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면 경영권 승계를 두고 아들끼리 싸움을 벌이곤 한다. 국내 대기업은 “아들이 가업을 잇는다”는 공식에 따라 장자 승계 원칙을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재계 세대교체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여풍이 강하게 불고 있다. 여성 임원이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 오너 딸들의 경영 참여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2022년 145명에서 2023년 82명으로 신규 임원 규모를 축소한 SK는 여성 임원은 확대했다. 8명이 신규로 선임됐는데, 최태원 SK 회장의 장녀인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도 이름을 올렸다. 롯데도 5명의 여성 임원을 상무로 승진시켜 조직 전면에 배치하는 등 여성 임원 규모를 확대했다. 롯데 여성 임원 수는 2022년 47명에서 2023년 54명으로 7명 증가했다. 국내 30대 그룹 중 여성 임원 수가 가장 많은 삼성은 2023년에도 여성 임원을 적극적으로 발탁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여성 부사장 승진 2명, 여성 상무 승진 6명 규모의 인사를 단행했다.
SK·에코프로 장녀 승진
재계에서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재벌가 딸로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대표적이다. 강단 있는 리더십과 뛰어난 경영 감각으로 ‘리틀 이건희’로 불리는 그는 2023년 12월 초 ‘포브스’가 발표한 ‘2023년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 명단에서 82위를 기록했다.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 [SK그룹 제공]
삼성에 이부진이 있다면 SK에는 최윤정 본부장이 있다. 최태원 SK 회장의 맏딸인 그는 연말 인사에서 입사 6년 만에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하며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1989년생인 최 본부장은 중국 베이징국제고와 미국 시카고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물리화학연구소와 국내 제약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2015~2017년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베인앤컴퍼니’의 컨설턴트를 거쳐 2017년 6월 SK바이오팜 경영전략실 전략팀에 대리급인 선임 매니저로 입사했다. 2019년 휴직 후 스탠퍼드대 생명정보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2021년 7월 복직했고, 2023년 1월 글로벌투자본부 전략투자팀 팀장으로 승진했다. 재계에서 ‘바이오 전문가’로 통하는 그는 SK가 배터리, 반도체와 함께 미래 먹거리로 꼽는 바이오 사업에서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디지털 치료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 본부장의 승진과 함께 SK바이오팜은 사업개발팀과 그가 이끌던 전략투자팀을 사업개발본부 산하로 통합하는 조직 개편도 단행했다. 현재 SK바이오팜은 주력 제품인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를 이을 후속 제품 개발에 매진 중인데, 최 본부장이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최태원 회장과 이혼 소송 중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는데, 차녀 최민정 씨는 2019년 SK하이닉스에 대리로 입사한 후 미국법인으로 옮겨 근무하다가 2022년부터 휴직 중이다. 막내 최인근 씨는 SK E&S 북미법인 패스키에서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으며, 삼남매 모두 그룹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CJ 장녀 이경후도 이목
이동채 전 에코프로 회장의 장녀인 이연수 신임 상무도 재계가 주목하는 젊은 여성 리더다. 이 전 회장의 1남 1녀 중 둘째인 이 상무는 1991년생으로 2023년 12월 초 에코프로파트너스 이사에서 상무로 승진했다. 이 신임 상무가 몸담은 에코프로파트너스는 2020년 에코프로가 설립한 벤처 창업 투자 회사다. 그는 기업 투자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담당하는 투자심사역으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남인 이승환 상무는 2022년 상무로 승진해 회사 신사업을 발굴하고 경영전략을 세우는 미래전략본부를 이끌며 그룹 내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이번 승진으로 이연수 상무의 그룹 내 입지도 커질 전망이다. 이연수 상무의 에코프로 지분율은 2023년 11월 기준 0.11%며 이동채 전 회장은 18.83%, 이승환 상무는 0.14%를 보유하고 있다.
이재현 CJ 회장의 1남 1녀 중 장녀인 이경후 CJ ENM 브랜드전략담당 경영리더도 주목할 만한 오너 4세다. CJ는 2022년 1월부터 사장과 총괄부사장, 부사장, 부사장대우, 상무, 상무대우로 구분했던 6개 임원 직급을 경영리더로 단일화하고 있다. 이경후 경영리더는 장자승계 원칙을 고수하는 CJ 내에서 ‘포스트 이미경’(CJ 부회장)으로 불리며 콘텐츠 사업 전반을 담당하고 있다. 1985년생으로 미국 컬럼비아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조직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CJ주식회사 사업팀으로 입사했으며, 이후 CJ오쇼핑의 상품 기획과 방송 기획 관련 조직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6년 미국으로 건너가 CJ 미국지역본부 통합마케팅팀장으로 근무하며 식품, 물류, 엔터테인먼트 등 북미 사업 전반의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다. 한류 콘서트인 ‘케이콘’과 식품 사업에서 ‘비비고 만두’를 흥행시킨 그는 2017년 상무대우, 2018년 상무로 승진했다. 2018년 7월부터는 당시 CJ오쇼핑과 CJ E&M이 합병해 출범한 CJ ENM의 브랜드전략담당을 맡아 ‘사랑의 불시착’ 같은 드라마와 공연 등 여러 콘텐츠를 성공시켰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2020년 부사장대우로 승진했다. 2023년 실적 부진을 겪어온 CJ는 통상 12월에 진행하던 정기 임원 인사를 2024년으로 미룰 전망이다. 이번 인사에서 이경후 경영리더의 승진이나 역할 확대 여부도 관전 포인트다.
*유튜브와 포털에서 각각 ‘매거진동아’와 ‘투벤저스’를 검색해 팔로잉하시면 기사 외에도 동영상 등 다채로운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