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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흔들리는 자본주의 공자 DNA를 찾아라 08

다시 주목받는 ‘유교 자본주의’

중국 급성장-삼성 세계 1위의 공통분모 … 연고주의 넘어 ‘관계의 철학’ 재발견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다시 주목받는 ‘유교 자본주의’

다시 주목받는 ‘유교 자본주의’

지난 2월5일 삼성그룹 창립자인 고 이병철 선대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축사하는 이건희 전 회장.

#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이 1938년 3월 세운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불과 3만원. 현재 가치로 치면 2억5000만원 정도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지금, 이 회사는 삼성그룹과 한솔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 등 4개 그룹으로 성장했다. 총자산은 무려 346조원에 달한다. 특히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은 지난해 약 200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삼성그룹군의 중추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136조500억원에 영업이익 10조9200억원을 기록하면서 세계 1위의 전자업체로 올라섰다.

# 1980년 세계 교역량에서 중국산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 불과했다. 국내 총생산(GDP)은 3093억 달러로 2조8000억 달러에 육박했던 미국 경제규모의 10%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지난해 중국의 GDP는 4조7577억 달러로 미국(14조2662억 달러), 일본(5조487억 달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일본을 추월해 세계 2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포겔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올해 1월, 2040년에는 중국의 GDP가 123조 달러로 성장해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반면 미국은 전 세계 GDP의 14%, 유럽연합(EU)은 5%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막스 베버의 ‘근대화 이론’ 정면으로 부정

국내 최고 기업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그룹, 경제규모 세계 1위 대국 자리를 눈앞에 둔 중국,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최근 국내외 일부 학자는 그 해답을 ‘유교 자본주의’에서 찾고 있다. 특히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 중국이 해결사로 나서고, 한국이 다른 국가에 비해 빠르게 회복하면서 두 국가의 공통분모인 ‘유교문화’의 역할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커졌다.

‘유교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1980년 초반 두웨이밍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제시했다. 1970년대 일본 경제의 성공요인과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신흥개발도상국인 이른바 ‘아시아 4용’의 경제발전 배경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꼽은 것. 이는 당시 자본주의 발전이론의 틀로 확고히 자리한 막스 베버의 ‘근대화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 태동의 근거를 개신교에서 찾았다. 근검절약을 요구하는 개신교의 신앙생활이 서구의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합리적 자본주의를 꽃피울 수 있게 했다는 것이 베버 이론의 골자다. 반면 유교는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이 이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정론처럼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가 철저히 배척당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두웨이밍 교수의 ‘유교 자본주의’ 이론은 1990년대 중반 국내 학자들에 의해 좀더 심도 있게 연구됐다. 하지만 1997년 한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그동안 주목받았던 아시아 신흥국가들이 IMF 경제위기에 휘청거리자 ‘유교 자본주의’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재벌들의 ‘문어발식 경영’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거나, 정경유착에 의한 ‘정실자본주의’의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비판이다. 실제 이런 비판은 지금도 진보학자들 사이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삼성의 성공과 우리나라의 빠른 금융위기 탈출, 중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다시 ‘유교 자본주의’다.

다시 주목받는 ‘유교 자본주의’

동아시아 16개국 정상이 지난해 10월 태국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했다.

최근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선임된 함재봉 전 연세대 교수는 서구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교문화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국가 중심의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주목했다. 함 전 교수의 이야기다.

“그동안 서양 학자들이 생각한 경제발전 단계이론, 즉 자본주의가 도입되면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개인의 자유의지가 커져 민주사회가 된다는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도 결국 민주화가 되지 않았나. 하지만 싱가포르는 아직도 권위주의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고 있고,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봐도 서양 학자들의 주장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국제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신장시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중국의 체제가 자유민주국가보다 효율적으로 국가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학자들은 굉장히 흥미롭게 보고 있다.”

한국과 대만이 서양 학자들의 경제발전 단계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서구 국가들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함 전 교수에 따르면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신흥국가의 경제발전이나 위기극복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이 국가주의다. 이들 국가 국민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크다.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그 믿음은 더 커진다. 1997년 IMF 때 우리나라 전 국민이 ‘금 모으기’에 동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정서가 강한 것이다.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발전하면서 국가의 역할은 최소화하고 시장과 개인의 자율을 중시한 유럽이나 미국의 정서와는 정반대다.

