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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낙태의 덫 03

그녀들은 왜 응급피임약 두려워하나

산부인과에서 ‘내진’ 없이 바로 처방 부작용에 대한 과장, 잘못된 인식 여전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그녀들은 왜 응급피임약 두려워하나

“임신 가능성이 있는 날에 성관계를 했군요. 자세한 검진을 원하면 진찰대에 올라가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처방하겠습니다.”

5분. ‘응급피임약’을 처방받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의사는 성관계를 가진 일시, 마지막 생리 시작일, 생리 주기 등을 짧게 물은 뒤 바로 처방했다.

직장여성 김모(33) 씨는 2005년 초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남자친구와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졌다. 다음 날 배란일을 따져보다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씨는 점심시간에 큰맘 먹고 산부인과에 갔다. 오전 내내 불안해하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매우 쉽게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았고, 곧바로 복용했다. 약 복용 후 약간의 메스꺼움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후 김씨는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응급피임약을 복용했다. 2년 전 결혼한 그는 현재 아이가 없다. 김씨는 “예전에 10여 차례 복용한 응급피임약이 임신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또는 약 때문에 장애아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봤지만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낙태 논란이 불거지면서 피임, 특히 불시의 성교에 대처하는 응급피임(또는 사후피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응급피임은 피임 없이 성관계를 가진 이후 임신을 막는 피임법으로, 약으로 복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응급피임약은 고용량의 호르몬제(황체호르몬의 일종인 레보놀게스트렐 1.5mg)로 배란을 방해하거나 수정란의 착상을 차단한다. 산부인과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으로, 약의 종류에 따라 1알 또는 12시간 간격으로 2알 복용한다. 성관계 후 24시간 내에 복용하면 피임 가능성이 95%에 이를 정도로 효과가 좋지만, 48시간 내에 복용하면 85%, 72시간 내에는 58%로 떨어진다.



그녀들은 왜 응급피임약 두려워하나

응급피임약인 노레보원(앞)과 포스티노원.

응급피임약 사용, 전체의 0.8%

국내 최초의 응급피임약 ‘노레보’(현대약품)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1월. 이후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시판 중인 응급피임약의 종류도 노레보원(현대약품), 포스티노원(바이엘쉐링제약) 등 7개로 늘었고 시장 규모도 48억원 정도로 커졌다(2009년 기준). 약 190억원 규모인 일반 먹는 피임약 시장의 4분의 1에 이른다. 바이엘쉐링제약 김혜빈 PM(Product Manager)은 “일반 먹는 피임약이 국내에 들어온 지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응급피임약은 10년이 채 안 됐는데, 매해 시장이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 정도의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매일매일 먹어야 하는 일반 피임약에 비해, 응급피임약은 한 번만 먹으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그래서 한 번 복용한 사람이 재복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렇듯 지난 10년간 응급피임약의 인지도와 활용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울대 성희롱·성폭력 상담소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피임방법으로 응급피임약을 사용한 경우는 전체의 0.8%에 불과했다. 특히 강간 등 응급피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은심 활동가는 “평소 응급피임약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않는 한, 성폭행 피해를 당해 경황이 없는 피해자가 72시간 이내에 산부인과를 찾아가 처방받고 약을 복용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 의약품처럼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에서의 활용도가 오히려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대학생 강모(21) 씨도 “미혼 여성이 산부인과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성관계를 가진 뒤 하루 이틀 고민하다 응급피임약 복용 시기를 놓치고, 다음 생리 때까지 가슴앓이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일반 피임약처럼 산부인과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2008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미국 등 대다수 국가에서는 응급피임약이 의사의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다. 우리도 응급피임약 복용률을 높이기 위해 일반 의약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녀들은 왜 응급피임약 두려워하나

성교육에서 일반 피임법은 물론 응급피임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피임연구회 이임순 회장(순천향대 의과대 산부인과 교수)은 “응급피임약은 다량의 호르몬을 일시에 복용하는 것으로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런 약품을 일반 의약품으로 전환하면 남용할 우려가 있다”면서 “미혼 여성들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산부인과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이나 문화를 개선해야지, 산부인과를 꺼린다고 전문 의약품을 일반 의약품으로 바꾸자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CHA 의과학대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강진희 교수도 “산부인과 진료라고 해서 모두 ‘내진(자궁 입구까지 검진하는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응급피임약의 경우 환자 개인이 원치 않으면 내진 없이 처방한다”고 덧붙였다.

태아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응급피임약에 대한 과장되거나 잘못된 인식도 많다. 응급피임약은 복용 후 속이 메스껍거나 두통 증상이 나타나고 며칠 동안 출혈이 이어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건강한 여성이라면 참을 만할 부작용이며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호르몬제인 응급피임약은 체내에 남아 있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

또 응급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불임이 되거나 장애아를 낳는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는데, 이 역시 호르몬 성분이 몸에 축적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알지 못해 생겨난 오해다. 현대약품 주찬길 주임은 “노레보가 출시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불임이나 장애아 출산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고 신고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면서 “더구나 응급피임약 복용 후 임신한 경우에도 약이 태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의 한 연구소에서 응급피임약을 복용한 후 임신한 여성 36명과 응급피임약을 먹지 않고 임산한 여성 80명을 대상으로 출산율, 낙태율, 자연유산율, 사산율 등을 비교했는데, 두 집단 간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이 밝혀졌다. 또 신생아의 키나 몸무게도 두 집단 간 차이가 없었다. PDR(Physician’s Desk Reference) 자료에서도 “응급피임약 성분이 태아의 성장과 발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단, 응급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몸에 내성이 생겨 피임 효과가 떨어진다. 또한 호르몬 체계가 교란돼 생리가 늦게 시작하는 등 생기 주기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이 회장은 “응급피임약은 말 그대로 ‘응급한 상황’에만 사용해야 한다”면서 “평소엔 응급피임약보다 피임 효과가 확실하고 호르몬 농도가 낮아 부작용도 거의 없는 일반 먹는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상자기사 참조).

