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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남도길 대장정 희망을 걷다 09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지리산 둘레길 산청 수철마을~갈티재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수철마을~갈티재 구간의 시작 지점인 수철마을 입구.

빠르고 높고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숲길 고갯길 강길 들길 옛길을 에둘러

아주 천천히 걷고 또 걸어서 그대에게 갑니다

잠시라도 산정의 바벨탑 같은 욕망을 내려놓고

백두대간 종주 지리산 종주의 헉헉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이는 길 잠시 버리고

어머니 시집올 때 울며 넘던 시오리 고갯길

장 보러 간 아버지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숲길

애빨치 여빨치 찔레꽃 피는 돌무덤을 지나

밤이면 마실 처녀총각들 물레방앗간 드나들고

당산 팽나무 달 그늘에 목을 맨 사촌누이가

하루 종일 먼 산을 바라보던 옛길

그 잊혀진 길들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산청(山淸)에 눈이 내렸다. 지리산 머리가 희끗희끗 백발로 변했다. 지리산 아래 산청은 양지바른 땅이다. 눈이 와도 봄눈처럼 금세 녹아버린다. 눈은 응달에만 한 줌씩 웅크리고 있다. 산청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1915m)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를 수 있는 땅이다. 겨울 지리산은 맑고 쇄락하다. 공기는 차고 알싸하다. 강물은 얼어붙었다. 물은 군데군데 쫄쫄 흐른다.

구제역 파동 둘레길 공식 폐쇄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위) 덕산은 온통 감나무 천지다. 이곳 감은 고종시(高宗枾)다. 보통 감보다 잘고 씨가 없고 맛이 달다. (아래) 고둥과 산나물이 어우러진 삼거리식당 정식.

요즘 지리산 둘레길 산청 수철마을~갈티재 구간(47.1km)은 한적하다. 한동안 산청 둘레길은 북새통이었다. KBS 2TV ‘1박2일’ 팀이 다녀간 뒤로 인기몸살을 앓았다. 개그맨 이수근이 걸었던 동강~수철마을 구간(11.9km)은 서울 명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수철마을은 주차장이 모자라 아우성이었다. 관광객을 가득 실은 대형 버스들은 설 곳이 없어 뱅뱅 겉돌았다. 마을 개들은 짖다가 목이 쉬어 풀이 죽었다.

산청 둘레길은 공식적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구제역 파동 때문이다. 그렇다고 걷기꾼들이 안 갈 리가 없다. 발이 근질근질한 걷기꾼들은 ‘소리 없이 살그머니’ 둘레길을 다녀간다. 산청군에서도 그걸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걷기꾼들과의 ‘느슨한 공존’인 셈이다. 산청군은 1월 25일 현재 ‘구제역 청정지역’이다. 일단 둘레길 걷기꾼들은 방역에 철저해야 한다.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산청군도 이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방역 대책을 세워야 한다. 걷는 것이 결코 먹고사는 것보다 우선일 수 없다.

동강~수철마을 구간은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제법 높은 고개가 2개나 있고, 폭포도 있다. 흙길보다는 시멘트 임도와 아스팔트길이 많다. 어르신들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힘들다. 그만큼 무릎에 압박을 많이 받는다. 스틱은 필수다. 내리막에선 그만큼 무릎의 부담을 덜어준다.

겨울 지리산은 뼈만 남았다. 둘레길도 바늘잎 소나무만 빼놓고 모두가 꾀를 벗었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 참나무 밑에는 도토리 껍질이 수북하다. 다람쥐, 멧돼지 등의 다급한 식사 흔적이다. 먹을 게 부족하니 쭉정이 이삭이라도 주워 먹어야 한다. 올해처럼 도토리가 흉년이면 산짐승은 죽느냐 사느냐의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제 봄은 머지않았다.

단속사 옛터와 겁외사를 찾아온 겨울바람

수철마을에서 성심원까지는 마을을 지나 경호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산청읍내의 옆구리를 거쳐 간다. 지루하다. 강바람이 제법 맵다. 오른쪽에 웅석봉(1099m)이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길은 성심원을 지나 아침재부터 거의 수직 오르막이다. 숨이 가쁘다. 아침재~어천마을~원정마을까지 약 13km 구간은 호젓한 숲길이다. 바람이 “윙~윙~” 깔깔대며 지나간다.

