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4

2014.04.21

허둥지둥 초동대처 초대형 피해 불렀다

침몰 직전 선장과 승무원 상황 오판…정부는 우왕좌왕 수색·구조 때 놓쳐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14-04-21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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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둥지둥 초동대처 초대형 피해 불렀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분노만 치민다.”

    4월 16일 오전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참사 직후 있었던 실종자 수색 및 구조 상황과 사고 원인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과 누리꾼의 반응은 한결같다. 사고 발생 후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2시간 동안 세월호의 이모(60)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과 방재 당국의 그릇된 상황 판단 및 대처가 피해를 더 키웠다는 비난이 거세다. 사망자 유족과 실종자 가족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오열한다. 심지어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이 배의 이상 사실을 감지하고도 신고를 지연한 채 자신들만 먼저 탈출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첫 신고 시간부터 각종 의문

    세월호 침몰 참사와 관련한 각종 의문은 첫 신고 시간으로부터 출발한다. 구조된 승객과 승무원, 인근 섬 어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세월호가 이상 조짐을 보인 시간은 해양경찰청(해경)에 접수된 공식 신고 시간보다 적게는 20분, 많게는 1시간 이상 앞서 있다. 4월 15일 밤 9시쯤 예정 출항 시간을 2시간 30분 넘겨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한 세월호로부터 해경에 침몰 신고가 공식 접수된 시간은 16일 오전 8시 58분. 하지만 그 6분 전인 8시 52분 전남소방본부 119관제센터로 경기 안산 단원고 남학생(또는 아버지)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배가 침몰하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신고가 접수됐다.

    더욱이 세월호 기관실의 한 승무원은 “7시 40분쯤 승무일지를 작성하는데 배가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약간 기우는 것 같아 급하게 갑판으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사고 지점인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1.8해리(3.3km) 인근에서 이날 새벽부터 조업을 했던 인근 섬 어민들은 “오전 8시쯤부터 하얗고 큰 배(세월호)가 1시간째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신고 당시 이미 배가 기울어질 만큼 기울어 객실과 복도에 물이 차고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계속 방송

    세월호로부터 신고를 받고 해경 구조헬기가 현장에 도착해(9시 30분) 최초로 6명을 구조한 시간은 9시 45분. 결국 신고만 미리 했어도 더 많은 인명을 제시간에 구할 수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각종 증언을 종합할 때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은 일찌감치 배의 이상 징후를 발견했지만, 자체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신고를 미루다 배가 급격하게 기울고 침몰하기 시작하자 해경에 신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신고 전후인 8시 50분과 9시 10분 사이 3, 4층 객실(그림 참조) 일부에 물이 차오르고 배가 급격히 기울면서 온갖 집기가 쏟아져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객실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니 구명조끼를 입고 내부에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엔진에 물이 차 전원이 차단되는 시점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객실에 있다 구조된 생존자 대부분이 “물은 차오르고 배가 기울어 바닷물이 옆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내부에 있으라고 하니 나가야 하는지, 그냥 객실에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세월호 측 안내방송만 믿고 객실에 있던 단원고 학생과 일반 승객, 일부 선원은 배가 기울고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갇힌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는 집기나 여행가방 등에 부딪혀 의식을 잃은 사람도 있고, 배가 기울면서 구르거나 떨어져 거동이 불편해진 승객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배가 침몰하는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있는 5층 객실에 머물던 승객과 조타실에 있던 선장, 항해사는 모두 목숨을 구했다.

    정전으로 방송이 중단될 시점까지 선장 등 선원들은 3, 4층 객실과 복도, 식당 등에 물이 차오르는 상황을 몰랐거나 알고도 “배 위로 탈출하라”고 말하면 갑작스럽게 승객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배가 급격히 침몰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뒤늦게 배의 침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선장과 승무원들은 4층 객실과 복도를 기어 내려가 몇몇 승객에게 “객실과 복도 밖으로 벗어나 위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줬지만 때는 늦었고, 많은 승객이 객실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 사망자로 확인된 고(故) 박지영(22) 씨도 끝까지 안내방송을 하다 전원이 나가자 학생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던져주고 먼저 내보낸 뒤 자신은 마지막으로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방송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선장이 승무원들만 챙겼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4월 17일 진행된 해경 조사에서 세월호의 한 기관사는 “9시쯤 선장으로부터 배가 위험하니 올라오라는 말을 듣고 급히 올라갔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 325명 중 생존이 확인된 인원은 75명에 불과하지만 승무원은 33명 중 20명이 구조됐다(4월 18일 오전 1시 현재).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비상 발생 시 대응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점도 피해를 키웠다. 일단 여객선의 경우 꼭 침몰 상황이 아니더라도 배에 이상이 발견되면 안내방송으로 구명조끼를 착용할 것을 고지하고, 구명조끼 위치와 착용법부터 설명하는 게 먼저다. 여객선이 출발하기 전 전체 승객에게 승무원이 고지를 하지만 제대로 듣고 숙지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 당시 안내방송은 “구명조끼를 입으라”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 구명조끼 위치와 착용법에 대해선 전혀 설명이 없었다. 더욱이 배가 갑자기 기울어 여행가방과 온갖 집기가 뒤섞인 상황에서 객실과 복도에 위치한 구명조끼함을 스스로 찾는 것은 무리다. 더욱이 정전된 상황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승객 임모(59) 씨는 “한참 후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방송만 했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이는 대로 모아서 밖으로 다 던졌다”고 말했다. 세월호의 승선 정원은 921명으로, 각 객실과 복도에는 950명분의 구명조끼가 배치돼 있었지만 사망자 대부분은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거나 입고 있던 구명조끼 끈이 풀려 벗겨지면서 익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바닷물에 닿기만 하면 자동으로 펴져야 하는 25인승 구명벌(둥근 모양의 구명보트)은 총 46대(1150명 탑승 가능) 중 1대밖에 펴지지 않았다. 육각형 구명보트 위에 비나 파도를 막을 수 있도록 둥근 텐트가 쳐져 있는 구명벌 안에는 비상식량과 약품도 비치돼 있다. 자동으로 펴지지 않을 경우 끈만 당기면 펴지는데, 사고 당시 승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구명벌을 편 사람이 없었다.

