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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

르누아르가 그린 바그너

단 35분의 스케치 시간 “꼭 청교도 목사” 만족스러운 반응

  • 전원경 문화정책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르누아르가 그린 바그너

르누아르가 그린 바그너

‘바그너의 초상’, 르누아르, 1882년, 캔버스에 유채, 53×46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1800년대 후반 유럽 예술가, 지성인들의 우상이었다. 비평가들은 공연시간이 장장 나흘에 달하는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의 주제와 형식,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오페라를 남녀 간 연애담 정도로만 치부하던 화가나 작가들도 바그너의 악극이 공연되는 날이면 부지런히 극장을 찾았다.

이처럼 당대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 바그너가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은 것은 단순히 바그너의 악극이 가지고 온 새로움과 예술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그너는 바이에른공국 루트비히 2세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바이로이트에 오직 자신의 악극만을 공연하는 전용 극장을 지었다. 말하자면 그는 ‘가난한 예술가’의 전례를 보란 듯 깨뜨린 인물이었다. 문화사가 자크 바전의 말에 따르면, 바그너가 19세기 문화계에 미친 영향은 19세기 과학계에 찰스 다윈이 미친 영향과 맞먹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상파 화가들 역시 이 같은 ‘바그너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81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1882년 1월, 일부러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팔레르모로 향했다. 그 도시에 머물며 오페라 ‘파르지팔’을 작곡하던 바그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칠순에 가까운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몹시 피로한 상태였다. 초상을 그리게 해달라는 여러 화가의 청탁도 이미 거절한 그였다. 그때까지 별반 유명하지 않던 르누아르가 과연 바그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르누아르는 바그너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시간도 허락받았다. 르누아르가 팔레르모를 찾기 직전 바그너는 4년을 끌었던 ‘파르지팔’ 작곡을 끝냈고, 그 덕에 손님을 맞을 약간의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1882년 1월 13일 마침내 바그너를 만난 르누아르의 회고에 따르면 검은색 실내복을 입은 바그너는 백발에 키가 작았고, 대단히 공손하고 친근했다. 그는 르누아르에게 “몸이 영 말을 듣지 않아 오랜 시간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내일 정오쯤 다시 오면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겠다”고 제의했다.



면담 다음 날인 1월 14일, 점심나절의 35분간 르누아르는 바그너를 스케치할 수 있었다. 단 35분간의 시간이었지만 르누아르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르누아르는 원체 손이 빠르고 스케치에 능란한 화가였기 때문이다. 완성된 스케치를 보고 바그너는 “꼭 청교도 목사처럼 보이는군”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런 반응을 보면 바그너는 르누아르의 스케치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르누아르가 그린 바그너는 단호하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르누아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짧은 만남이지만 대단히 만족스러웠고 그 걸출한 인물의 초상화를 망치지 않아 기뻤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구들의 예견대로 이 만남은 르누아르에게 ‘바그너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됐다. 초상화가 완성된 지 꼭 1년 후인 1883년 2월 13일,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뒀다.



주간동아 2014.06.23 943호 (p72~72)

전원경 문화정책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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