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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신인류 문화건강족의 걷기 본능-서울 숲길⑦

나지막한 역사의 숨소리…나무친구와 말을 트다

정릉 숲길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나지막한 역사의 숨소리…나무친구와 말을 트다

4월의 끝자락과 5월 초,일주일 새 두 차례나 서울 성북구에 자리한 정릉을 찾았다. 처음엔 정릉 숲길을 취재하기 위해, 다음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 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10여 분을 더 걸어가야 비로소 정릉관리소가 나타난다. 입구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속세와 단절되는 느낌이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나무들과 도원향을 향한 듯 펼쳐진 길 앞에 서면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 시원한 산들바람에 웃옷을 벗어 손에 든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거대한 능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잘 가꿔진 겉모양과 달리 정릉은 우여곡절이 많은 능이다.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처음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됐다. 정동이라는 명칭도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강씨를 끔찍이 사랑한 태조는 강씨 봉분 오른쪽에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마련했다.

원비 신의왕후의 태생인 이방원(태종)은 신덕왕후를 무척이나 미워했다. 살아생전에도 자신의 앞길을 막더니 죽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강씨에게 이방원은 이를 갈았다. 그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씨 소생의 왕자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진 채 현재의 위치로 천장됐다.

정릉을 감싼 소나무 왕권의 영원성 상징

정릉이 복구되고 종묘에 배향된 때는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현종 10년(1669)이다. 이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능 주위엔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왕권의 영원성과 절개를 나타낸다. 소나무는 위로 곧게 자라며 뿌리까지 밑으로 곧게 뻗어 봉분을 헤치지 않는다. 능 앞으로는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 참나무는 종류만 300종이 넘는다. 잎이 굉장히 커 짚신을 갈 때 썼다는 신갈나무, 넙적한 잎으로 떡을 감쌌다는 떡갈나무, 가을 늦게까지 잎을 간다는 갈참나무, 도토리로 묵을 쑤어 수라상에 올렸다는 상수리나무까지 참나무는 그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재미있다.

자작자작한 개울을 건너 비로소 본격적인 숲길에 접어들었다. 물길 따라 올챙이가 머리를 들이밀며 꼬리를 흔든다. 올챙이를 비롯해 도롱뇽, 가재까지 살 정도로 물이 맑다. 하천 주위에는 물을 좋아하는 오리나무가 심어져 있다. 10리(4km)의 절반인 5리마다 심어져 위치를 나타냈다고 전한다.

개울을 따라 10여 분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정심약수터가 나타난다. 정릉 안엔 몇 곳의 약수터가 있지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예전부터 물맛이 좋고 아토피 치료에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맛을 다시며 지나가려 하자 인심 좋은 아저씨 한 분이 바가지를 건넸다. 기분 좋게 물 한 잔 들이켜며 백운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옆으로 이름도 이상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때죽나무. 특이한 이름만큼 유래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하다. 열매껍질을 짓이겨 물에 풀면 독성이 있어 물고기가 죽어 떼로 떠오르기에 그리 불렀다는 설, 열매 모양이 스님의 머리처럼 반지르르한 데다 떼로 몰려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 그리고 수피의 색깔이 검어서 때가 낀 것처럼 보인다는 유래도 있다.

나지막한 역사의 숨소리…나무친구와 말을 트다

1 정릉 앞으로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 각종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 2 정릉 앞 개울은 올챙이, 가재 등이 살 정도로 맑은 1급수다. 3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



땀방울을 씻어주는 벚꽃비에 가슴이 후련

나지막한 역사의 숨소리…나무친구와 말을 트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씻어낼 때마다 벚꽃비가 내렸다. 한창 벚꽃이 피는 시기는 지났지만, 왕벚나무와 산벚나무에서 이따금 내리는 벚꽃비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봄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수백 년을 사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이들 벚나무는 기껏해야 100년 남짓 살 뿐이다. 그 추웠던 겨울날 나목인 상태로 동면을 하다, 이른 봄이 오면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 함박꽃을 피운다. 짧고 굵게 청춘을 불사르는 벚나무의 열정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길의 북동쪽 끝에 다다르면 이제부턴 오르막이다. 10여 분을 올라가자 간간이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마저 아득하다. 고운 모래는 잠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게 만든다.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 곳에서 잠시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했다. 잣나무는 소나뭇과의 일종으로 한군데서 5장의 잎이 나온다. 적송과 달리 잣나무는 학명이 ‘Korean Fine’이다. 잣이 귀했던 신라시대엔 잣나무 두 그루만 있어도 자식들 당나라 유학까지 거뜬히 보냈다고 한다.

인수천을 거쳐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도심 속에서 숲이 지니는 의미로 이어졌다. 김희영 숲해설사는 숲을 ‘휴식처’라는 말로 간단히 정의했다. 특히 나무친구 덕분에 숲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나무친구를 만들어 속 깊은 사귐을 나누세요.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을 이 친구에게 털어놓고 위안을 받는 거예요.”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놀이 상대가 돼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지만, 인간들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무에게 잠시나마 기대고 싶어졌다. 백록담을 지나 출발지에 도착할 즈음 눈앞에 36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들어왔다. 이 나무를 나무친구로 삼아볼까. 행여 다른 사람이 친구로 찜해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죠. 나무어른이죠.”

겸연쩍어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개를 돌리자 참나무 한 그루가 눈짓을 보냈다.

‘그래, 앞으로 네가 나의 친구가 되어줘.’

1시간에 걸친 정릉 숲길의 마지막은 나무친구를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만남의 순간은 짧았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렸다. 다음 주말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5월 2일 일요일 아침 정릉 숲길을 다시 찾았을 때,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한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무친구였다.

Basic info.

☞ 교통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아리랑고개 방향 버스 승차→ 정릉 앞 하차, 10여 분 도보→정릉관리소

☞ 코스

정문→정릉→정심약수→백운정→인수천→백록담→정문, 2.5km

☞ 숲 해설

수~일요일 1차 10시 반~11시 반, 2차 14시 반~15시 반, 3차 16시 반~17시 반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 1차 10시 반~11시 반, 숲 체험 프로그램 14시~15시 반



주간동아 2010.05.10 736호 (p52~53)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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