성숙 난자를 동결하는 방식도 있다. 이때는 과배란 유도 없이 미성숙 난자를 채취해 체외에서 배양, 성숙시킨 후 동결한다. 성숙 난자가 없거나, 항암 치료를 앞두고 난자를 빨리 채취해야 하는 경우 사용된다.
최근에는 난소 조직 자체를 떼어낸 뒤 난자를 채취해 동결하는 기법도 발달했다. 항암 치료가 임박해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시행하는 기술이다. 주로 소아암 환자에게 시행하며, 복강경 수술로 난소 조직을 얻고 미성숙 난자를 채취한 뒤 동결한다. 임신 성공률은 20% 미만으로 아직은 의료계에서 연구할 부분이 많은 실험적 기법이다.
의료 전문가들은 “난자 냉동 기술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1986년 국내 최초 시험관 아기가 탄생한 후 30년이 지났지만 냉동 난자 및 배아의 임신 성공률은 절반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진영 강남차병원 교수는 “미국에서는 노화한 난자의 세포질을 다른 사람의 젊은 세포질로 대체하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안전 및 윤리 문제로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이런 문제를 극복하면 더 건강한 난자를 얻는 것은 물론, 냉동 효과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