    허둥지둥 초동대처 초대형 피해 불렀다
    사고 심각성 파악하지 못한 정부

    9시 30분 해경 구조헬기가 현장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세월호는 이미 좌현으로 60도 이상 기울어 좌현에 달려 있던 구명벌 23대가 바닷물에 닿은 상황이었는데도 자동으로 펴지지 않았다. 우현에 있던 23대 역시 10시 29분 선수를 제외하고 세월호가 모두 잠긴 상태에서도 1대밖에 펴지지 않았다. 각 해운사 소속 여객선은 구명벌의 성능과 안전점검을 매년 받게 돼 있다. 세월호도 1월 해양항만청 검사를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의 점검 자체가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정부와 해운사 측도 사고가 터지고 배가 모두 가라앉을 때까지 3시간여 동안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오전 10시 안전행정부에 설치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사고 신고 접수 14시간이 지난 밤 11시까지 정확한 승선 인원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477명에서 459명, 462명, 480명으로 공식발표가 뒤집히더니 해경이 인천여객터미널을 빠져나가는 출항객 숫자를 일일이 폐쇄회로(CC)TV로 대조한 결과 475명으로 공식 확인했다.

    세월호의 소속사 청해진해운 측은 “출항이 연기되면서 화물 기사들이 들락날락해 착오가 생겼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이는 여객선을 타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반드시 승선 인원의 인적사항을 자필로 써 제출하도록 한 운항 규정을 해운사 측이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정부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은 배가 완전히 침몰한 시점인 11시까지 ‘구조인원이 338명’이라고 밝힌 부분이다. 이는 언론에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라고 잘못 알려졌고, 경기도교육청과 단원고 측은 실제 학부모에게 전원 구조됐으니 안심하라는 문자메시지를 일제히 발송해 혼란을 가중했다. 점심시간까지 일반 시민조차 보도를 그대로 믿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석간신문 ‘문화일보’는 ‘큰 인명피해가 없다’고 보도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결국 4월 18일 오전 1시 현재까지 단원고 학생 325명 중 구조된 인원은 75명뿐인 것으로 밝혀졌고, 전체 승선 인원 475명 중 구조된 인원은 179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안이한 상황 인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대본은 “모든 인력과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도 해저 잠수 전문 시설을 실은 평택함과 청해진함을 뒤늦게 요청해 물의를 빚었다. 사고 지점은 해양 관련 종사자와 인근 어민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큼 조류 방향이 극심하게 바뀌고 유속이 빠른 곳으로, 군 잠수 특수요원도 특수 장비가 없으면 접근이 불가능하다. 사고 지점은 이순신 장군이 명랑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울돌목’으로부터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지점으로, 우리 바다에서 울돌목 다음으로 유속이 빠른 지점이다.

    항로 급작스레 바꾸다 배 기울어

    사고 지점 바다의 유속은 시속 3노트(8km) 이상으로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서해와 비교해 3배에 이르며, 수중 시야는 잠수부가 자기 손조차 보이지 않는, 20cm도 채 안 되는 거리다. 더욱이 수심도 37m에 이르러 평택함과 청해진함에 있는 감압장비(챔버)와 산소 공급 장치, 생명줄 등이 없으면 전문 잠수사라도 물속에서 20분을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저산소증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4월 16일 저녁 6시쯤 얕은 바닷속을 수색하던 군 잠수사들은 개인 산소통 하나만을 가지고 들어갔다 수색에 실패하고 나왔다. 구조 전문가들은 모두 “평택함과 청해진함에 있는 전문 장비가 없으면 유속이 심한 곳에서의 수중 구조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으는 상황이다.

