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1

2011.11.07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프랑스 파리 | 세계인에게 각광받는 문화도시로 확고한 자리매김

  • 파리=구자홍 기자 kjh@donga.com

    입력2011-11-07 09: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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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프랑스의 유명 화가 귀스타프 카유보트가 그린 ‘비 오는 날의 파리’(1877년 작)는 무표정한 사람이 길을 걷는 모습을 담았다. 카유보트의 이 그림은 회색빛 석회암으로 지은 단조로운 건물이 늘어선 당시 파리의 풍경을 압축해 표현한 것이다. 당시 파리 시를 계획도시로 만드는 데 비판적이던 비평가들은 카유보트의 그림에 빗대 황량한 파리가 될 것이라며 혹평했다. 마치 카유보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썰렁함이 파리의 모든 것인 양.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혹평은 찬사로 바뀌었다. 카유보트가 ‘비 오는 날의 파리’를 그린 지 124년이 지난 2011년 파리는 ‘황량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잘 보존한 도시를 구경하려고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날마다 골목을 누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표 도시를 꼽으라면 파리는 언제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파리는 통일성을 간직한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세계인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렇다고 파리가 역사와 전통에 발이 묶여 ‘구(舊)도시’로만 존재해온 것도 아니다. 보존 못지않게 세계적인 도시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성장에도 힘써왔다. 그 과정에 무분별한 난개발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질서 있으면서도 체계적인 성장을 통해 ‘보존’과 ‘성장’의 공존이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파리의 아버지 오스만 남작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파리는 도시계획가와 조경가, 건축가가 계획적으로 건설했다. 특히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 때 당시 파리시장이던 오스만 남작이 기초를 닦았다. 파리도시개발위원이기도 한 필립 에스테베 파리 그랑제콜 교수는 “건축적으로 파리 중심가에 개입한 것은 오스만 남작 때가 거의 마지막”이라며 “오스만 이후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도시에 대한 정의’는 큰 변화 없이 유지했다”고 말했다.



    파리의 도로와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공원 등 시민 편의시설, 심지어 벤치와 분수 위치까지 대부분 오스만 남작 때 자리 잡은 그대로 유지했다. 파리 중심가를 정점으로 방사형 도로망을 깔아 시내 주요 지점을 서로 연결하고, 외곽 철도역에서 도심 중앙까지 단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도로망을 건설한 것도 오스만 남작 때다.

    노천 카페가 줄지어 들어선 파리의 대표적 명소 샹젤리제 거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샹젤리제 거리를 조성한 이유가 ‘시위 진압’을 위해서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파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에서 혁명의 온상이었던 복잡한 사육장 같은 거리를 없애고 그의 기병대가 도시 혁명을 진압하기 쉽게 대로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오스만 남작은 파리로 인구가 몰리면서 훼손된 도시 환경을 하나씩 정비해나갔다. 대공원인 불로뉴의 숲 등 공공공간은 파리를 아름다우면서도 건강하게 꾸미겠다는 오스만 남작의 철학이 담긴 곳이다.

    오스만 시대에 건설한 파리의 또 다른 특징은 보행자를 위해 도시의 주요 거점을 가깝게 배치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파리를 찾은 배낭여행족이 도보로 파리 주요 시내를 관광할 수 있는 것은 오스만 남작이 기초를 닦아 놓은 도시계획 덕분이다. 오스만 남작 이후 추진한 파리 도시계획은 주로 파리 외곽 개발과 관련된 사업이다.

    도시로서 파리의 발전사를 논할 때 오스만 남작 때의 파리 대개조 운동은 제1단계에 해당한다.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진행한 파리 도시개발 제2단계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복구사업과 현대적인 도시 기능을 수용한 시기라 할 수 있다.

    파리 시 경계에 순환고속도로(1973년)를 건설하고, 파리 도심과 주변 외곽지역을 잇는 고속전철(RER)을 만든 것이 이때다. 파리 시내 일부에 고층건물을 세운 도심 재개발도 부분적으로 이뤄졌다. 파리 도심에 위치한 노천 시장과 그 주변을 철거한 뒤 상업시설과 업무시설을 조화시킨 레알상가, 퐁피두센터를 이곳에 건립했다.

    파리는 도시 현대화가 진행된 후 새로운 상업 기능을 수용하려고 신도시를 건설하며 도시개발 제3단계를 추진했다. 파리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742만5000㎡(약 225만 평) 규모로 라데팡스를 건설한 것이다. 업무와 공원, 기타 지역으로 나누어 개발한 라데팡스는 유럽의 대표적 상업중심지역이 됐다.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파리도시개발연구소 크리스티앙 블랑콧 도시건축 책임연구원.

    파리 구도심의 건물이 대부분 5층 정도로 비슷한 데 반해, 라데팡스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파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개선문에 올라 시내를 둘러보면 전통미가 물씬 풍기는 구도심과 현대식 건물이 여기저기 솟은 라데팡스가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파리 도시개발 제4단계는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대형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미테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한 ‘그랑 프로제’다. 이때 진행한 기념비적인 건축 작업으로는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의 주요 작품을 전시한 오르세 미술관 개조를 들 수 있다. 또한 아랍문화원이 이때 문을 열었고, 국립도서관과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도 이 시기에 세웠다. 그랑 프로제 덕분에 파리가 더욱 풍성한 문화도시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파리의 대표 관광명소인 몽마르트르 언덕(왼쪽)과 유흥 1번지 피갈 거리.

