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9

2013.10.21

누가 바람개비를 만들어놓았을까

물레나물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10-21 09: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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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바람개비를 만들어놓았을까
    지천에 가을꽃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의 그윽한 향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자유롭고 넉넉하게 한다. 이른 봄 언 땅을 녹이고 올라오는 오종종하고 탱글탱글한 봄꽃들하고는 모습도, 때깔도, 향기도 사뭇 다르다. 가을꽃의 빛깔은 지난 계절의 색깔들을 덧입힌 듯 그 깊이가 이를 데 없다.

    이 아름다운 가을 꽃밭에서 문득 지난여름의 흔적을 만난다. 물레나물이다. 한여름 햇살 아래 물레나물은 그저 개성 있는 야생화 가운데 하나려니 싶었는데, 이 가을 숲길에서 만나니 느낌이 훨씬 색다르다.

    물레나물이란 이름은 길쭉한 꽃잎 5장이 마치 바람을 타고 도는 바람개비처럼 한 방향으로 휘어진 데서 비롯했다. 그 모양이 빙글빙글 돌리는 물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계절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들이 물레를 돌려 천을 짜듯 엮어낼 때가 됐다는 뜻일까. 가을 숲길에 핀 물레나무는 말이 없다.

    물레나물은 물레나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숲 가장자리 산기슭의 물가 혹은 논이나 밭이 산과 이어지는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다. 어디서나 잘 자라지만 건조하고 메마른 곳보다 기름지고 촉촉한 곳을 더 좋아한다. 다 자라면 키가 어른 무릎 높이쯤 되며 네모진 줄기엔 어른 손가락 길이쯤 되는, 가장자리가 매끈한 잎이 자루도 없이 마주난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그 끝에 아이 주먹만한 꽃이 달리는데 그 모양이 일품이다. 진한 노란색 꽃빛은 여름에 피어 가을까지 이어진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레나 바람개비 같은 꽃이 핀다.

    독특한 모양 때문일까. 물레나물은 한 번 보고 이름을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하는 식물이 된다. 꽃잎 가운데 튼실하고 강한 암술과 붉은색 수술이 많이 있는 게 특징이다. 꽃이 지고 나면 로켓 끝부분처럼 끝이 뾰족한 짧은 원통형의 열매가 맺히는데, 처음엔 초록색을 띠다가 익을수록 갈색으로 마르고, 급기야 그 끝이 벌어져 아주 작은 씨앗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씨앗을 들여다보면 그 표면에 그물 같은 맥이 있다. ‘물레로 짠 결실’이라 생각하니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름에 ‘물레’와 함께 ‘나물’이란 단어가 들어가 대략 짐작했겠지만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물레나물의 어린순을 살짝 데쳐 헹군 후 양념해서 무친 나물은 맛도 좋다. 누군가는 이를 ‘나물의 왕자’라고 했다. 왕도, 아버지나 어머니도 아닌 왜 하필 왕자란 말인가. 그만큼 나물로 훌륭하다는 뜻일 터이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이용하는데, 생약명으로는 홍한련(紅旱蓮)이라고 부른다. 간 기능에 이상이 생긴 증상을 비롯해 피를 멈출 때 처방하며, 종기 등이 나면 상처에 식물체를 찧어 붙이기도 한다.

    꽃이 좋아 정원에 심는 이도 생겨나고 있다. 씨앗을 뿌리면 비교적 빠른 기간 안에 큰 꽃이 피는 데다, 자라는 곳도 크게 가리지 않아 빈 공간을 채우는 녹화용 식물로 좋다.

    어느 한 방향으로 휘어 돌아 피지 않는 물레나물 꽃처럼 우리네 삶도 둥글둥글해졌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게 물레나물 주위를 감싸고 도는 가을바람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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