    하지만 서해와 남해에서 각각 작전 중이던 평택함과 청해진함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4월 17일 오전 0시 30분쯤이며, 중대본이 군 당국에 이들 전문 구조함의 파견을 요청한 시간은 배가 이미 완전히 침몰한 시점인 16일 오후 1시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지점은 6시간마다 1시간씩 조류 유속이 느려지는 정조(停潮) 기간이 돌아오는데, 17일 오전 1시쯤에 진행한 선체 내부 수색은 갑작스러운 소용돌이 현상 때문에 실패하고, 이후 오후까지 두 차례 진입 시도도 조류와 좁은 시야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세월호에 갇힌 실종자 구조의 마지막 희망이라 볼 수 있는 해상크레인에 대한 요청도 늦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해상크레인은 바지선 형태로 돼 있기 때문에 운항 속도가 느려 빠른 요청이 필수적이다. 현재 국내 해상크레인은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소유한 3600t급이 최대로, 당초 4월 17일 오전 8시 거제조선소를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이들 업체의 협조로 16일 오후 8시 출항했다. 그래도 도착시간은 18일 밤 11시로, 갇힌 실종자를 인양작업상에서 구하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사고 원인도 미스터리다. 6800t급 여객선이 암초 등 외부 충격 없이 단 1시간도 안 돼 뒤집혀 가라앉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게 선박 전문가 대부분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구조자 다수의 말에 암초 충돌설이 제기됐지만 “사고 지점에는 암초가 없다”는 해양수산부의 공식발표에 따라 선박 결함 또는 선장과 항해사의 운항 실수, 이 둘이 결합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해운사가 배 뒤쪽 선실을 확장해 구조를 변경한 것이 사고 원인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지만, 이는 침몰한 배의 인양 후 정밀조사와 선장, 승무원에 대한 해경의 정확한 수사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해경은 4월 17일 이 선장과 승무원 등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조류가 급격히 바뀌는 가운데 항로를 급작스럽게 왼쪽으로 바꾸다(변침·變針) 배가 갑자기 정지했고, 그와 동시에 컨테이너와 화물이 왼쪽으로 밀리면서 쿵, 쾅 소리가 나고 배가 완전히 좌현으로 기울었다”는 증언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에는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을 휩쓴 각종 대형 사건에서 확인한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과 사고 대처에 대한 미숙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쯤 경제 위상에 맞는 안전시스템을 갖출 수 있을까. 아무쪼록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생환하길 간절히 기도해본다.

    세월호 이용했던 고교생

    “아침 먹고 내릴 준비시간…3층 매점에 학생 몰렸을 것”


    허둥지둥 초동대처 초대형 피해 불렀다
    4월 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의 ‘마루에 페리’사가 1994년부터 18년 동안 가고시마와 오키나와(沖繩) 항로를 운항할 때 쓰던 중고 선박으로, 2012년 10월 청해진해운에 매각된 후 2013년 3월부터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카페리호로 사용되고 있다. 최대 승선 인원은 921명이고 무게는 6825t 규모로, 국내 카페리호 가운데 두 번째로 승선 인원이 많은 배다.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세월호를 국내에 도입한 후 이듬해 3월까지 전남 목포에서 객실 증설 공사를 진행해 승선 인원을 일본에서 운행할 때보다 3층(56명), 4층(114명), 5층(11명) 등 총 181명을 늘렸다. 따라서 무게도 6586t에서 6825t으로 239t 늘었다. 객실 확장이 여객선 상부에 하중을 높여 선박 침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월호는 전날 저녁 6시 30분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다음 날 오전 9시 제주항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저녁과 아침 두 끼를 배에서 해결하는 데다 요금도 저렴해 경기 지역 고교에서 제주 수학여행 상품으로 많이 애용해왔다. 이번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들은 갈 때는 배편을 이용하고 올 때는 항공편을 이용할 계획이었으며 수학여행 경비는 항공요금 11만1100원, 여객선비 6만500원을 포함해 33만550원이었다.

    지난해 세월호를 타고 제주 수학여행을 다녀온 경기 의왕시 백운고 3학년 최모 군은 “세월호 사고가 난 오전 8시와 9시 사이는 아침을 먹고 내릴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미리 아침을 먹고 내릴 채비를 하는 친구는 3층과 4층 객실에 있고 대부분 학생은 매점과 식당이 있는 곳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아마 이번 사고의 경우에도 물이 일찍 들어찼던 3층에 학생이 많이 모여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의 3층 식당과 매점에 갇혀 있을 것이다” “매점 부근에 학생이 모여 있다”며 빠른 구조를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실제 이번 사건 구조자의 증언에 따르면 식당에 있다 배가 급작스럽게 기울면서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거나 자판기 등 각종 집기에 맞아 중상을 입은 사람도 적잖은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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