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3

2013.11.18

찬 서리 맞고 더 빛나는 하얀 꽃

차나무

  •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11-18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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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가을비가 한차례 내리더니 단풍 들었던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기온이 낮아져 이내 손이 곱을 정도다. 어느새 따뜻한 차 한 잔이 소중한 계절이 됐다. 오미자차, 구기자차, 커피…. 여러 차가 있지만 그냥 ‘차’ 하면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가 먼저 떠오른다. 녹차, 홍차 같은 것들 말이다.

    나라별, 산지별, 찻잎을 따는 시기별로, 또는 말려서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차 맛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이는 많지만, 아마도 차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더욱이 차나무가 겨울을 눈앞에 둔 11월, 바로 이 스산한 계절에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키 작은 차나무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희고 소담스러운 꽃잎에 동백처럼 노란 수술이 유난히 곱다. 10월부터 12월까지 찬 서리를 맞으면서 더욱더 영롱해진다. 차나무 꽃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본 시인들은 이를 운화(雲華)라고 불렀다. 나무들이 대부분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리지만, 지난해 맺어놓은 열매가 여무는 이즈음 한쪽에서는 꽃이 피어나니, 아름다운 흰 꽃과 조랑조랑 매달리는 귀여운 열매가 함께하는 이즈음이야말로 차나무의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차나무는 꽃과 열매가 마주 본다고 해서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도 한다.

    차나무는 원산지를 두고 논란이 많다. 신라 왕자 김교각(金喬覺)이 신라에서 가져간 차 씨로 당나라가 차밭을 일궜으니 우리 식물이라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들여와 즐겨 마셨다는 기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으로 미뤄 중국에서 들어왔다고도 한다.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면 후자가 맞는 듯하다. 어쨌든 예전엔 재배했던 것이 야생으로 자라면서 스스로 씨를 맺고 싹을 틔우니 적어도 귀화는 한 셈이다.

    차나무는 늘 푸른 작은 키 나무로, 꽃빛만 다를 뿐 동백나무와 같은 집안이다. 차나무의 꽃은 깨끗한 흰색 꽃잎을 5장 갖고 있다. 차 꽃의 흰색은 우리 민족에게는 백의민족을, 군자에게는 지조를, 여인에게는 정절을 상징해왔다. 꽃잎 5장은 녹차가 가지는 5가지 맛에 비유된다. 쓰고(苦), 달고(甘), 시고(酸), 짜고(鹽), 떫은(澁) 맛이 그것이다. 인생을 너무 인색(鹽)하게도, 너무 티(酸) 내지도, 복잡(澁)하게도, 너무 쉽고 편(甘)하게도,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苦)도 살지 말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또 딸을 시집보낼 때 예물에 차를 넣어 보내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시집온 며느리에게 차 씨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는 차나무가 곧게 자라는 데다, 옮겨 심으면 쉽게 죽어버리는 성질이 있는 까닭에 차나무를 본받아 한평생 해로(偕老)하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남도에 가면 몇 곳에 다원(茶園)이 있다. 자연스럽게 울타리가 쳐져 곱고 가지런한 느낌이 드는 정경은 잘 가꿔놓은 정원처럼 아름답다. 골골이 다원을 거닐며 아름다운 차나무 꽃도 만나고 인생도 더듬어보는 초겨울 여행을 권한다.

    찬 서리 맞고 더 빛나는 하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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