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8

2010.03.23

우리의 잃어버린 몸통을 찾아서

21세기 대한민국 공자의 부활 … 이제는 서구문명 떠나 전통 보듬어야

  • 김성기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장 skkukim@dreamwiz.com

    입력2010-03-17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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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잃어버린 몸통을 찾아서

    중국에서 영화 ‘아바타’와 신경전을 벌인 ‘공자’의 한 장면.

    “여왕폐하 만세!” 2010년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는 여왕폐하가 됐다. 그의 눈물에 국민의 50%가 함께 울었다. 우리에게는 또 한 명의 여왕폐하가 있다. 바로 유관순이다.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인구의 10분의 1인 200만명이 넘었고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 등 각국에 직간접 영향을 미쳤다. 그때 현장중계가 있었다면 아나운서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유관순 여왕폐하 만세!”

    두 여왕폐하는 석연찮지만 벗어나지 못했던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늘 스스로 바닥에 던지는 자기비하에 신음했다. IMF로 경제주권을 상실한 1997년, 우리는 또 국제적 조롱거리가 됐다.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을 거듭하고 환란을 당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세계적 문명사가 기 소르망은 “한국은 고유한 문화의 변별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와 유관순뿐 아니다. 아시아부터 아랍, 북남미의 안방까지 당당히 꿰찬 대장금도 있다. 밴쿠버의 영웅부터 3·1운동에 참가한 기생까지 합세해 무언가를 이룬 국민 모두가 금메달감이요, 여왕폐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의 게임이 끝난 뒤 천주교 성호를 그으며 빙판으로 나아갔고, 유관순은 치마저고리에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대장금은 산소 같은 조선 여인의 기개를 널리 알렸다. 동떨어져 보이는 이들 간 공통의 이미지는 어디서 비롯한 걸까.

    ‘유교적 기독교인’과 ‘유교적 불교인’

    이런 다름 사이의 같음, 혼란 속의 정돈은 이미 세계 종교학자들에게 감지된 바 있다. 한국은 500개의 종교가 섞인 다종교사회다.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신자가 1000만명이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종교적 충돌은 거의 없다. 세계종교사적으로 계시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교, 전통종교가 만날 때는 예외 없이 큰 충돌이 일어났다.



    저명한 종교학자 줄리아 칭은 이런 한국의 종교현상을 연구한 결과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와 불교 사이 완충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인을 ‘유교적 기독교인’으로, 불교인을 ‘유교적 불교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와 관련 “내 생활과 삶의 방식은 유교적이다”라는 질문에 기독교 성직자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 90%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다. 아리송한 공통분모의 정체는 바로 유교였던 것이다.

    참으로 긴 세월 우리는 방황하고 살았다. 우리 것을 무조건 버리기도 했고 맹목적으로 서구의 것을 좇은 적도 있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 ‘문명의 위기’는 시대의 유행어로 자리매김했다.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인성 타락 등이 구체적 근거가 됐다.

    현대의 지성은 이런 한계를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당위성과는 별개로 감을 잡지 못해 헤매는 분위기다. 서양의 한 철학자는 서구문명사가 종말을 고한 것으로 보고 “새로 창출되는 문화종합은 이제 서양적인 것, 유럽적인 것, 아시아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 돼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ET 철학’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철학이 가능하겠는가. 그저 새로운 철학을 기다리며 허둥대는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궁색하다. 얼마 전 내한한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주장에 일침을 가했다. “유교, 불교 등 풍부한 문화적·이론적 전통을 가진 한국이 왜 밖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가? 더 이상 한국의 미래를 외국에서 찾지 말라.” 우리의 ‘서구 닮기’ 꿈이 어리석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치는 말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몸통을 찾아서

    유관순 열사(왼쪽)와 김연아 선수는 한민족의 자신감을 일깨웠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을 강조하는 말이다. 물론 균형감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날개의 좌우를 다지기 전에 몸통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몸통 없이 날개만 있는 새는 날 수 없다.

    필자는 진보인 사회주의와 보수의 자본주의가 좌우 날개라면, 그 몸통은 유교라고 본다. 최근 공자의 부활을 알리는 소식이 도처에서 날아든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중국 전역에 상영된 영화 ‘공자’다. 지난해 3월 뮤지컬 ‘공자’가 무대에 올랐고, 올해 상반기에는 CCTV가 드라마 ‘공자’를 방영할 예정이다. 중국에서는 바야흐로 공자 열풍이 불고 있다.

    ‘여왕폐하’와 ‘군자’의 DNA

    하지만 다시 돌아온 공자는 부활의 초두에 만만찮은 상대를 만났다. 2010년 초 중국 당국은 세계적 화제를 모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 상영을 허가했다. 예상치 못한 인기 바람이 불었고, 당국은 뒤늦게 억제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기세는 꺾지 못했다. 이에 당국은 행정수단을 통해 ‘아바타’를 3D판만 상영하게 하고 대신 영화 ‘공자’를 올렸다. 이 내막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중국 전역에 퍼졌고, 누리꾼들은 부당한 조치에 항의해 ‘공자’ 관람 거부운동을 벌였다. 저항은 격렬했다. 상하이에서는 고작 수백 장의 표만 팔렸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수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

    누가 공자의 부활을 욕되게 하고 유학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가. 21세기에 공자는 국가 이데올로기나 봉건통치자의 전유물을 꿈꾸지 않는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나 가진 자만을 위한 철학이기도 거부한다. ‘아바타’에 대응하는 문화 충돌의 선봉장으로 서겠다는 바람은 더더욱 없다.

    마오쩌둥은 줄곧 ‘유교문화=종법사회=봉건’이라는 도식 타도를 외쳤다. 그래서 문화대혁명 시기 ‘봉건종법의 사상과 제도’로 규정된 유교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 오늘날 당시의 공자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공자 부활을 목도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과 같은 ‘관방유교’에 의한 공자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삶 속에서 체득한 유교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는 부활이다. 후자의 부활은 유전자 속 유교 DNA를 발견하고, ‘여왕폐하’였던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군자’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온전히 되살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오늘 왜 다시 유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것이 우리의 잃어버린 몸통을 찾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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