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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노년의 의미와 가치 실종사건

욕망과 성취 극대화 속에 닥친 노령사회… 일하지 않는 긴 여생 새로운 갈등 출발점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노년의 의미와 가치 실종사건

노년의 의미와 가치 실종사건

빈센트 반 고흐,‘비탄에 잠긴 노인’(1890)

65세 이상 노령자들의 지하철 무임승차제도를 폐지하려던 정부의 계획이 논란 끝에 무위로 돌아갔다. 연금제도를 개혁하려는 프랑스 정부의 시도도 거센 저항에 홍역을 치렀다. 인구의 노령화에 뒤따르는 문제가 무엇이며 노령사회에 잠재된 갈등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노령화는 정년제도와 맞물려 인류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즉,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오래 살면서도 취업활동에서는 일찍 물러나 ‘일하지 않는 긴 여생’을 맞고 있는 것이다. 장수와 정년이 일반화되면서 노후의 빈곤, 실업, 건강 등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노령인구의 건강과 복지를 위한 제도와 정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년에 대한 인식과 태도다. 늙음은 단순히 생물학적 변화만이 아니라 가치와 믿음이 개입하는 사회 문화적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령사회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늙음이란 무엇이며, 노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물음이 빠질 수 없다.

늙음에 대한 인식과 노년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는 역사적으로 변화해왔다. 서양의 경우 근대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질병, 전쟁 등으로 사망률이 높고 기대수명이 낮아 노년을 따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서양 고대나 중세 사람들은 출생, 성장과 마찬가지로 늙음과 죽음을 삶의 각 단계로 명확히 인식하고 별도의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철학자들, 노년은 욕망에서의 자유와 지혜로 인식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에게 늙음은 생성, 쇠퇴, 소멸이라는,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적 질서의 일부였다.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 같은 고대 의학자들은 인간의 노화란 생명의 근원인 열기가 소실(消失)해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여겼다. 인간의 유한성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들은 죽음을 노년과 분리하지 않았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연인으로 젊음이 없는 영생(永生)을 얻은 티토노스에 관한 그리스 신화는 죽음보다 못한 영원한 늙음의 고통을 경고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 실종사건

플라톤 등 고대 철학자들은 늙음을 불안해하면서도 노년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고통을 수반한 늙음을 불안해하면서도 노년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고대 세계에서 노년은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면이 교차하는 이중적이고도 양면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와 플루타르크, 세네카와 플리니우스 등 고대 철학자들의 인식이 그러했다. 그들은 심신의 쇠퇴에 따른 노년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늙음에 욕망에서의 자유, 평정(平靜), 절제, 지혜의 덕목을 부여했다.

고대 그리스의 코미디와 풍자극, 로마의 시문학에서도 노인의 이미지는 이중적이었다. 노인은 추하고 병약하며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노령(老齡)의 네스토르처럼 풍부한 경험과 지식으로 사랑과 존경을 누리기도 했다. 사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년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오이디푸스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보듯 그것은 인생 여정의 정점이요 완결이었다. 부친을 살해한 자신의 정체를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일국의 국왕에서 눈멀고 천한 늙은이로 전락해 냉대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 종국에는 명예와 권위를 되찾고 신탁의 예언대로 죽음을 수용한다.

노년에 대한 중세사회의 인식을 지배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관점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노화에 대한 고대이론을 수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적 요인보다 정신적, 도덕적 원인을 강조했다. 질병, 늙음, 죽음은 신의 계명을 어긴 인간 원죄의 결과라 본 것이다. 그럼에도 노년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고, 따라서 노년에 육체는 쇠퇴해도 정신은 성숙하고 고양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컨대 단테는 육체적 나이를 초월한 정신적 성숙의 가능성을 믿었고, 신중함과 지혜로움이라는 노년의 덕목을 젊음이 지향할 이상으로 여겼다.

이뿐 아니라 중세 사람들은 늙음에서 원죄에 따른 고통과 더불어 희망과 위안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늙음이란 정신의 고양을 통해 참회하고 영혼의 구원을 준비하는 기회였으며, 노년은 오랜 순례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서 신과 영생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다. 이처럼 고대와 중세사회에서 노년은 신의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고, 고통과 아울러 지혜의 원천이며, 경멸과 함께 존경의 대상이었다. 달리 말해 그것은 불가해한 패러독스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으며, 신비한 미스터리였다.

본질적으로 모순을 내포한 이런 노년의 이미지는 근대에 사라졌다. 세속화, 자본주의, 개인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사회의 발전은 늙음과 노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놓았다. 노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의 특징은 노년을 우주의 질서나 신의 섭리보다 인간 의지의 영역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근대 시민계급의 세속적 생활윤리와 결합한 개신교의 가르침이었다.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의 핵심은 ‘좋은 노년’과 ‘나쁜 노년’을 구분하는 데 있었다. 즉 경건, 근면, 절제의 삶을 산 사람은 건강하고 장수하며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반면, 신앙을 멀리한 채 게으르고 문란하게 생활한 사람은 단명하거나 노후에 병들고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좋은 노년’과 ‘나쁜 노년’의 구분이 시사하듯 근대사회는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와 수단만 있다면 건강과 장수도 물질적 재화와 마찬가지로 획득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늙음이 이제 더는 풀 수 없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풀이가 가능한 ‘퍼즐’이 된 것이다. 늙음과 노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작용했다. 생활수준의 향상, 의술과 의료제도의 발전, 주거환경의 개선을 통해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복지국가의 발전에 따라 연금 등 노인복지 시책이 확대된 것이 그 일부다.

사회 발전은 늙음과 노년에 대한 인식 바꿔

노년의 의미와 가치 실종사건

산술적 노령이 반드시 노쇠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1월 5일 서울 마포구가 주최한 제2회 경로당 어르신 정보화 경진대회에서 어르신들이 스승과 제자팀을 이뤄 문서편집 시험을 치르고 있다.

과학과 정책의 기술적, 도구적 관점이 철학과 종교의 의미론적, 가치론적 관점을 대체함에 따라 고대와 중세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결합된 노년의 부정적 속성과 긍정적 속성이 분리되고, 늙음에 대한 태도가 양극화됐다. 그 하나는 노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늙음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며,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는 노년의 물질적 삶을 개선한 근대적 발전의 역설적인 결과다. 이에 따르면 정년과 연금제도, 노인의학과 노인복지 정책 등이 노인을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존재, 돌보아야 할 부담, 보호와 관리의 대상, 해결책을 찾아야 할 ‘문제’ 등으로 보는 태도를 조장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경향이다. 노령사회로의 발전에서 평균수명이 늘고 건강한 노령자가 많아지면서 산술적 연령에 불과한 노령이 반드시 노쇠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즉 의료서비스, 식생활, 운동 등 적절한 방법을 통해 노년에도 젊음과 건강,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대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늙음을 더는 굴복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노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은 한편으로는 노령자를 기피하고 차별하는 경향,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비판적으로 대응하려는 경향을 낳았다. 언뜻 이들은 상호 대립적으로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라는, 노년에 대한 양극단의 태도는 젊음과 활기를 숭배하는 반면 늙음과 죽음을 회피하고 배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결국 근대 이후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노년이 연장됐지만, 정작 노년의 의미와 가치는 사라지고 그 본질은 제거된 것이다. 노년을 아예 무시하거나 단순히 젊음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삶의 의미를 오로지 욕망과 성취의 극대화에서 찾는 것으로 걱정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주간동아 2010.11.22 763호 (p80~81)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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