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5

2007.03.06

임금도 꺾지 못한 독창적 글쓰기 고집

정조에게 괴이한 소품체로 찍히고도 문체 안 고쳐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7-03-05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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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도 꺾지 못한 독창적 글쓰기 고집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의 서재. 이옥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하던 기숙사로 동재까지 포함해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 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조는 1792년 10월19일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에게 유생 이옥(李鈺, 1760~1812)의 응제문(應製文)은 순전히 소설 문체를 사용한 것이라 지적하고,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제출해 과거의 문체를 완전히 씻은 뒤 과거에 응시토록 하라고 명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옥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국가의 공식 기록에는 문체반정과 관련하여 단 한 번 이름을 드러낼 뿐이다. 근자에 이런저런 연구가 있지만, 이옥에 관한 전기적(傳記的) 사실은 한 줌이 채 되지 않는다. 그가 전주 이씨로 한미한 양반가 출신이라는 것, 1790년 31세에 생원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됐다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관심은 이옥의 문학이고, 그가 읽었던 책이다. 이쪽을 더 파보자.

    이옥은 과연 정조의 명을 받자와 회개했던가. 애당초 출세할 싹수가 없던 우리의 이옥은 잃을 것도 없었다. 그의 기록 ‘추기남정시말(追記南征始末)’에 따르면, 그는 정조의 지적에도 전혀 문체를 고치지 않았다. 즉 정조의 지적이 있은 지 3년 뒤(1795년 8월) 정조가 성균관에 거둥(임금의 나들이)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유생들이 글을 지어 올렸는데, 이옥의 괴이한 문체가 또 정조의 눈에 포착됐다.

    유생에서 지방현 군사로 신분 강등 ‘수모’

    임금도 꺾지 못한 독창적 글쓰기 고집

    이옥이 지은 ‘예림잡패(藝林雜佩)’ 본문.

    정조는 정거(停擧)를 명했다가 이내 ‘경과(慶科)가 머지않았는데 정거하면 과거를 치를 수 없을 것’이라며, 정거를 충군(充軍)으로 바꾸어 일단 충군되는 지방에 갔다가 돌아와서 과거에 응시하라고 명한다. 충군은 군사로 신분을 강등하여 어떤 지방에 소속시키는 것이다. 이옥은 충청도 정산현(定山縣)으로 가서 신고하고 서울로 돌아와 과거에 응시했다. 한데 문체는 여전했다. 정조는 전형적인 소품체라 지적하고, 이번에는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의 군사로 편입시킨다.



    지엄한 왕명을 어찌 거부할 것인가? 이옥은 부리나케 삼가현으로 가서 문서에 이름을 올리고 사흘 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울로 돌아왔고, 이듬해 2월 별시의 초시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한다. 하지만 정조는 답안지의 형식에 잘못이 있다면서 하등으로 처리한다. 이것을 보면, 정조가 이옥을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임금도 꺾지 못한 독창적 글쓰기 고집

    성균관 명륜당. 조선시대 유생들이 유학을 배우던 강의실이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1797년이 되자, 삼가현에서는 이옥에게 현(縣)으로 복귀하라고 독촉했다. 그는 여전히 군인으로 삼가현에 편입돼 있었던 것이다. 충군의 처벌에서 풀려나려면 과거에 입격(入格)한 뒤 청원서를 올려야 했지만, 관례를 모르는 그는 청원서를 올리지 않아 삼가현에 적(籍)이 있었다.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우리는 문서만 보고 처리할 뿐”이라는 관료의 냉정한 대답만 들었다. 별수 없이 삼가로 돌아가 머물다 1798년 2월 경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도중 공주에 이르러 비로소 처벌이 공식적으로 철회된 것을 알게 됐다.

    정조는 왜 이옥의 문장을 소품체라 규정하고 고치라고 닦달했던가. 정조는 소품을 두고, 자질구레한 것을 제재로 선택하여 세세하게 늘어놓거나, 도덕적으로 제어되지 않은 정서를 과도하게 표현하는 글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규정과 이옥의 작품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옥의 ‘화설(花說)’이란 산문의 일부를 보자.

    시험삼아 높은 언덕에 올라 저 서울 장안의 봄빛을 바라보노라면 무성하고, 아름답고, 훌륭하며, 곱기도 하다. 흰 것이 있고, 붉은 것이 있고, 자주색이 있고, 희고도 붉은 것이 있고, 노란 것이 있으며, 푸른 것도 있다.

