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3

2009.07.07

천재 1명이 100만명 먹여 살린다고?

과학기술 ‘천재론’의 함정 … 지식 ‘노동’ 없으면 뛰어난 ‘한 방’ 불가능

  • 박상욱 scieng.net 운영위원 sangook.park@gmail.com

    입력2009-07-01 12: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람들이 과학기술인에 대해 갖는 오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구원들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초현대적인 실험실에서 새하얀 가운이나 특수 복장을 하고 인류 발전을 위한 연구에 땀을 쏟을 것이라는 생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 같지 않다.

    연구원들에게 연구실은 월요일 아침이면 출근 스트레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고, 쪼아대는 상사와 엄벙덤벙한 후배가 괴롭히는 직장이나 다름없다. 대개는 갖가지 기계가 상전이고, 인테리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공간에서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일한다.

    지루하고 무익한 회의 석상에 앉아 있어야 하고, 제안서와 보고서에 치여 그렇고 그런 페이퍼 작성으로 밤을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다. 대기업, 중소기업, 정부출연연구소, 대학 다 마찬가지이고 동서양 구분 없고 선진국도 피차일반이다. 대다수 과학기술인의 삶은 일반 샐러리맨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하는 일도 다른 것 같지 않다.

    특출한 능력 지녔지만 병아리 후배

    과학기술인은 늘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되기도-또는 그래야 한다고 강요되기도-한다. 하지만 연구개발이란 실제로는 수많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서 무언가를 개선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인지하고 나면, 조금씩 바꿔보기도 하고 논리적 이유도 없이 이것저것 해보기도 하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



    번뜩이는 영감과 천재적인 능력으로 ‘한 방’에 이뤄지는 일이란 거의 없다. 대단히 성공적인 과학 이론이나 기술적 도약도 결과론적인 것이다. 그것들이 세상에 나오고, 전문가 커뮤니티의 동의를 얻고, 공고화하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거나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과정은 많은 노력과 시간, 약간의 행운이 필요한 누적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이다.

    사람들은 과학기술 영재의 등장을 기대한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고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학위를 마치는 사람에게 열광한다. 이런 영재 1명이 평범한 샐러리맨에 불과한 연구원 수천명보다 낫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과학기술 분야엔 특출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정말로 있다. 가끔 자괴감이 들 정도로, ‘선천적으로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저 부러움 비슷한 것이다. 영재급의 대학원 신입생도 박사과정 말년차 선배에게는 ‘갈 길 멀고 가르칠 것 많은’ 병아리 후배일 뿐이다. 이 병아리가 선배보다 IQ가 높고 수학문제를 더 빨리 풀어낼지 모르지만, 그 분야 연구에서 세월과 고생이 선사한 ‘내공’만큼은 선배를 따라갈 수 없다(‘내공’이라는 말은 무협지 용어를 패러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연구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연구자끼리는 고수를 한눈에 알아본다).

    물론 습득 능력이 출중할 것이다. 하지만 실험 기자재 하나하나의 작동법과 고장 시 대처법, 하다못해 시약 정리 규칙까지 가르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영재에게 그런 것 시키지 말고 중요한 아이디어 구상하게 놔두라고? 과학기술과 연구개발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그런 것들’을 모르면 연구 자체를 할 수 없고, 동료들과 소통할 수 없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의 소재도 고갈된다.

    혼자 창밖을 응시하며 고매한 구상만 하고 월급을 챙겨가는 과학기술인은 없다. 연구도 사회적인 활동이다. 사람들과의 작용과 반작용이 중요하고, 심지어 무생물인 것들도 연구자와 상호작용을 한다.

    연구개발은 창조적인 작업이라 여겨지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기존의 성취, 즉 수많은 과학기술인이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올린 노력의 결과물을 기반으로 해 부가적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런 부가가치는 반드시 ‘창조적 활동’에 의한 것일 필요도 없다. 실상 연구개발의 결과 얻어지는 부가가치는 지식노동의 결과이고, 지식자본과 실물자본이 투입된 결과다.

    모든 연구개발 활동에는 돈이 들고, 전문지식을 갖춘 연구인력이 필요하다. 연구개발 활동의 산물로서 과학 지식 스톡의 증대나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이런 투입요소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투입요소가 많을수록 생산물도 많다는 것이다(여기서 ‘많다’는 것은 질과 양을 포괄한 것이다).

    10만명 지식노동자가 실질적 이득

    세계 각국은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는 일에 경쟁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 지난 30년간 연구개발 투자가 줄어든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납세자와 세금 지출자들이야 연구개발의 실효적 성과를 확실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모호성 때문에 의구심을 품기도 하겠지만, ‘우리만 연구개발 투자를 줄일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연구개발로 생기는 부가가치를 인정하는 셈이다.

    물론 재정적 투입요소뿐 아니라 지식자본의 투입도 중요하다. 지식이 연구개발 활동을 통해 부가가치로 바뀌니 지식도 자본이다. 그런데 지식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고, 화폐가치로 환산하는 방법도 현재로서는 없다. 도서관 장서 수, 특허 개수, SCI(과학기술색인)급 저널에 발표된 논문 수 등 모두 마뜩잖다. 가장 중요한 지식 스톡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다.

    물리적 자원과 달리 지식 스톡은 사람 수대로 확장 복제될 수 있는 무형, 무질량의 것이다. 쉽게 말해 한 사회에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의 지식 스톡이 큰 것이며, 그런 사람들을 지식노동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지식이 자본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졸자 수, 석·박사 학위자 수, 연구원 수 등으로 사회의 지식 스톡이나, 국가나 기업의 지식자본 보유량을 가늠할 수 있을까? 실제로 과학기술의 경제학이나 정책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지표들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머릿수로 그들이 가진 지식의 양과 질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다만 그 ‘머릿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과학기술 연구개발 활동이란 대형 아이디어 한두 방만을 좇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작은 노력, 즉 반복되는 실험과 개선, 기자재 수리, 일상적인 행정업무, 생각의 공유와 전파, 그리고 결과물을 혁신으로 구체화하는 후속 작업 등으로 이뤄진다. 지식자본은 지식노동에 의해 비로소 경제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머릿속에 들어만 있어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 일을 해야 한다.

    훌륭한 과학기술인을 많이 양성해야 하는 이유는, 로또 복권을 많이 살수록 당첨 확률이 높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수만명의 과학기술인 중 몇 명의 천재를 골라낼 수 있으면 성공이라는 식의 접근은 피해야 한다. 과학기술인은 일꾼이다. 일 잘하는 사람이 많아야 좋다는 것은 상식이다. 진짜 대단한 천재가 있다고 치자. 그의 생각을 과학 이론이나 혁신 기술로 현실화하려면 수많은 동료가 필요하다.

    그 천재라는 것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 지식의 기반 위에서,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 방에 적을 섬멸하는 슈퍼 폭탄이 있다고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을 운용할 인력이 있어야 하고, 실어 나를 운반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위협해 적국의 항복을 받아냈다면, 하다못해 점령한 관공서에 보초 세울 아군 병사라도 필요한 법이다.

    ‘1명의 천재’를 강조하는 슬로건은 “1명에게 보상을 몰아줄 테니 천재가 돼보렴”이라는, 언덕 위에 금덩이 1개 놓고 언덕 아래 일꾼들에게 밥도 제대로 안 먹이며 경쟁만 부추기는 꼬임과 다를 바 없다. 1명의 천재를 노리기보다 십만명의 양질의 지식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그것이 현대 연구개발 활동의 본질에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이득을 키우는 방향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