구름마을 운리(雲里)엔 단속사(斷俗寺) 옛터가 있다. 단속사는 글자 그대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땅’이다. 성철스님(1912~1993) 생가 터에 지은 겁외사(劫外寺)도 비슷한 뜻이다. ‘시간 밖의 절’인 것이다. 겁외사는 산청 단성면 묵곡리에 있다. 단속사 터엔 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운리 일대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종매화가 2그루나 있다. 정당매와 원정매가 그것이다. 남명 조식 선생이 심은 산천재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3매’라 불린다.

정당매는 고려시대 문인 강회백(1357~1402)이 젊은 날 단속사에 심었다는 매화다. 강회백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고위직에까지 올랐던 선비. 정당매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 탑동 단속사 터에 있다. 현재 3개 줄기가 외과수술을 받고 남아 있지만 거의 고사 상태다. 봄마다 원줄기에서 뻗어 나온 손자줄기에서 꽃망울을 토해내고 있다. 원정매는 원정(元正) 하즙(1303~1380)이 심었다는 매화다. 정당매가 있는 탑동 윗동네 원정마을에 있다. 원줄기는 말라 죽었으나 밑둥치 옆에서 가지가 나와 분홍꽃을 토해낸다.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의 전(傳)구형왕릉.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재위 521~532)의 능으로 전(傳)해 내려온다. 그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한 죄인이니 돌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책 코스 백운계곡

남명매는 1562년 남명(南冥) 조식이 61세 때 산천재 앞뜰에 심은 홍매다. 남명매는 아직도 헌걸차고 꼿꼿하다. 봄마다 사진작가들의 단골 주인공이다. 향기도 은은하고 그윽하다. 토종매화는 꽃이 작다. 꽃도 띄엄띄엄 성글게 돋는다. 향이 은은하고 오래간다. 검버섯 마른 명태 같은 몸에서 어느 날 화르르 꽃을 토해낸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대부분 매실을 따기 위해 양계장 닭처럼 ‘대량 양식’을 하는 꽃이다. 일본 개량 매화다. 꽃이 덕지덕지 붙는다. ‘매화나무’라기보다는 ‘매실나무’인 셈이다. 고고한 기품이 덜하다. 향기도 오래가지 않는다. 벚꽃처럼 우르르 피었다가 우수수 진다.

백운계곡은 조식 선생의 산책 코스다. 그는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머리를 식히려 이곳을 찾아 노닐었다. 그의 글씨 ‘白雲洞(백운동)’ ‘龍門洞天(용문동천)’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근담(摩根潭)계곡은 ‘마의 뿌리처럼 곧은 골짜기’다. 물이 맑다. 백운계곡~마근담계곡 구간 둘레길은 겨울철에 한해 문을 닫는다. 눈과 빙판길 미끄럼으로 사고가 염려되기 때문이다. 걷기 도사들의 안내가 필요한 구간이다. 단체로는 몰라도 1,2명이 가는 것은 무리다. 길은 비교적 잘 정비돼 있지만 가파르다.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단속사지삼층석탑.

지리산은 겨울에 보는 게 제격이다. 뼈만 남아 황소처럼 웅크리고 있는 산. 수천 년 동안 묵언 정진하고 있는 산. 산은 말이 없고,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은 늘 분주하다. 도대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앙앙불락하는가. 거친 말은 하늘을 찌르고 분노의 소리는 차고 넘친다.

겨울 지리산 둘레길은 호젓하다. 혼자 걷다 보면 분노에 찌든 내가 보인다. 왜 그리 살았는지 부끄러워진다. 산청 덕산은 감나무 천지다. 감나무 끝엔 까치밥이 달려 있다. 검은 나뭇가지 위 붉은 꽃이 흔들린다. 그것은 여유다. 배려다. 그렇다. 모든 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이다.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Basic info.

