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4

2014.04.21

말 잃은 국정원, 개혁 도마 위에

국정원 증거조작 특검론·남재준 원장 사퇴 주장 커져…셀프 개혁으로 부족할 것

  • 장관석 동아일보 기자 jks@donga.com

    입력2014-04-21 1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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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잃은 국정원, 개혁 도마 위에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4월 15일 서울 내곡동 국정원에서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은 국가정보원(국정원) 완패로 끝났다. 검찰 수사 결과 중국인 유우성(류자강·34) 씨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려고 국정원이 제출한 출입경 기록이 위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국정원, 검찰, 정부는 치명상을 입었다. 4월 15일 남재준 국정원장이 자기 안방인 서울 내곡동 국정원 본원에서 국민을 향해 머리를 세 차례 숙이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고, 남 원장 해임을 요구하는 야권 목소리는 점차 거세지고 있다. 6·4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남 원장의 거취는 첨예한 논란 대상이다.

    윤갑근 대검찰청 강력부장(검사장)이 팀장을 맡은 수사팀은 유씨 출입경 기록 조작을 주도한 사람으로 국정원 대공수사국 수사팀장을 맡았던 이모(54·3급) 처장을 지목했다. 이 사건은 이 처장의 주도 아래 권모(50·4급·과장) 중국 주선양 총영사관 부영사, 김모(47·4급) 국정원 대공수사국 과장, 이모(48)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 등 3명과 조선족 협조자 김모(61) 씨가 공모한 범행이라는 게 수사팀 결론이다.

    윗선으로 수사, 벽에 가로막혀

    이는 이 처장이 증거조작을 주도하긴 했지만 국정원 지휘부 차원의 조직적인 범죄는 아니라는 의미. 이에 따라 피고발인이던 남 원장과 이모 대공수사국장, 수사와 기소를 담당했던 검사도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국정원은 검찰 수사가 엄정하게 진행될 수 있게 최대한 협조했다는 입장이다. 대통령이 ‘엄정 수사’를 지시한 상황에서 검찰은 국정원을 압수수색했고 다양한 증거를 수집했다. 검찰은 주선양 총영사관과 국정원 본부가 주고받은 비밀 전문의 내용을 확보하기도 했는데, 국정원 내부 전문 내용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 원장도 박근혜 대통령 지시에 따라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출입경 기록을 발급했다는 허룽시 공안국의 확인서가 서울 국정원 본부 컴퓨터의 인터넷 팩스 사이트에서 발송된 사실을 입증해냈다. 전달 경위를 객관적으로 밝혀낸 성과다. 이렇듯 검찰은 문서 위조 과정을 규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윗선 수사’와 관련해서는 국정원 측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권 과장이 자살을 기도했고, 기소된 이 처장은 검찰 수사에서 일부 묵비권을 행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대공수사국장은 소환에 불응해 결국 수사팀은 서면 조사하는 데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말미 소환 일정을 조율하다 수사팀 최모 부국장만 소환하는 데 그쳤다. 결국 “전자문서로 전문을 확인하지 않고 클릭으로 결재만 했다”는 소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이 처장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결재는 했지만 내용은 모른다’는 진술을 검찰이 그대로 받아들인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윤 검사장은 수사 결과 발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고 밝혔지만, 이는 객관적 증거 수집에만 해당할 뿐, 윗선을 규명하는 데는 미흡했다는 평가가 많다.

    말 잃은 국정원, 개혁 도마 위에

    4월 14일 윤갑근 대검찰청 강력부장이 서울 서초동 고등검찰청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야권이 부실 수사를 문제 삼으며 ‘특검론’에 불을 지피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야권이 끝까지 특검론을 고수할 경우, 이를 둘러싼 여야 간 힘겨루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검으로 1, 2급 국장과 부국장을 모두 소환하고 추가 증거를 입수할 경우 이 처장 윗선의 개입 여부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드러날 수 있다. 윤 검사장은 정치권 일각에서 부실 수사 논란이 제기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관련자가 두 차례 자살을 기도하고, 일부 소환자가 진술을 거부하는 등 수사상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은 국정원과 검찰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먼저 국정원은 노출돼서는 안 될 간부와 블랙·화이트 요원들 이름, 신원, 임무가 낱낱이 드러났다. 중국 현지 협조자나 휴민트(인적 정보망)와의 관계도 급격히 약화됐다. 수사 결과 발표 이후 서천호 2차장이 사직했지만 남 원장 경질론이 계속 제기되는 등 지휘부 자체가 흔들리는 모양새다.

    검찰도 ‘받아쓰기 수사’를 했다는 비난에 직면했으며, 한국 공안 수사의 핵심 기관인 공안1부는 현재 동력을 잃었다. 원정화 사건 등 다른 공안사건에 대한 증거위조 의혹도 제기되지만 검찰은 적극 소명하기보다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수사팀은 수사와 공소 유지 담당 검사 2명을 무혐의 처분했지만, 검찰총장 지시로 대검찰청 감찰본부가 당시 수사팀에 대한 감찰을 진행 중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증거조작 사건 때문에 유씨의 간첩 활동 사실이 결국 묻힐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근간이 되는 재판에 사용하는 증거를 조작했고, 그 주체가 국정원이라는 사실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을 남겼다. 향후 다른 간첩 수사에 대한 공신력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정원, 검찰 모두 치명상

    국정원 개혁 문제도 관심사다. 남 원장은 4월 15일 발표한 사과문에서 “과거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고 뼈를 깎는 개혁을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과학화된 수사기법을 발전시키고,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대공수사 능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국정원 내 대공수사 체제, 인사, 방식 등 조직과 직제에 큰 변화가 전망되는 대목이다.

    한편 남 원장은 이번에도 사퇴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과는 표명하되 사퇴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국민 앞에 분명히 했다. 지휘부 책임은 이 처장 선에서 마무리하고, 그 대신 ‘안보 위기’를 강조하려는 전략이다.

    국정원은 최근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강행,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아들 논란 개입 등 다양한 정치 현안에 끼어들면서 국정원의 임무 범위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개입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지자 국정원은 ‘셀프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국정원은 대북 심리전 활동에 대해 ‘방어 심리전 시행 규정’을 만들고, 국회나 정당 등에 대한 정보관 상시 출입을 폐지해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여야는 1월 국정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번 간첩 증거조작 사건으로 ‘국정원 셀프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국정원에 ‘외부 메스’가 들이닥칠 날이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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