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1

2009.11.17

성공회 신도들 엑소더스?

교황청 “문호 개방” 발표에 英 성공회 위기감 … 국교(國敎) 위상 추락할까 ‘전전긍긍’

  • 런던=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9-11-11 1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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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20일 로마 교황청과 영국 성공회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성공회 내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원하는 사제와 신자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두 종교 간 벽을 허물겠다는 것이다. 또한 16세기에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성공회가 지난 수백 년간 유지해온 전례 방식을 가톨릭 내에서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도 했다. 이를 위해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에게 기존 가톨릭의 지역별 교구체계와 다른 별도의 독립 교구를 허용하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사제 결혼 등 보수-개혁파 수십 년 갈등

    얼핏 보면 이번 조치는 두 종교 간 화해와 통합을 위한 제스처로 비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영국 성공회 내에서 로마 가톨릭을 향해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온 보수파 그룹의 요구를 교황청이 전격 수용함으로써 성공회의 분열을 부추겼다는 분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영국 언론들은 이날 전 세계 성공회 조직을 대표해 기자회견장에 나온 로언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웠다고 전했다.

    그동안 성공회 내에서는 성직자 결혼 문제, 여사제 허용 문제 등을 놓고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이 수십 년간 지속돼왔다. 1990년대 영국 성공회가 여사제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반발하며 사임하겠다고 나선 사제가 400명이 넘을 정도로 이 문제는 인화성이 큰 이슈로 존재해왔다. 잘 알려진 대로 가톨릭과 성공회 간 갈등의 근원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성공회를 세운 인물은 당시 국왕인 헨리 8세. 그는 1534년 자신의 이혼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과 대립한 끝에 종교개혁을 내세우며 독립해 영국 성공회를 세웠다. 가톨릭과 한 뿌리를 갖는 영국 성공회는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체성사나 고해성사 같은 전례를 따른다. 주교라든가 사제, 부제 같은 직책도 두고 있다. 지금까지도 두 종교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유지돼온 것이다.



    게다가 가톨릭과 성공회는 30∼40년 전부터 종교 간 공감대를 넓히기 위한 대화를 이어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그동안 꾸준히 교회일치를 위한 캠페인을 벌인 인물이다. 그런데 교황청의 이번 발표로 이러한 조심스런 대화 노력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고 성공회 주류 측은 걱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황청이 성공회를 따돌리고 ‘신자 빼내가기’에 나섰다는 시각이 우세한 것이다.

    특히 교황청의 이번 발표를 성공회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가 불과 2주 전에 뒤늦게 통보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캔터베리 대주교도 최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신이 배제됐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성공회 측 인사들이 교황청의 이번 발표를 막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는 후일담도 흘러나온다.

    일부 언론은 “로마 교황청이 성공회 앞마당에 탱크를 진주시켰다”는 자극적인 표현까지 동원하며 가톨릭과 성공회의 해묵은 갈등을 들춰내고 있는 지경이다. 이에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인 조지 캐리는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이 문제에 대해 교황에게 직접 항의하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공회 내 보수파 그룹이 교황청 지원사격에 나섰다. 여사제 임명 반대운동을 벌여온 보수파 그룹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교황청의 발표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사제 1000여 명 가톨릭 개종 예상

    이번 조치가 이처럼 성공회 내부의 분열과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은 또 있다. 바로 영국 내 가톨릭 신자 수가 최근 몇 년 사이 꾸준하게 증가하면서 성공회를 따라잡을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초 기독교연구소가 전국 3만7000개 교회와 성당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매주 일요일 미사에 출석하는 가톨릭 신자가 86만명으로 성공회 신자보다 많다. 이는 폴란드 등 가톨릭 신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동유럽국가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성공회는 여전히 영국의 국교로서 탄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국민들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대단히 크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젊은 시절 가톨릭 신자였지만, 총리 재직기간에 이를 드러내지 못한 채 가족과 은밀하게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총리 퇴임 이후에야 가톨릭으로 개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성공회는 영국 사회의 전통적 종교로서의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성공회의 위상이 크게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나설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가 얼마나 될 것이냐다.

    성공회의 본산은 영국이지만, 사제와 신자는 미국 캐나다 호주 할 것 없이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성공회 내 보수파 그룹은 이번 교황청 발표에 따른 집단행동을 할지 여부를 내년 2월 결정한다는 방침. 그러나 영국 언론들은 줄잡아 1000명 정도의 전 세계 성공회 사제가 가톨릭으로 옮겨갈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들과 함께 옮겨갈 신자 수까지 합치면 예상치 못한 ‘종교 대이동’이 될 수도 있다.

    이번 발표가 성공회 내분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를 교황청이 모를 리 없다. 기자회견장에서 교황청을 대표해 나온 레바다 추기경은 “이번 조치로 성공회가 고사할지도 모른다”는 기자의 말에 ‘노코멘트’로 대응했다. 조만간 로마를 방문할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와 내년 중으로 영국을 찾을 예정인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각각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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