☞ 교통편


고속버스 | 서울 → 진주(진주에서 산청행 버스)

시외버스 | 서울남부터미널(3시간 소요)

자동차 | 서울 → 경부고속도로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IC

산청에서 수철마을까지 버스로 10분 소요. 산청군내버스(055-973-5191), 산청버스터미널(055-972-1616)

코스

수철마을 → 지막마을 → 대장마을 → 산청고교 → 내리교 → 내리한밭 → 바람재 → 풍현(성심원) → 어천마을 → 헬기장 → 점촌마을 → 탑동마을 → 원정마을 → 백운계곡 → 마근담계곡 → 사리(고마정) → 사리(천평표) → 중태마을 → 유점마을 → 갈티재

먹을거리

고둥 전문 삼거리식당(055-973-2663)

메기찜 자라탕 전문 산청읍내 강변식당(055-973-2346)

해물콩나물밥 보쌈, 낙지전복탕 전문 덕산의 ‘수풀 林’(055-972-4066)

문의

산청군산림녹지과(055-970-6900), (사)숲길(055-884-0850)

지리산정신 남명(南冥) 조식(曺植)

지리산이 품고 키워낸 ‘칼 찬 선비’


산은 변함없이 묵언정진 인간만이 늘 분주하구나

남명 조식이 심은 홍매.

남명 조식(1501~1572)은 조선 선비의 으뜸이다. ‘칼 찬 선비’다. 그는 산림처사를 자처하고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선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는 ‘선비는 천자(天子)조차도 마음대로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인생의 꽃이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민족의 마지막 보루’라고 굳게 믿었다. 선비가 글공부를 하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실행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라’고 강조했다.

동갑내기 이황(1501~1570)과 생각이 전혀 달랐다. 이황은 어디까지나 학문을 이론으로서만 추구했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범생이’ 스타일이었다. 조식은 이황에게 충고의 편지를 썼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해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조식은 성리학만 고집하지 않았다. 도교, 불교, 양명학 등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평생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일정하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만큼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선비는 글공부뿐 아니라 활 쏘고 말 달리는 것도 해야 하며 음양, 천문지리, 의약도 두루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사람이 60여 명이나 됐다. 정인홍, 곽재우, 김면 3대 의병장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져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립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대대적으로 숙청을 당했고 남인은 서인의 붕당정치 파트너로 그 맥을 이어갔다.

조식은 임금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명종(재위 1545~1567)에게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해 하늘의 뜻이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자전(慈殿·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중종)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문정왕후는 한낱 아녀자에 지나지 않고, 임금인 명종은 어린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식이 마흔셋일 때 중종(재위 1506~1544)이 죽었다. 조식은 시 한 수를 지어 감회를 드러냈다. “한겨울에 베옷 입고 바위굴 속에서 눈비 맞으며/ 구름에 가려진 햇살도 쬐어본 적 없건마는/ 서산으로 해가 진다고 하니 몹시 슬프구나!”

중종의 신하도 아니었고, 중종으로부터 손톱만큼의 은혜조차 받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백성 된 도리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조식은 열여덟 살 때 절에서 책을 읽다가 조광조(1482~1519)가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기묘사화). 숙부 조언경도 그에 얽혀 죽임을 당했다. 1545년 마흔네 살 땐 절친한 벗인 이림, 곽순,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죽었다. 과거시험에 뜻을 접은 이유다.

조식은 지리산을 닮았다. 그는 평생 지리산에 17번이나 올랐다. 그는 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했다. “천석의 무게를 가진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어떻게 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시를 짓기도 했다.

그는 나이 육십에 지리산 아래 덕산에 들어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산천은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주역의 대축괘(大畜卦)를 의미한다. 강건하고 독실하게 마음을 닦아,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이다.

조식은 1572년 덕산 산천재에서 일흔하나에 눈을 감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의 이름 앞에 어떤 벼슬도 쓰지 말라. 오직 ‘처사(處士)’로 쓰는 게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주간동아 2011.01.31 773호 (p50~53)

  • 김화성 동아일보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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