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9

2013.10.21

난민들의 무덤…‘지중해 비극’

아프리카 불법이민자 목숨 걸고 유럽행…한 달 동안 400여 명 익사 ‘통곡의 바다’로 변해

  • 김기용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kky@donga.com

    입력2013-10-21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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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들의 무덤…‘지중해 비극’

    ‘2006 세계보도사진전’ 사진 부문 1등 작품 ‘빛과 그림자’. 북아프리카에서 본 유럽의 모습을 담았다.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본토 또는 스페인령인 카나리아 제도 사이 바다 거리가 매우 가까워 유럽에서의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불법이민자가 애용하는 루트다.

    짙고 푸른 바다, 따뜻한 햇살, 풍부한 먹을거리…. ‘신(神)이 유럽을 위해 내린 선물’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풍족함과 아름다움의 대명사였던 지중해. 이곳이 최근 통곡의 바다, 죽음의 바다로 변하고 있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들어오는 아프리카 난민 때문이다. 구명조끼도 걸치지 않은 채 허술한 난민선에 오른 그들은 여차하면 지중해에 수장(水葬)되고 마는 현실에 처했다.

    10월 3일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 섬 인근에서 난민선이 침몰해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100명이 겨우 탈 수 있을까 말까 한 배에 500명 이상이 탑승한 것부터 문제였다. 그나마 몇 명이 탔는지 정확한 수조차 아무도 모른다. 탑승자 350여 명이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기회와 꿈 찾아 유럽으로 유럽으로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출발한 이 배는 이탈리아 땅을 지척에 두고 갑자기 멈췄다. 변변한 조명탄 하나 없는 배에서 선장은 구조를 요청하려고 담요에 불을 붙였다. 참사의 시작이었다. 배에 불이 번지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결국 배는 뒤집혔고, 수영을 못하는 데다 구명조끼도 없는 탑승자들은 익사했다. 사망자가 유독 많았던 이유는 배에 탄 난민이 대부분 가난한 아프리카 내륙 출신이라 수영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생존자 150여 명은 람페두사 섬의 불빛만 보고 3시간 정도 바다를 헤엄쳤다.

    ‘지중해 참사’는 10월 11일에도 발생했다. 이번에는 영연방 몰타 섬 근처에서다. 400명 이상이 탄 난민선이 침몰하면서 34명이 숨졌다. 다행히 앞선 사고로 잔뜩 긴장해 있던 몰타와 이탈리아 해안경비대가 신속히 출동해 2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이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인근 바다에서도 난민들이 탄 배가 가라앉아 12명이 사망했다. 10월 한 달 동안 난민 400여 명이 지중해에서 익사한 셈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11년 지중해에서는 난민 1500여 명이 익사했으며, 지난해에도 500여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1988년 이후 지중해를 건너오다 숨진 난민 수는 1만9142명(추정치)에 이른다. 지중해가 ‘난민들의 무덤’이 된 셈이다.

    문제는 지중해 난민이 갈수록 증가한다는 점이다. 올해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들어간 난민은 3만여 명이다. 내전이 격화한 시리아 출신이 7500명으로 크게 늘었고, 동아프리카에 있는 에리트레아(7500명)와 소말리아(3000명) 출신도 많다. 에리트레아 청년들은 입대하면 언제 제대할지 기약할 수 없는 무기한 강제 징병제도를 피해 유럽으로 도망친다. 2000년 이후 주기적인 가뭄과 기아 사태도 난민이 증가하는 요인이다.

    소말리아는 현재 정부와 이슬람원리주의 테러단체가 내전 중이다. 특히 소말리아에 근거지를 둔 테러단체 ‘알샤바브’는 9월 7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를 자행해 충격을 줬다.

    2011년 ‘아랍의 봄’ 이래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에선 쿠데타와 테러가 잇따르고 있다. 지중해 동쪽 시리아에선 2년 이상 계속된 내전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등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난민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게다가 난민선 출발지가 되는 리비아, 알제리가 최근 해안 통제력을 급격히 상실했다는 점도 난민들의 목숨을 건 탈출을 부추긴다. 불법 난민선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브로커까지 등장해 돈을 받고 자리를 파는 상황이다.

    지중해를 건너 난민이 몰려드는 이탈리아는 속이 타들어간다. 이주문제를 담당하는 이탈리아 통합부의 세실 키엥게 장관은 10월 3일 람페두사 섬 인근 침몰사고 후 침통한 표정으로 시신 수습 과정을 지켜보다 “죽은 자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다. 이탈리아 첫 흑인 장관인 키엥게는 콩고 출신 이주자다.

