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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재야 고수’ 이건의 도발

아무것도 모르고 팔고 샀다가 큰 탈 났다

대량살상무기 통화옵션상품 키코(KIKO)

  • 이건 ‘대한민국 1%가 되는 투자의 기술’ 저자 keonlee@empas.com

아무것도 모르고 팔고 샀다가 큰 탈 났다

주가연계증권(ELS) 외에 통화옵션상품 ‘키코(KIKO·Knock-In Knock-Out)’ 역시 ‘모르는 상품은 손대지 마라’는 원칙을 적용할 수 있는 상품이다. 키코도 상품 원리는 ELS와 비슷하다. 환율이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고객이 이익을 보고,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손실을 본다. 2008년 초 환율 하락을 걱정하던 수출 중소기업 수백 개가 은행 권유를 받고 이 상품에 가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키코는 파생상품의 파괴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우량 중견기업을 비롯해 수많은 중소기업이 파산하거나 막대한 피해를 봤다. 그 피해액은 수조 원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도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은 물론 은행도 이해 못 해

문제는 이 상품에 가입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판매한 은행조차 이 상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감히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만에 하나 은행이 상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팔았다면, 몇 푼 안 되는 이익을 얻으려고 수많은 중소기업을 사지로 내몬 꼴이 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과 은행모두 선의로 키코 거래를 했으되, 상품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거래 진행 과정에서 의욕이 지나쳐 헤지(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 방지) 효과뿐 아니라 이익까지 얻으려 했다가 사단이 난 것으로 보인다.

키코 거래의 타당성을 살펴보자. 먼저 중소기업이 환율을 내다보는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중소기업은 거래하기 불편한 키코 대신 선물이나 옵션을 직접 거래하는 편이 낫다. 나아가 업종을 변경해 외환거래업무에 주력한다면, 회사를 단기간에 재벌 규모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키코는 이 중소기업에 적합한 상품이 아니다.

이번에는 중소기업의 환율 예측 능력이 평범한 수준이라고 가정해보자. 중소기업은 위험을 회피한다는 명분 아래 계약했지만 그 상품이 과연 위험을 줄여줄지, 아니면 더 큰 위험이 숨어 있을지 알지 못한다. 사실 중소기업 수준에서 이런 상품을 이해하기란 무리다. 아마도 ‘전문가’인 은행을 믿었을 것이다. 아니면 은행의 은근한 압력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약했을 것이다. 결국 중소기업의 환율 예측은 한낱 희망에 불과하다.



은행 영업직원의 그럴듯한 논리나 은근한 압력에 굴복했더라도, 일단 계약한 다음에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진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의지할 것은 계약서뿐이다. 하지만 계약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서명한 중소기업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중소기업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인 셈이다.

금융회사 직원들의 실력을 인정해야 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계약서 작성과 소송 분야다. 금융회사는 전통적으로 법적 분쟁을 끊임없이 겪는다. 그래서 대부분 수많은 소송 사례를 축적했고, 법률 전문가로 이뤄진 별도 조직까지 갖추었다. 금융회사의 이런 노하우를 집약해놓은 산물이 계약서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이 들어찬 두툼한 계약서는 웬만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불확실성의 여지가 있으면 금융회사들은 면책(免責)조항을 집어넣는다. 따라서 중소기업이 금융회사와 소송을 벌여 보상을 받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키코로 대량 참사를 겪은 중소기업들은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중이지만, 1심(2010년 11월 29일)과 2심(2011년 5월 31일)에서 모두 패했다. 만에 하나 3심에서 승소한다 해도, 손실을 모두 보상받기란 어려울 것이다. 금융 부문 소송에선 흔히 쌍방 과실을 인정해 일부만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파산한 기업에는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금융회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품을 만들어 파는 어이없는 일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7년 세계금융의 중심지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그렇다. 이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한국도 그 때문에 경기침체와 고물가 등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미국 채권시장에서 한때 국채보다 더 활발하게 거래하던 증권이 주택저당증권(MBS)이다. 주택담보대출 5000개 정도를 하나로 묶어 발행하는 증권인데, 여기에 첨단 금융기법을 가미하면 가치가 더 높은 모기지 파생상품을 만들 수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파는 것보다, 부위별로 나눈 뒤 잘 포장해 팔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병든 소로 최고급 스테이크를 만들어낸 첨단 기법

예컨대 값이 비싸더라도 맛있는 부위를 원하는 고객에게는 등심이나 안심을 포장해 판매하고, 맛은 없더라도 푸짐하게 배를 채우려는 고객에게는 값싼 부위를 포장해 판매하는 식이다. 금융회사는 주택담보대출에서 회수하는 원리금 수입을 첨단 기법으로 가공해 품질 등을 기준으로 몇 개로 구분한 다음 신용등급을 매겨 별도 상품으로 판매했다.

이렇게 만든 부채담보부증권(CDO)은 금융회사 처지에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주택담보대출을 바탕으로 투자자의 입맛에 맞게 CDO를 만들어 팔면 푸짐한 이익을 얻고 대출지금도 곧바로 회수할 수 있었다. 이 자금으로 또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고, 역시 CDO를 발행해 즉시 돈을 회수하는 방식을 반복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렇게 부지런히 대출을 제공하다 보니 이제 대출받을 만한 고객이 부족해진 것이다. 그러자 금융회사는 대출심사 기준을 낮추는 방법으로 새로운 고객을 발굴했다. 급기야 ‘소득도, 직업이나 자산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대출을 해줬다. 이를 ‘닌자(Ninja·No income, no job or assets)대출’이라 불렀다. 나중에는 ‘중성자탄 대출’이라고 불렀는데, 사람은 죽이지만 주택은 멀쩡하게 남는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예리한 독자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직업이나 자산이 없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대출이라면 CDO로 만들어도 신용등급이 낮을 텐데, 어떻게 계속 팔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첨단 금융기법과 금융회사들의 수완이 결합하면서 기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주택담보대출 5000개 한 묶음 중 대부분이 B등급이나 BB등급이고 A등급이 몇 개 섞인 정도였으나, CDO로 탈바꿈하면서 75%가 AAA등급 채권이 됐고, 12%가 AA등급, 4%는 A등급이 됐다. 겨우 9%만 BBB등급 이하였다. 이를테면 병든 소를 잡아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로 포장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팔고 샀다가 큰 탈 났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미국 주택가격이 하락하면서 원리금 연체가 급증했고, 담보주택 경매로도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졌다. 2008년 중반의 한 조사에 의하면, AAA등급이던 CDO가 B1등급으로 하락하면서 추정가치가 80% 넘게 폭락했다. 그나마 추정가치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손실이 얼마인지 평가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품이 전 세계로 퍼진 탓에 세계 주요 금융기관은 줄줄이 곤경에 처했다. 이 또한 모두 모르는 상품이 빚어낸 비극이라 하겠다.

* 이건은 은행에서 펀드매니저로 국내 주식과 외국 채권 및 파생상품을 거래했고, 증권회사에서 트레이딩 시스템 관련 업무도 했다. 지금은 주로 투자 관련 고전을 번역한다.



주간동아 798호 (p48~49)

이건 ‘대한민국 1%가 되는 투자의 기술’ 저자 keonle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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