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2011년 9월 7일 육해공군 합동화력훈련 장면. 자주포(왼쪽)와 방사포 대대의 사격 모습이다.
뒤따라 나오는 장면은 40~50km 사거리를 자랑하는 170mm 자주포가 일렬횡대로 사격에 나서는 모습. 서부전선 일대에만 150문이 배치된 이들 자주포는 240mm 방사포와 함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서울시민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포(恐怖) 무기’다. 북한은 이들 장사정포를 군사분계선 최전방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한미 양국이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들도록 활용한다.
지대공 미사일로 무인항공기 요격
2월 7일 북한 ‘조선중앙TV’가 방송한 59분짜리 기록영화가 전하는 장면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인민군대를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지도’라는 긴 제목이 붙은 이 기록영화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11년 한 해 동안 전국 각지에 흩어진 육해공 인민군 부대를 시찰한 모습을 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지지도 장면 대부분에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동행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 김정은을 담은 화면이 주인공에 해당하는 김 위원장 못지않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선중앙TV가 저녁 7시라는 프라임 시간대에 이 영화를 편성한 이유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외형상으로는 김 위원장의 ‘노고’를 기리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김정은의 군부 장악력 강화를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포석인 셈이다.
문제의 기록영화가 특히 공들여 할애한 부분은 지난해 9월 7일 실시한 육해공군 합동화력훈련을 촬영한 화면이다. 특히 KN-06로 추정되는 지대공 미사일이 무인항공기를 요격하는 장면은 현재 개발 작업 막바지 단계인 것으로 알려진 이 미사일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북한은 이 미사일을 김 위원장 사망소식을 공개하기 직전인 12월을 포함해 2011년 한 해에만 10여 차례 시험발사한 바 있다. 올해 들어서도 1월 11일 동해를 향해 3발을 발사했다는 게 군 당국의 분석. 사거리 120km 내외의 이 미사일은 정확도를 나타내는 원형공산오차(CEP·투하된 폭탄이나 미사일 중 절반이 명중하는 반경)가 지금까지 개발된 KN 계열의 유도탄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2007년에도 사거리 120km 내외의 KN-02 지대지 미사일을 연속으로 시험 발사해 개발을 완료한 바 있다. 최근 북한군이 이렇듯 정밀도가 높은 단거리 미사일 개발과 대외 과시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새로 건설되는 평택 미군기지 사업과 관계가 깊다고 한미 군 당국 관계자들은 전한다. 개성직할시 판문군 등 휴전선 서부전선 북측지역 최남단에서 평택 기지까지의 직선거리는 100km 남짓. 서두에서 설명한 장사정포 사거리에서 벗어나려고 미군 당국은 의정부와 서울 용산 미군기지의 한강 이남 재배치를 서둘러왔지만, 북측은 이에 대해 사거리 100km 내외에 정밀도를 크게 강화한 새 지대지·지대공 미사일 개발로 맞서는 셈이다. 오산공군기지에서 뜨고 내리는 한미 공군전력과 평택기지에 새로 건설되는 주한미군 사령부를 계속해서 타격범위 내에 두겠다는 포석이다. 최근 수년간 수도권을 배경으로 평양과 워싱턴이 주고받는 장군과 멍군의 수 싸움이다.
비행훈련에 나선 북한의 최신예 전투기 미그29기 편대.
재래식 전력 확충 한계에 봉착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맨 왼쪽)이 훈련을 지켜보는 모습.
이 때문에 이후 북한군은 고가의 첨단 무기체계보다 비대칭 군사력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1990년대 이후 핵무기나 생화학 무기는 물론, 앞서 살펴본 미사일이나 장사정포 전력을 대폭 강화하고 나선 것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이는 지상전력도 마찬가지여서, 기존의 정규군 병력 대신 특수전 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편제를 바꿔나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번에 공개한 기록영화 또한 대규모 지상군 정규병력 대신, 헬기 레펠 강하나 수송기 낙하 등 특수전 병력의 공중강습 훈련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뤘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사시 후방에 침투해 서울의 군사 지휘부나 주요 시설을 타격하는 것이 이들 부대의 주요 목적. 국방부는 ‘2010 국방백서’를 통해 북한군이 경보병사단을 전방군단에 편성하고 전방사단에 경보병연대를 추가 편성하는 등 특수전 능력을 20만 명 수준까지 강화해왔다고 평가한 바 있다.
기록영화는 육해공군 합동화력훈련을 전하면서 김 위원장 부자가 넉 대의 스크린을 통해 훈련에 참가한 각 무기체계의 위력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을 반복해서 편집했다. 하늘과 바다, 육지를 대표하는 북한의 신형 무기체계 위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와 함께, 비대칭 전력에 대한 북한 수뇌부의 정책적 강조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군 대응 ‘인식의 전환’ 필요
일제히 화염을 내뿜는 장사정포(왼쪽)와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KN-06의 요격 장면.
정작 문제는 북한이 이러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강화하는 비대칭 전력이 남측에 훨씬 많은 경제적 부담을 야기한다는 현실이다. 앞서 기록영화를 통해 확인한 주요 비대칭 전력에 대응하려면 남측은 북측이 투입한 비용보다 적게는 10여 배, 많게는 수십 배에 달하는 예산을 들여 새로 무기체계와 시설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 수도권을 위협하는 북측 장사정포의 총 도입비용은 우리 돈으로 1조 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군은 이를 조기에 격파하는 대화력전(對火力戰)을 위해 2020년까지 30조 원을 투입할 계획을 세운 게 대표적이다. 이러한 비용 차이는 30배가 넘는 남북 간 경제규모 차이나 3배가 넘는 군사비 차이를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히려 한국군이 늘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비대칭 위협을 추가로 확인할 때마다 각각에 대응하는 공격자산을 구입해 전체전력지수를 높이려는 한국군의 현재 대응방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견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힘을 얻는다. 감시정찰자산 확충과 효율적인 C4I체계(지휘통제자동화체계) 구축을 통해 기존 자산의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더욱 스마트한 새 패러다임’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한층 강화되는 북한군의 ‘비대칭 행보’와 관련해, 하루 속히 ‘인식의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기록영화가 한국군에게 던지는 가장 큰 교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