    이탈리아는 먼저 지중해 경비 인력을 증원하겠다는 단기 대책을 발표했다. 해상부터 철저히 통제하겠다는 얘기다. 이탈리아는 남지중해에 해상, 공중 순찰, 경계 인력과 장비를 3배 늘리기로 했다. 또 해안 감시를 위해 무인항공기(드론)까지 투입할 예정이다. 엔리코 레타 총리는 “난민 사고 예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지중해를 건너오는 난민이 이탈리아만의 문제가 아닌 유럽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탈리아 등 지중해 국가 골머리

    난민들의 무덤…‘지중해 비극’
    이탈리아 정부는 “난민문제는 아프리카·이탈리아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유럽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탈리아와 상황이 비슷한 몰타도 마찬가지다. 조지프 무스카트 몰타 총리는 10월 11일 “상황이 개선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이 희생돼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며 “유럽연합(EU)이 이 사태를 방치하는 것은 지중해에 무덤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유럽연합 내무 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연합 10개국이 망명 희망자의 90%를 떠안고 있다. 나머지 17개국도 부담을 져야 한다. 유럽 공동의 난민·이민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호응했다.

    난민에 대한 유럽 공동의 책임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먼저 난민과 관련한 더블린 조약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블린 조약은 난민 보호를 위해 유럽연합이 1990년 제정하고 2003년 개정한 조약으로 “유럽으로 피난 온 난민은 도착한 첫 번째 국가에서 망명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동안 유럽연합 회원국은 이 조약이 주요 난민 발생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유럽국가들에 둘러싸인 독일에만 혜택을 준다고 비판해왔다. 난민들이 첫 번째 국가로 독일에 당도할 방법이 없어 사실상 독일에서 망명을 신청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블린 조약으로 난민 수용에 대한 부담이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폴란드 등 유럽 외곽지역 국가에 집중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기아와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난민은 이탈리아로,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와 이라크 난민은 그리스로, 체첸 반군의 테러를 피해 나온 체첸인은 폴란드로 몰려드는 것이다.

    난민들은 남부 유럽보다 복지체계가 좀 더 나은 독일, 스위스, 핀란드 등 중·북부 유럽국가에 망명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독일을 비롯한 중·북부 국가는 난민 떠안기를 기피한다.

    실제 유럽통계조사청이 조사한 3월부터 6월까지 망명 신청 거부율을 보면 프랑스와 벨기에가 81%로 가장 높고, 독일이 67%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이탈리아와 스웨덴은 신청자의 50% 정도를 받아들여 수용률이 가장 높았다.

    유럽연합은 난민 유입을 막으려고 공동대응을 하기보다 자금을 지원하는 수준에서 유럽 외곽지역 국가들이 스스로 국경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는 상황이다. 실제 유럽연합은 지난 수년간 수백만 달러의 기금을 투입해 유럽 외곽 국경 부근에 펜스를 세우고, 순찰을 위한 경찰 인력을 늘렸으며, 인공위성을 통해 지중해를 건너오는 난민선을 감시해왔다.

    더블린 조약 수정 목소리

    난민들의 무덤…‘지중해 비극’
    그러나 이런 방법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난민선의 ‘더 위험한 도박’을 조장했다. 해양경찰 등의 감시를 피하려고 난민선을 파도에 전복되기 쉬운 소형보트로 바꾸는 것은 물론, 국경 근처에서 표류한 것처럼 위장하려고 배 엔진을 일부러 망가뜨림으로써 지난 수년간 오히려 익사 사고만 급증한 것이다.

    유엔도 “지중해에서 참사가 증가하는 이유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탄압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수아 크레포 유엔 이주민 인권 특별보고관은 “유럽국가들이 난민에 대해 국경을 폐쇄하는 것은 인신매매를 확산할 뿐”이라면서 “비정규 이민은 시민이나 재산, 안보에 대한 범죄가 아니며, 비정규 이민자의 99.99%는 안보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비정규 이민의 범죄화’가 반복되는 지중해 참사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더블린 조약을 수정해 난민이 망명을 신청할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조치가 난민이 이탈리아에 집중되는 것을 막고, 독일 등 상대적으로 여건이 풍족한 국가에 난민을 분산 수용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같은 방법이 마련되면 난민으로부터 돈을 받고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독일 등으로 밀입국시키는 유럽 내 범죄조직도 근절할 수 있으리라고 내다봤다.

    더블린 조약에 따라 난민은 법적으로는 독일 등에 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내에선 주로 밀입국 범죄조직의 도움을 얻어 그들이 가고 싶은 국가로 숨어든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 “더블린 조약은 사실상 밀입국 범죄조직의 일자리 창출 시스템”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경제위기에 허덕이는 남부 유럽국가들의 힘겨운 상황을 다른 유럽국가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할지는 미지수다. 유럽연합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아프리카 난민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독일의 한스페터 프리드리히 내무부 장관은 “난민 대부분은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유럽의 사회복지 혜택을 받으려는 경제적 난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유럽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통곡의 바다’가 된 지중해를 ‘유럽의 보석’으로 되돌리려고 더 강경한 난민 봉쇄책을 쓸 것인가, 아니면 난민을 적극 수용하는 개방적 태도로 나설 것인가. 유럽의 선택에 세계가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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