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7

2003.08.14

자연과 예술, 아름다움이 주는 포만감

  • 프로방스=김남용/ 여행작가 kimstravel@joins.com

    입력2003-08-07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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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예술, 아름다움이 주는 포만감

    니스의 푸른 바다. 해변에 모래 대신자갈들이 깔려 있다.

    ”니스는 참 지루한 곳이죠. 해변밖에 볼 게 없어요. 그것도 고작 20분이면 해변 끝에서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짧지요. 저는 낮잠만 자고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바다색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어요. 니스는 그 한 가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꼭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탈리아에서 만난 우리나라 대학생 두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같은 곳이라 해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가치와 느낌이 달라진다.

    프랑스에서의 자전거 여행은 니스에서 출발했다. 여유와 풍요, 예술과 낭만의 지방이라는 코트다쥐르(Cote d’Azur)의 바다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분한 마음을 바다에 묻고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 여행중 처음으로 도둑을 맞았다. 매표소에서 자전거용 기차표를 따로 팔면서도 정작 내가 자전거를 갖고 기차에 오르려고 하자, 역무원이 “자전거는 기차에 실을 수 없으니 내려놓고 가라”며 붙잡았다. 결국 바퀴를 분해해 부피를 줄인 후 싣기로 합의하고 객실에 들어왔는데, 그 사이에 패니어(자전거용 짐가방) 4개 중 1개가 없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값비싼 물건은 들어 있지 않았지만 분한 마음에 밤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잠을 설쳤다. 도대체 그 멍청한 도둑놈은 한국산 라면 수프와 고추장, 무좀약 따위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알고나 있을까?

    그런데 무슨 일인지 니스까지 직행티켓을 끊었는데 이탈리아 벤티미글리아와 프랑스 망통, 그리고 모나코에서 기차, 버스,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서야 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해한 자전거 바퀴 2개와 본체 1개, 짐가방 3개를 들고, 메고, 끌고 움직이려니 은근히 그 도둑놈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 어차피 한국으로 돌려보낼까 고민했던 짐들이니까.’

    마음이 조금씩 풀린다. 그때 니스의 바다가 보였다.

    뭐랄까? 쪽빛, 청옥빛, 산호빛, 에메랄드빛, 코발트빛….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수심이 깊은 곳은 이번 여행을 떠나오기 전 찾았던 소매물도의 바다를 떠오르게 했다. 해변 가까운 곳은 카리브해의 바다를 연상시켰다. 붐비기는 해도 북적거리지는 않는 정도의 사람들, 파라솔 밑에서 책을 읽거나 바다에서 노니는 피서객들, 좀처럼 볼 수 없는 잡상인….

    가까이 가서 보니 더 놀라웠다. 해변 출입과 파라솔 설치 등은 무료지만 숙박과 취사는 금지돼 있다. 그 흔한 캠핑장도 이 바닷가엔 없다. 볼 일도 각자의 숙소에서 해결하라는 뜻인지 간이화장실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화초용 분무기를 물이 가장 조금씩 나오게 해놓았을 때처럼 약해 그 물이 바다로 흘러들기 전에 모두 말라버렸다.

    캠핑장을 찾아 남쪽으로 15km쯤 가자 이 지역에서 바다와 가장 가깝다는 프랑스와 빌너브 루베 캠핑장이 나왔다.

    나는 도저히 ‘그 바다를 참을 수 없어’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그들처럼 팬티 바람으로 푸른 남프랑스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앙상하고 검게 그을은 동양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볼 테면 보라지, 물장구 치는 데 인종이 따로 있나?

    자연과 예술, 아름다움이 주는 포만감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아틀리에 세잔느’. 레레크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아를에 있는 원형경기장. 로마 시대에 건축된 건물이다 (위 부터 시계 반대방향).

    한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코트다쥐르의 풍요로운 바다는 망통에서 툴롱까지 120km 해안 중 40km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200km 이상 떨어진 프로방스 라시오타 지역까지, 그리고 추정하기로는 마르세유 가까운 곳까지 그 아름다운 바다가 계속된다. 아를에서 가까운 생 마리에 이르러서야 수심도 깊어지고 바다색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자갈과 모래로 이뤄진 해변이 번갈아 나타나니 취향에 맞게 선택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나는 “올여름 휴가는 프랑스 남부 해변에서 보내세요” 따위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을 떠나온 지 불과 네댓 주 만에 우리나라 경제상황이 크게 호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하지만 기왕에 이곳으로 오기로 한 사람이 있다면 이 말만은 하고 싶다.

    “꼭 니스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어쨌든 지금 당신은 프랑스에 있잖아요.”

    다시 내륙으로

    프랑스 남부 해안을 지나 내륙으로 조금씩 올라오는 자전거 여행길은 생각외로 쉽지 않았다. 해안 근처이니 평지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처음 이틀 동안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됐다. 시스포그에서 엑상프로방스로 올라오던 86km 구간은 처음과 중간, 그리고 후반부에 대관령과 비슷한 오르막길만 계속돼 체력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4일째 고도 표시가 돼 있지 않은 지도를 들고 한숨을 쉬며 출발한 아를까지의 84km 구간은 직선도로 22km를 포함해 거의 전 구간이 평지였다.

