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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건강에 답하다

여색(女色)에 빠지면 모든 걸 잃는다

‘동국이상국집’의 색론

  •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여색(女色)에 빠지면 모든 걸 잃는다

여색(女色)에 빠지면 모든 걸 잃는다

시안(西安) 화청지에 있는 양귀비 조각상.

고려 문신이자 문학가인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이라는 불멸의 시문집을 후세에 남겼다. 그악스러운 최씨 무신정권 시대에 권력의 핵심 자리를 꿰차고 있으면서도 자유분방한 문장을 구사한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논란거리지만, 그의 작품이 13세기 한국문학사의 지평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점에서는 별 이의가 없다. 고맙게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53권에 이르는 ‘동국이상국집’(전집과 후집으로 구별)을 완역해내, 기자는 고려 시절 민중 얘기가 그리울 때면 한 번씩 인터넷으로 찾아 읽곤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前集)’ 제20권 잡저(雜著)편에는 색으로 깨우친다는 뜻의 ‘색유(色喩)’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세상에는 색(色)에 혹하는 자가 있다. 색이라는 것은 붉은 것인가, 흰 것인가, 아니면 푸른 것인가. 해, 달, 별, 노을, 구름, 안개, 풀, 나무, 새, 짐승 등에 모두 색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을 미혹하는가. 아니다. 금과 옥의 아름다움, 의상의 기이함, 궁실의 사치스러움, 온갖 비단의 화사함은 더욱 잘 갖춘 색인데 이것이 사람을 미혹하는가. 그럴 듯하나 역시 아니다.”

이어서 이규보는 세상에 존재하는 색 가운데 남자를 가장 크게 미혹하는 것이 여색(女色)이라고 규정한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곱디고운 흰 살결에 화장을 한 여인이 마음을 건네고 눈빛을 보내면, 그녀의 웃음 한 번에 나라가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보는 자는 모두 홀리고, 만나는 자는 모두 혹하는 게 바로 여색이다. 그런데 이규보는 “형제, 친척보다 더 사랑하고 귀여워하지만 이내 여색은 나를 배척하고 내 적이 된다”고 말한다.

이규보는 그렇게 적으로 돌변한 여인에 대해 이번에는 거침없는 인신공격을 가한다. “요염한 눈은 칼날로 변해 나를 찌르고, 굽은 눈썹은 도끼가 돼 나를 찍어버리며, 오동통한 두 볼은 독약이라 나를 괴롭히고, 매끄러운 살결은 보이지 않는 좀이 돼 나를 쏠게 만든다. 이것이 어찌 혹독한 해로움이 아니겠으며, 그 해(害)가 적(敵)으로 변하니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적(賊)이라고도 하니 어찌 친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이규보는 여색의 아름다움을 들으면 곧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서슴없이 구하고, 여색의 꾐에 빠지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남자 속성이라고 봤다. 그래서 좋은 색(色)을 두면 남들이 시기하고 아름다운 색을 점유하면 공명(功名)이 타락하는데, 크게는 군왕에서부터 작게는 경사(卿士)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망치고 집을 잃음이 색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술 없이는 시를 짓지 않을 정도로 주선(酒仙) 경지에 이르고 높은 벼슬자리를 누린 이규보였기에 그 주위에 어찌 아름다운 여인이 없었을까. 그런 그가 73세에 세상을 뜨기까지 장수를 누린 것은 여색(女色)만큼은 철저히 경계한 때문은 아닐까 싶다.

실제로 미인을 경계하는 그의 태도는 처절할 정도로 엄중했다. 이를테면 현명하나 못생긴 얼굴의 대명사인 모모와 돈흡(敦洽)의 얼굴 천만 개를 주조한 뒤 포사, 서자, 여화, 양귀비, 녹주 등 역사상 요염한 여성의 얼굴을 주조한 얼굴 틀에 모두 가둬버리고, 다음으로는 남의 아리따운 아내에게 눈짓을 한 화보(華父·춘추시대 인물)의 두 눈을 칼로 도려내 정직한 눈으로 바꾸며, 천성이 고결한 광평(廣平·당나라 재상)의 창자를 만들어 음란한 자의 배 속에 넣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되면 여인이 유혹할 때 쓰는 향수나 연지가 분뇨나 흙덩이로 여겨질 테고, 월나라의 모장과 서시(西施)의 아름다움도 돈흡이나 모모로 보일 것이니 미혹함이 있으려야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규보의 결기 가득한 다짐을 읽으면서 “남녀 사이 애정과 음식에는 사람의 큰 욕망이 존재하는데, 호색한 사람은 간한다고 해서 말릴 수 없고 좋은 음식은 근심 자체를 잊게 할 수 있다”는 ‘포박자’의 문장이 떠올랐다. 이규보가 그렇게 강하게 경고한들 보통 사람이 어찌 욕망의 그물망에서 쉽게 헤어날 수 있겠는가 싶어 썩은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주간동아 2012.12.17 867호 (p80~80)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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