성교육에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취재 중 만난 대다수 평범한 여성은 물론, 성폭력예방 단체 관계자마저 응급피임약에 대해 잘 모르거나, 부작용에 대한 과장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없애려면 성교육에 응급피임약 관련 내용을 꼭 넣거나, 응급피임약 복용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피임연구회 이임순 회장

“젊고 건강한 미혼 여성, 피임약 먹는 게 건강에도 좋다”


그녀들은 왜 응급피임약 두려워하나
피임연구회 이임순 회장(순천향대 의과대 산부인과 교수)은 ‘먹는 피임약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먹는 피임약으로 여성 스스로 피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 건강에 도움이 됐음은 물론, 출산과 육아 기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여성의 사회진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먹는 피임약으로는 여성호르몬(에스트로겐)과 황체호르몬(프로게스테론)이 복합적으로 함유된 복합경구피임약과 황체호르몬 단일제제인 미니필이 있다. 한 달 기준으로 21일간 매일 1알씩 피임약을 복용하면, 남은 일주일 동안에 생리를 하는 원리. 따라서 여성 스스로 생리 주기를 조절할 수 있다. 또 먹는 피임약은 일반적으로 배란을 억제하고, 정자가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며, 자궁 내에서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한다.

1960년 최초로 미국에서 시판된 먹는 피임약은 호르몬 함량이 높아 몸의 이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피임약은 여성호르몬 함량을 약 5분의 1, 황체호르몬 함량을 약 10분의 1로 줄인 저용량 제제여서 부작용이 거의 없다. 먹는 피임약은 우수한 피임 효과 외에도 생리통 감소, 자궁내막암 예방 등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표 참조).

이 회장은 “젊고 건강한 미혼여성이라면 피임약을 먹는 게 피임효과는 물론, 건강에도 좋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혈관염, 혈전색증, 뇌혈관 질환, 관상동맥 질환이 있는 경우 △간 기능이 좋지 않은 경우 △유방암이 있거나 의심되는 경우 △진단되지 않은 질 출혈이 있는 경우 △임신 중이거나 임신이 의심되는 경우 △35세 이상 흡연자인 경우에는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선진국 여성들의 먹는 피임약 복용률은 높다(벨기에 42%, 뉴질랜드 40%, 프랑스 36%, 독일 29%, 영국 26% 등). 반면 200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의 피임약 복용률은 1~2%에 그친다. 이 회장은 “피임을 남성의 몫으로 간주하는 여성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건강에 해가 된다는 등 먹는 피임약에 대한 오해 때문에 복용률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먹는 피임약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정리했다.

피임약을 먹으면 체중이 증가한다?

아니다. 과거의 피임약은 호르몬 함량이 높아 체내 수분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고 쌓여 체중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피임약은 소량의 호르몬만 함유하고 있어 체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피임약에 들어 있는 황체호르몬 중 천연황체호르몬과 유사한 드로스피레논이 이뇨작용을 촉진해 체중을 약간 감소시키기도 한다.

피임약을 장기 복용하면 불임이 된다?

그녀들은 왜 응급피임약 두려워하나
아니다. 오히려 피임약을 장기 복용할 경우 여성의 수태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영국 브리스톨대학, 브루넬대학 공동연구팀은 ‘인간생식지(Human Reproduction)’ 2002년 10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과거 피임약을 5년 이상 장기 복용했던 여성들이 사용을 중단한 후 6개월 이내에 임신할 확률을 조사한 결과,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은 비복용군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고 밝혔다. 또한 이 연구팀은 임신한 8000여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피임약 복용을 끊은 후 6개월 이내에 임신했다는 응답이 4분의 3을 차지한 것으로 파악됐다.

‘피임약을 장기 복용하면 불임이 된다’는 속설은 피임약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 오랜 피임으로 산모의 나이가 많아지면서 임신 능력이 떨어져 생긴 오해로 봐야 한다.

피임약을 장기 복용하면 기형아를 낳는다?

아니다. 피임약과 기형아 출산은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것은 이미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서도 확증받은 바 있다. 피임약의 호르몬 성분은 몸에 축적되지 않고, 복용하는 주기에만 작용한다. 복용을 중단하면 정상적으로 생리를 하고, 바로 임신도 가능하며,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응급피임약도 동일한 원리다.

피임약을 먹으면 여드름이 생긴다?

아니다. 저호르몬 함량의 먹는 피임약은 피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피부 개선효과가 있는 피임약도 있다. 싸이프로테론 아세테이트라는 황체호르몬은 모낭에서 안드로겐을 차단해 여드름을 예방하므로 지·복합성 피부에 좋다.




주간동아 2010.03.23 728호 (p60~62)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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