    나는 알겠노라. 푸른 것은 그것이 버드나무인 줄 알겠고, 노란 것은 그것이 산수유꽃·구라화인 줄 알겠고, 흰 것은 그것이 매화꽃·배꽃·오얏꽃·능금꽃·벚꽃·귀룽화·복사꽃 중 벽도화(碧桃花)인 줄 알겠다. 붉은 것은 그것이 진달래꽃·철쭉꽃·홍백합꽃·홍도화(紅桃花)인 줄 알겠고, 희고도 붉거나 붉고도 흰 것은 그것이 살구꽃·앵두꽃·복사꽃·사과꽃인 줄 알겠으며, 자줏빛은 그것이 오직 정향화(丁香花)인 줄 알겠다.

    좀 수다스럽지 않은가. 색깔을 부여하면서 꽃 하나하나를 불러낸다. 이 수다스러움에 대해 정조는 이런 부분을 쇄쇄()하다, 곧 자질구레하다면서 이것을 소품문의 부정적 속성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옥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서울 장안의 꽃은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으며, 이 밖의 벗어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볼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때에 따라 같지 않고 장소에 따라 같지 않다. 아침 꽃은 어리석어 보이고, 한낮의 꽃은 고뇌하는 듯하고, 저녁 꽃은 화창하게 보인다. 비에 젖은 꽃은 파리해 보이고, 바람을 맞이한 꽃은 고개를 숙인 듯하고, 안개에 젖은 꽃은 꿈꾸는 듯하고, 이내 낀 꽃은 원망하는 듯하고, 이슬을 머금은 꽃은 뻐기는 듯하다. 달빛을 받은 꽃은 요염하고, 돌 위의 꽃은 고고하고, 물가의 꽃은 한가롭고, 길가의 꽃은 어여쁘고, 담 밖으로 뻗어 나온 꽃은 손쉽게 접근할 수 없고, 수풀 속의 꽃은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런 가지각색 그것이 꽃의 큰 구경거리이다.

    꽃들은 단지 색으로만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다. 각각의 꽃은 또 시간과 공간에 따라, 눈과 비 등 날씨에 따라 보는 주체에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란 말로 요약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화방창이란 말은 꽃의 개별성을 뭉개버리는 폭력이다. 개별적인 것들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의 사용 방식이 이옥 산문의 특징이다. 생각해보라, 세상은 얼마나 다양한가. 또 인간은 얼마나 다양한 개체들인가. 이옥은 자신의 언어 속에서, 일상에서 쉽사리 망각되는 세계의 다양성을 복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옥은 여성 화자의 생각과 감정을 노래한 시집 ‘이언(俚諺)’을 남기고 있다. 66수의 시는 아조(雅調), 염조(艶調), 탕조(宕調), 비조(調)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조’는 도덕적 일상적인 감정을, 염조는 사랑의 감정을, 탕조는 일탈의 감정을, 비조는 원망의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여성 화자는 규방의 여성부터 창가(娼家)의 여성까지 다양하다. 몇 작품을 보자.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 둘러대지만

    창가(娼家)에서 온 줄 나는 알아요.

    어인 일로 한삼(汗衫) 위에

    연지가 꽃처럼 찍혀 있나요.(염조)

    당신, 내 머리에 대이지 말아요.

    옷에 동백기름 묻어나니까요.

    당신, 내 입술 가까이 오지 말아요

    붉은 연지 부드럽게 흐를 듯해요.(탕조)

    차라리 장사꾼의 아낙이 될지언정

    난봉꾼의 아낙은 되지를 마오.

    밤마다 어디를 쏘다니는지

    아침이면 돌아와 하느니 술타령인걸.(비조)

    정조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 충돌

    이것이 과연 사대부의 시(詩)인가. 남성이 여성 화자가 되어 여성의 감정을 노래하는 전통은 유구하다. 예컨대 궁사(宮詞)란 남성이 궁녀가 되어 소외된 궁녀의 심정을 노래하는 관습적 장르다. 하지만 그것은 가공의 영역이다. 이옥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옥은 자신이 살던 18세기 후반 조선의 여염집 여성부터 창가의 여성까지, 구체적 여성의 절절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언’이 쏟아내는 것은 도덕적으로 단련된 감정이 아니라, 현세 여성의 숨김없는 내면이다.