빠른 의사결정 ‘가족 중심의 재벌경영’

함 전 교수는 “아시아 신흥국가 국민이 경제발전에 국가의 역할이 크고, 여전히 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유교에 뿌리를 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무관치 않다”면서 “유교에는 국가 위기에 여론을 한데 모으고 국민의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문화적 장치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물론 “과거에는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지금은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모순”이라며 비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또 “경제적 측면을 유교라는 문화적 잣대로 설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함 연구원은 이에 대해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에 보여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유교 자본주의의 재평가 가능성을 언급했다.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중국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경제와 금융시스템에 구멍이 뚫려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고, 중국에 채권을 판 돈으로 빚잔치를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금융위기의 핵심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금융에서 가장 큰 허점이 드러난 동시에 중국식 경제발전 모델이 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데 있다. 만약 중국이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면서 계속 발전한다면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고, 여기에서 유교의 역할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평가해야 할 유교 자본주의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덕훈 한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족 중심의 재벌경영’을 꼽는다. “한때 대만 경제를 이끌던 중소 규모의 부품업체가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고, 한국의 가족 중심 재벌경영을 비판하던 소니와 마쓰시다 등 일본 기업도 삼성그룹의 성공을 보고 평가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 교수는 ‘자원의 집중투자’와 ‘빠른 의사결정’ 등을 가족 중심 재벌경영의 장점으로 꼽았다. 독단적인 재벌경영의 폐해도 없지 않지만 글로벌 시대에 잦은 회의로 의사결정이 느린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다.

이 교수는 삼성그룹을 예로 들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계 경제계에서는 삼성의 상호 교차출자방식 등 재벌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높은 고용효과를 나타내자 ‘굿 컴퍼니(좋은 회사)’로 평가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주장하는 유교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혈연 중심의 기업세습이다. 이 교수는 “한국과 중국 또는 아시아계, 화교계 기업은 혈연을 중시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후계자로 삼지 않는다. 반면 일본 기업은 ‘의제적 혈연’을 맺은 양자를 후계자로 내세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혈연과 지연, 학연 등 이른바 ‘연고주의’와 국가의 개입을 유교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꼽는다. 1997년 여름 창간한 계간지 ‘전통과 현대’에 실린 류 교수의 논문 ‘유교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는 당시 국내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논문 내용 중 일부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봉건적 토지귀족의 지배질서라는 장애물을 뚫고 성장해야만 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르주아’는 새로운 사회적 장치들을 필요로 했다. 귀족의 절대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권과 도시, 조합 등 ‘시민사회’의 건설이다. 그러나 유교 국가에 의해 위로부터 도입된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는 서구와 같은 사회적 장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시장에의 진입과 후퇴는 국가의 통제에 의해 결정됐으며, 자본의 축적은 국가의 특혜를 받은 집단에 집중됐고, 노동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훈련됐다. 여기에 혈연·지연·학연이라는 연결망의 역할이 더욱 강화됐다. ‘가족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조직방식의 위력은 한국의 ‘재벌’과 일본의 ‘자이바쯔’라는 기업집단의 구조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동남아시아 경제를 석권하고 있는 화교 기업의 구조에서도 동향이나 친족과 같은 연결망의 중요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네트워킹 강조하며 연고 비판은 말장난

이 논문은 1997년 IMF를 겪으면서 많은 학자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류 교수의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히려 업그레이드됐다. “우리나라는 ‘관계의 철학’이 지배한다. ‘삼강오륜’도 모두 관계에 대한 얘기 아닌가. 이 관계가 바로 혈연·지연·학연 등 연고에서 출발한다. 연고에 의해 민주화가 이뤄졌고, 재벌들에 의해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게 류 교수의 주장이다.

류 교수는 여기에 “근대사회에 개인주의 경향이 강해진 유럽에서는 탈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소통’이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됐다. 하지만 한국은 (연고에 의한) ‘소통’이 역사적 유산인 덕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류 교수는 ‘아이러브스쿨’이나 ‘싸이월드’ 등 연고와 관계를 중시한 인터넷 사이트가 우리나라 누리꾼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원인도 바로 ‘연고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류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도 총장이 최근 졸업생들에게 졸업 후 네트워킹을 가지라고 강조했는데, 네트워킹이 바로 연고다. 일부 학자가 네트워크의 필요성은 강조하면서 연고를 비판하는 것은 말장난”이라면서 “앞으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하면 유교문화가 도움이 됐으면 됐지 그것 때문에 손해 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2010.03.23 728호 (p46~48)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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