    아를은 그렇게 두려움과 감사와 기대의 도시였다. ‘남부의 행복’이 프랑스의 전부는 아니라는 듯, 내륙으로 올라올수록 풍요로운 마을은 뜸해졌다. 자전거 도로도 쉽게 끊겼다. 화물차와 자동차는 남부에서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달리는 내내 나는 그들의 빠른 속도와 굉음에 시달려야 했다.

    살다 보면 아무 인연도 없는데 이상하게 나를 이끄는 지명이나 인명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아를이 그랬다. 아를을 찾아가는 내내 괜히 아를을 찾았다가 실망하지나 않을까 해서 겁이 났다.

    사실 아를을 막 떠나온 지금도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뭐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고대 로마 시대에 세워진 원형경기장에서 여름마다 투우 경기가 열리고, 신고전주의 시대에 세워진 건물을 시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도시. 론 강변과 도시 안팎에 여전히 고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하지만 이탈리아의 로마나 시에나, 아레초처럼 과거의 유산이 살아 숨쉬지 않고, 독일의 로텐부르크처럼 잘 가꿔져 ‘팔리지 않고 있는’, 프랑스 남부처럼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 도시가 아를이다.

    나는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마음에 꼭 드는 도시 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아를이 그 도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도시는 무언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맑은 여름 햇살 속에서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다 돌아와 텐트 속에서 침낭을 펴면 밤하늘의 먹구름 같은 서늘한 기운이 몰려온다. 최고급 BMW 오토바이의 굉음과 진동 속으로 투우 경기장의 환호성이 멀어져 간다.

    자연과 예술, 아름다움이 주는 포만감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의 배경이 된 카페. 실제 배경은 폭격으로 무너졌고 이 카페는 그림대로 복원한 것이다. 필자가 가장 부러워한 자전거도로 전용 터널. 카마크의 명물 백마를 타고 갯벌관광에 나선 사람들(왼쪽부터 시계 방향).

    아를에 도착한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시내관광을 포기하고 남쪽의 카마크 지역을 찾아갔다. 카마크는 론 강 본류와 지류의 하구, 그리고 지중해 일부가 삼각형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지역이다. 아를에서 40km에 이르는 지점까지에는 늪지대, 농경지, 자연 담수 등 다양한 지형과 검은 물소, 홍학, 왜가리, 물총새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이 있다.

    니스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여행자 안토니아가 이곳을 권하면서 “이곳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는데, 와보니 그 말이 이해가 간다. 한참 동안이나 농경지와 늪지대가 반복해 나타난다. 종착 지점에서 만나는 검은 소 떼와 홍학도 망원렌즈가 없으면 사진 촬영이 어려울 정도로 멀리 있고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들은 것보다 개체수도 적다.

    하지만 이곳을 즐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지방 명물인 백마를 타고 일대를 돌아보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백마를 키우는 호텔과 레스토랑이 눈에 많이 띄어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카마크의 ‘관광상품’이었다.

    지방도로를 따라가는 자전거 여행으로는 이 지역을 제대로 볼 수 없겠다 싶어 난생 처음 말고삐를 잡았다. 두려움도 잠시, 걷기 어려운 지점까지 백마가 척척 데려다준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 정부의 자연보호 정책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이다. 나는 홍학과 철새 떼가 서식하는 ‘자연 담수호’에 조개껍데기가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는 거대한 호수에 어떻게 철새들의 먹이인 조개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강물과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마다 작은 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심지어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온 도로 밑으로도 수로가 만들어져 도로가 건설된 이후에도 물의 흐름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여행을 하면서 ‘독일은 사람을, 프랑스는 자연을 가졌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만큼 매사에 완벽하지 않은 것 같다는 개인적 느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수로를 보고 나니 프랑스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카마크의 메마른 진흙과 우리 갯벌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피조개를 잡아 4남매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킨 것이 자랑거리라는 새만금 지역 어머니들의 정서가 이 바다에는 없을 것 같다. 왜 우리는 이들과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괜히 심사가 틀어진다.

    아를에서의 나머지 하루는 고흐의 흔적을 따라가는 데 할애했다. 아를은 고흐가 1888년 2월부터 15개월 동안 머물며 300여점의 작품을 남긴 도시다. 고흐는 생전에 이 도시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으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도시가 고흐를 기리고 있다. 지금도 고흐가 작품 소재로 삼았던 도심 곳곳에는 그림과 안내판이 서 있다. 도심 내외곽에 10곳의 ‘고흐 지점’이 있는데,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1유로를 주고 구입한 가이드북의 지도를 보면서 이 지점들을 따라갔다.

    그런데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카페, ‘르 카페 라 뉘’(밤의 카페)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 복원한 것이란다. 실제 배경은 고흐의 생가 근처에 있었는데 1944년에 폭격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어쩐지, 그림 제목이 잘못된 것이라고 우기던 종업원이 상당히 불친절하다 했더니….

    꼭 아를이 아니더라도 니스에는 샤갈미술관이, 엑상프로방스에는 아틀리에 세잔이 있다. 샤갈미술관은 샤갈의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아틀리에 세잔은 세잔의 창작 배경이 된 장소를 소개하고 창작에 이용한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30분에는 세잔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투어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아를의 반 고흐재단은 후배 미술가들이 각자의 화풍으로 복원한 고흐 그림전을 주로 연다. 아를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는 반 고흐 투어를 연중 진행중이다.

    프랑스 남부 여행을 계획한다면 가이드북의 명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다음 도시로 떠날 것이 아니라, 자연과 예술을 묶는 자신만의 테마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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