    인간과 환경을 생각하는 도시

    파리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문화도시로 세계인에게 각광받는 것은 몇 차례 도시 재개발을 진행하면서도 예외 없이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파리도시개발연구소(우리나라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해당) 크리스티앙 블랑콧 도시건축 책임연구원은 파리가 전통을 간직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17세기 초반부터 파리는 건축허가제도를 유지해왔다. 도시개발의 규범화를 일찌감치 이뤘기 때문에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도시가 성장해도 연속성을 지닐 수 있었다.”

    파리는 오스만 남작 때 이후 진행한 몇 차례 재개발에도 건축에 관한 한 엄격한 규제를 그대로 적용했다. 일례로 19세기 이후 파리 도심의 건물 높이는 15m로 제한했다.

    무분별한 개발을 막으려고 파리는 ‘도시계획 지침에 의해서만 공사를 진행한다’는 원칙도 고수했다. 시민의 동의에 따라 정한 몇 가지 재개발 원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재개발하되, 내부 건축은 현대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파리가 오스만 남작 때 이후 150년 넘도록 전통적 도시 외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재개발 원칙 덕이다.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반드시 녹지 확보 재개발 원칙

    두 번째 원칙은 법률상 의무 규정인 사회복지주택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는 것이고, 세 번째 원칙은 1층은 상가로 지어 상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리가 공존과 번영의 도시로 세계인에게 각광받는 이유 역시 이 원칙에 힘입은 바 크다.

    블랑콧 책임연구원은 “파리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원칙도 있다”며 “(재개발을 할 때는) 녹지를 일정 부분 반드시 확보하도록 하고, 비가 스며들 수 있도록 맨땅의 비율도 지정해놨다. 또 조망권 보장을 위해 건축물의 각도를 조정하는 원칙도 있다”고 소개했다.

    파리는 이러한 재개발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한편, 시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려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 의견 청취와 설득의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파리도시개발연구소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 세계인에게 각광받는 파리를 21세기에 걸맞게 광역도시로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 연구를 진행한다. 그와 동시에 도심에서는 삶의 질을 고려한 인프라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한다. 블랑콧 책임연구원의 말이다.

    “앞으로 20년 동안 파리 외곽에서 진행할 대규모 공사 계획을 수립하는 중이다. 파리가 구도심과 외곽 구분 없이 하나의 광역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또 한 가지는 시민 삶의 질을 고려한 개발이다. 시민은 ‘도시에서 자동차를 점점 더 없애자’고 요구한다. 공공공간과 녹지, 광장을 더 조성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일례로 파리 센 강 양쪽에 고속화도로가 있는데, 한쪽의 차량 통행을 막아 보행자 공간으로 만들자는 계획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파리의 미래는 인간과 환경을 생각하는 도시다.”

    인터뷰 / 필립 에스테베 파리 그랑제콜 교수

    “파리는 지금 세계 챔피언 꿈꾼다”


    골목 구석구석에 낭만과 전통 녹아 있었네
    프랑스의 대학 학제는 우리나라와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 대학과 같은 유니버시티가 있고, 프랑스 고유 학제인 그랑제콜이 있다. 그랑제콜을 졸업하면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어 엘리트만이 그랑제콜에 입학 가능하다.

    필립 에스테베는 시앙스포(Scien ces Po)라는 프랑스 유명 그랑제콜 교수다. 그는 정치학과 지리학을 전공했지만, 도시공학 분야에 관심이 많아 파리도시개발위원으로도 활약한다.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이 있는 프랑스 군사박물관 인근 한 카페에서 필립 교수를 만나 도시로서 파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파리가 오스만 남작 때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돼온 비결은 뭔가.

    “‘파리는 국가의 보물’이라는 공감이 커 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정치적으로는 1970년대 이전까지 파리에 시장이 없었다. 중앙정부와의 권한 충돌을 우려해 시장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시의회에서 모든 것을 관장했다. 그러다 보니 1977년 자크 시라크 시장(이후 대통령에 오름) 취임 이전에는 파리를 바꿀 만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도시가 고전주의적 모습에 갇힌 측면도 있다.”

    파리 구시가지에 사는 시민 처지에서는 보존을 위한 규제로 불편했을 텐데.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만 파리에 남았다. 돈이 많거나 독신이거나 자가용이 필요 없는 사람만 파리에 남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파리 외곽으로 떠나야 했다. 파리 시민 가운데 자가용을 보유한 사람의 비율은 50%가 안 된다. 주로 젊은 층이 파리 중심부를 선호한다. 파리에 남은 시민은 본인이 선택한 것인 만큼, 규제에 크게 불만이 없는 편이다.”

    파리를 재개발할 때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두나.

    “파리 재개발은 시민 중심이 아니다. 구시가는 문화유산을 더 대우한다. 그러다 보니 구시가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대신 변두리가 빨리 변한다.”

    파리와 다른 지역 간 개발 형평성 문제는 없나.

    “파리는 세계 도시 가운데 챔피언으로 남아야 한다는 국민적 자긍심이 있다. 또 지방 대도시가 세계와 소통하려면 파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파리를 통해 다른 지방 대도시도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렸다. 1940년대에는 수도 파리만 비대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사막화했다고 비판한 ‘파리와 프랑스의 사막’ 류의 책이 나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수도권과 지방 간 불균형 문제는 크게 제기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파리가 다른 도시를 지배한다기보다 파리와 각 대도시의 협력, 공조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고 하겠다.”

    파리의 미래 청사진은 뭔가.

    “교육과 문화 대표 도시로서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그와 동시에 ‘산업도시’로서도 발전을 꾀하는 중이다. 파리 외곽에 한번 가보라. 수많은 공장이 들어서는 중이다. 세계적인 연구기관을 비롯해 자동차와 군수, 제약, 항공, 바이오 기술 등 미래산업 기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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