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5

2010.05.03

억울? 과욕?… 벤처 신화 참담한 몰락

서갑수 전 KTIC 회장 … SBI와 손잡은 내부직원에 경영권 뺏기고 절치부심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입력2010-05-03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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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울? 과욕?… 벤처 신화 참담한 몰락

    서갑수 전 회장은 수많은 스타 벤처기업을 키워냈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 한글과컴퓨터 김영익 대표, NHN 임직원(왼쪽부터).

    “한두 달 전부터 전화도 안 받아요. 아들이 구속됐으니 마음이 많이 쓰리겠죠.”

    전화기 너머로 안타까운 음성이 흐른다. 한국 벤처캐피털의 신화로 불리는 서갑수(63) 전 한국기술투자(KTIC)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동수 듀폰 아시아태평양 고문의 말이다. 그 일이 지나간 뒤 ‘당연한 것들’이 순식간 뒤바뀌었다. 24년 지켜온 회사는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고, 아들은 철창에 갇힌 신세가 됐다. ‘벤처 신화’의 몰락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지난 3월 1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열린 KTIC의 임시주주총회. 회의장 곳곳에는 용역직원 100여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KTIC 측과의 충돌을 우려한 SBI코리아홀딩스(이하 SBI) 측의 조치였다. 표 대결 결과는 SBI의 일방적인 승리. 오랜 경영권 분쟁의 마침표가 찍히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주주의 82.4%가 기존 경영진의 해임에 찬성했고, 신임 경영진 선임에 69.1%가 동의했다. 20년 남짓한 국내 벤처캐피털사(史)의 첫 적대적 M·A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SBI는 일본계 투자금융그룹인 SBI홀딩스의 한국지사.

    외로운 싸움이긴 했지만, 지난 1월까지만 해도 서 회장은 적극적으로 SBI에 대응하는 모습이었다. “외국계의 공격적 M·A를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라며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는 등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패배한 지금 그는 재판 준비 외에는 일절 외부활동을 삼가고 있다. 인터뷰 요청에도 “지금은 얘기를 제대로 할 상황과 기분이 아니다”라며 난색을 표했다.

    “지난해 10월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SBI 측이 경영권 인수를 시도했어요.”



    서 전 회장을 대신해 인터뷰에 응한 정인택 전 KTIC 고문의 말이다. 정 전 고문은 20년 가까이 서 전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 서 전 회장은 지난 3월 아들인 서일우(35) 전 KTIC홀딩스 대표 등과 함께 검찰에 기소됐다. 서 전 대표는 2008년 회사자금과 주식 등 190억여 원을 빼돌려 사업과정에서 생긴 채무를 갚는 등 총 800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고, 서 전 회장은 이 중 308억 원의 횡령·배임에 공모한 혐의다. 서 전 대표는 사채를 끌어들여 모 상선을 인수한 뒤 이 회사에서 250억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정 전 고문은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서 회장 일가에 대한 소액주주의 불신이 컸기에 SBI가 승리한 것”이라며 “악재가 겹쳐 결국 경영권을 찬탈당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NHN, 메가스터디 낳은 벤처계 산파

    ‘서갑수’라는 이름은 곧 국내 벤처캐피털의 역사다. 24년간 KTIC를 경영하며 수많은 벤처기업을 길러냈다. NHN, 한글과컴퓨터, 메가스터디, 마크로젠 등이 그와 손잡고 성장한 스타기업. 2000년 이후 벤처 붐이 꺼지긴 했지만, 벤처계에서 쌓은 그의 노하우와 인맥은 신생기업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천재과’로 알려진 서 전 회장은 서울고 시절 수석을 도맡아 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장학금을 주던 충주비료에 입사했다. 벤처캐피털과의 인연은 회사를 그만두고 새 직장을 찾던 중 찾아왔다. 1981년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현 KTB)에 입사한 것. KTB는 추후 KTIC를 설립한 회사. KTIC는 1986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전문 창업투자사다. 서 전 회장은 KTB에서 쌓은 안목과 노하우로 초대 전문 경영인을 맡은 뒤 1995년 경영권을 인수해 오너 경영인으로 새 출발 했다.

    억울? 과욕?… 벤처 신화 참담한 몰락

    서갑수 전 회장.

    초기 KTIC의 역할은 단순했다. 유망 벤처기업을 발굴하고 자금을 대줬다. 의욕적으로 사업을 키워간 서 전 회장의 노력으로 회사는 기업구조조정, 인수합병, 마케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위기도 있었지만 24년간 KTIC는 뚝심 있게 최초 벤처캐피털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최근 이뤄진 SBI와의 합병은 준비 없이 맞은 일격이었다.

    “지금 분위기는 서 회장 일가를 부도덕한 경영인으로만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SBI와 재무담당 쪽 KTIC 직원들이 경영권 인수를 위해 브로커를 끼고 전문적으로 작업한 부분도 있다. 악의적으로 서 회장에 대한 혐의를 부각하고, 본인들의 잘못은 덮으려고만 한다.”

    정 전 고문의 말이다. “잘못한 부분은 책임지겠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운 부분도 많다”는 얘기다. KTIC와 SBI의 만남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출발은 우호적인 파트너였다. KTIC는 당시 지주회사인 KTIC홀딩스를 설립하기 위해 해외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해외진출이 필수적이라는 사업적 판단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SBI가 KTIC홀딩스에 250억 원을 투자했다.

    투자금 회수에 대한 갈등이 원인

    관계가 삐거덕거린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부터.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KTIC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투자를 약속한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투자를 포기한 것. 그런 와중에 SBI도 투자자금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더니 지난해 10월 SBI 측은 돌연 계획을 변경했다. “부도덕한 경영으로 회사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서일우 전 대표를 해임하고, 주식을 집중 매수해 최대주주로 올라선 것. 한 금융계 관계자는 “서로 생채기 내는 복잡한 분쟁으로 번진 이 사건의 밑바닥에는 투자금 회수에 대한 갈등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 전 회장 부자의 투명하지 못한 경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벤처캐피털계의 첫 적대적 M·A다. 이와 관련 서 전 회장 측은 “M·A는 찬탈이라고 표현할 만큼 안타까운 부분이 많고, 소송 건은 잘못한 부분은 책임지겠다”는 입장이다. 정 전 고문은 서 전 회장의 경영스타일을 들어 검찰 기소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서 회장은 재무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다. 이번에 송사가 걸린 건은 크게 횡령배임과 증권거래법 위반, 두 가지다. 횡령배임은 본인 재산인 회사 주식을 마음대로 유용했다는 것이고, 증권거래법 위반은 홍콩에서 주가조작을 했다는 것이다. 횡령배임은 유용이라기보다 투자 차원이었고, 주가조작은 아들이 주도해서 서 회장은 내용도 잘 몰랐다.”

    서 전 회장은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경영자로 알려졌다. KTIC가 한국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4년간 벤처라는 로또에 투자해온 것은 그래서 가능했다. 하지만 경영권을 뺏긴 원인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세계에서 의욕과 과욕, 불법과 합법은 한 끗 차이. 기업들이 마음먹고 감추려 들면 투자자를 속이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M·A가 이뤄진 사정이야 어떻든 복잡한 경영정보를 악용한 투자자들의 우롱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기업의 화장발’을 알아채지 못한 투자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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