    이럴진대 자신의 문학에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이언’ 앞에 ‘이언인(俚諺引)’이란 서문이 붙어 있다. 매우 길지만 그중 일부만 살펴본다.

    대체로 논하여 보건대 만물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진실로 하나로 할 수 없거니와, 하나의 하늘이라 해도 하루도 서로 같은 하늘이 없고, 하나의 땅이라 해도 하루도 서로 같은 하늘이 없고, 하나의 땅이라 해도 한 곳도 서로 같은 땅이 없다. 마치 천만 사람이 각자 천만 가지의 성명을 가졌고, 삼백 일에는 또한 스스로 삼백 가지의 하늘이 있음과 같다. 오직 그와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역대로 하(夏) 은(殷) 주(周) 한(漢) 진(秦)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들이 한 시대도 다른 한 시대와 같지 않아 각각 한 시대의 시가 있었고, 열국(列國)으로 주(周) 소(召) 패() 용() 위(魏) 정(鄭) 제(齊) 위(魏) 당(唐) 진(秦) 진(陳) 들이 한 나라도 다른 한 나라와 같지 않아서 각각 한 나라의 시가 있었다.

    삼십 년이 지나면 세대가 변하고 백 리를 가면 풍속이 같지 않다. 어찌하여 대청(大淸) 건륭(乾隆) 연간에 태어나 조선 땅 한양성에 살면서 이에 감히 짧은 목을 길게 빼고, 가는 눈을 억지로 크게 뜨고서 망령되이 국풍(國風) 악부(樂府) 사곡(詞曲)을 짓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가?

    “만물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진실로 하나로 할 수 없다”는 데서 이옥은 드디어 자신의 사유 근거를 드러낸다. 여기에 근거해 그는 어떤 공간도 동일한 공간이 아니며, 모든 시대는 동일한 시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모든 개별적인 것은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갖는다. 성리학의 절대적 일리적(一理的) 세계관은 여기서 해체된다. 정확하게 그는 이 지점에서 정조와 충돌했고, 때문에 정조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옥은 어떻게 이런 사유를 가질 수 있었던가. 정조는 소설, 소품을 많이 읽고 고증학을 섭취하며 서학서를 탐독한 결과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했다. 정조의 말은 이옥이 남긴 글을 분석해보면 입증된다. 이옥은 공안파(公安派)와 경릉파(竟陵派), 전겸익(錢謙益)·풍몽룡(馮夢龍) 등 명말청초의 작가와 당시 조선에 크게 소개되지 않았던, 청대의 이어(李漁, 1611~?)와 나빙(羅聘, 1733~

    1799) 등의 작가까지 섭렵했다. 소설로 말하면 ‘수호전’이나 ‘서상기’‘금병매’‘목단정’처럼 알려진 작품은 물론 풍몽룡의 ‘정사(情史)’와 이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육포단’, 여웅(呂熊)의 ‘여선외사(女仙外史)’ 등 신간 애정소설까지 읽었음이 확인된다. 이런 새로운 책들이 그의 사유를 감염시켰음은 충분히 추리할 수 있는 일이다.

    이옥은 이런 책들을 어떻게 구했을까? 나는 성균관에 주목한다. 성균관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발랄한 사고가 자라는 곳이기도 했다. 정약용만 하더라도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불온서적인 천주교 서적을 성균관 앞의 하숙방에서 친구들과 읽고 연구하지 않았던가. 이옥은 김려(金)와 강이천(姜彛天)을 만나 책을 주고받고 작품을 비평했다. 나는 이런 그룹을 중심으로 이단적 서적이 읽히고 유통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옥 역시 그 유통의 한 주체였음은 물론이다.

    문체반정에 반성문을 제출한 사람들은 예정된 출셋길을 달려 영의정이 되고 국구(國舅)가 되었다. 하지만 반성문을 쓰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던 박지원과 이옥은 그런 혁혁한 벼슬은 없었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작품을 썼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비록 화려한 문집이 아닌 필사본으로 남았지만,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고 21세기에도 읽히고 있다. 당신이 작가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이 글에서 인용한 이옥의 글은,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이옥전집’1·2, 소명출판, 2001에서 가져온 것이다. 일부 번역을 고친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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