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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절정기와 쇠락기의 겹침 현상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국가 절정기와 쇠락기의 겹침 현상

국가 절정기와 쇠락기의 겹침 현상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로마시민권자는 축제일마다 이 같은 검투사 경기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로마로 통하게 한 ‘세계 제국의 비조’ 로마의 굴기(·#23835;起·떨쳐 일어남)는 개방성, 관용성, 도로망 인프라 구축, 문화·종교·종족의 용광로, 법치주의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가능했다. 그런데 브리태니커 편집장이었던 찰스 반 도렌은 ‘지식의 역사’(고려문화사)에서 로마의 실용주의를 로마 굴기의 첫 번째 원동력으로 본다. 로마는 그리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추상적인 것을 갈구하는’ 그리스와는 달랐다는 해석이다.

먼저 그리스 철학이 추상적인 이데아만 추구한 데 비해, 로마는 국가 운영에 아주 기능적인 법에 열중했다. 로마 군단은 기원전 450년경 성문화된 12표법을 브론즈 평판에 새겨 정복한 도시마다 세웠다. 이 법은 ‘위대하거나 작은, 부유하거나 가난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법 절차도 그리스 철학처럼 복잡하지 않아 모든 시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유스티아누스(재위 517~565년)의 법전은 서양법의 기초가 된 실용적인 법이다. 플라톤의 ‘국가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념이 크고도 고상한 반면, 키케로의 의무론은 작은 생활의 규칙을 다뤘음에도 이해하기 쉽고 따르기 쉬운 수신제가였기에 제도화된 국가교육의 틀이 될 수 있었다.

로마제국도 수많은 쇠락 요인으로 서서히 무너져

또한 로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개발한 아카데믹한 교육체계를 수사학이나 웅변술 코스 정도로 떨어뜨렸다. 설득적인 연설 방법이 사업과 정치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상아탑의 아카데미즘을 직업교육센터의 커리큘럼으로 바꾼 셈이다.



로마의 전쟁관도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게 최선(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는 ‘손자병법(손무)’의 실용성과 닮아 있다. 도시국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인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고 일정 기간 원로원을 위해 싸우면 땅과 곡식을 주었다. 부의 많고 적음을 떠나 로마시민끼리는 ‘로마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동등하게 여기도록 했다. 그러자 스페인, 북아프리카, 이집트 등도 전쟁보다 로마시민권을 원했다. 당연히 로마는 피를 흘리지 않고 그들을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정복민에게 도로 건설하는 법을 가르쳐 제국 통치이념이 잘 전파되게 하고, 수도관으로 멀리 있는 산이나 하천에서 물을 끌어와 주요 도시 인구의 한계를 없앤 것도 실용주의의 극치였다.

그런데 이렇게 실용의 꽃을 피운 팍스 로마나가 쇠망한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가들은 흔히 로마제국이 쇠망한 원인으로 ‘지도자층의 부패와 타락’ ‘야만족의 침입’ ‘기독교의 정치세력화’ 등을 든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청미래)에서 “방대한 구조물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요인이 결정적 국면으로 작용한 게 아니라 수많은 요인이 쇠락이라는 인연의 사슬에 얽혀 변증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번은 로마제국의 최전성기를 쇠망의 시작이라고 보고, 이른바 팍스 로마나가 실현된 5현제 시대부터 기술하면서 180년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을 위대한 로마 종말의 시초로 본다.

시오노 나나미 또한 ‘로마인 이야기’(한길사)에서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죽을 때까지 드넓은 제국을 순행했던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년) 황제 등 5현제가 위대한 로마라는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들은 안정될 때 위기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지적한다.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나 ‘절정기와 쇠락기 겹침 현상’을 역사기술에서 최대의 테마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 5현제 시대 이후 위기로 치달은 로마제국의 여정은 날개 없는 긴 추락이었다. 5현제의 뒤를 이은 철학황제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는 금욕과 극기로 일관한 수도자적 황제였지만 황비 파우스티나의 부정과 전횡을 자기만 모른 채, 그녀를 가장 정숙한 아내라고 믿을 정도로 아둔했다. 철학자 세네카도 네로(재위 54~68년) 황제가 방탕한 생활에 빠져야 자신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기에 수수방관했다. 또 군인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부터는 73년간 모두 22명의 황제가 1년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친위대를 네 배로 키운 세베레스 황제 이후에는 친위대가 정변을 통해 황제를 식은 죽 먹듯 갈아치웠다.

외부 공격보다 정치적 질병이 심장부 공격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검투사 황제 코모두스는 영화에서처럼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에게 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폭정에 기겁한 누이 루킬라와 원로원이 암살을 공모했다. 국정엔 관심이 없고 쾌락에 탐닉했던 코모두스의 예처럼 로마는 빵과 서커스 때문에 망했다고도 한다. 밀을 무료로 제공해주는 ‘소맥법’으로 인해 17세 이상의 로마 거주 시민권자 태반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게다가 로마시민권자는 축제일에 각종 투기와 연극 공연을 무료로 관람했는데 카이사르 시대에 56일, 5현제 시대에 120일, 5세기엔 175일이 노는 날이었다.

또 4세기부터 로마는 건강, 다이어트 그리고 웰빙 운동에 신들렸다. 교회, 사원, 도서관, 법정보다 목욕탕, 헬스클럽, 극장, 서커스장(콜로세움) 등에서 소비와 오락에 탐닉했다. 심지어 소비를 위해 얻은 빚을 갚지 않는 게 고상한 개똥철학으로 존경받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풍요가 퇴폐와 부패를 불러온 것이다.

반면 농부들의 삶은 기나긴 군역과 무서운 조세로 황폐해져갔다. 그들은 거지가 되거나, 지주들에게 고용된 농노로 변해 노예들과 함께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일에 흥미를 잃은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싸움에는 나설 용기가 있었지만 야만족과는 싸울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기번은 기독교가 로마 쇠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내세신앙에 몰두하는 만큼 사회적 적극성이 약화되고, 종교파벌 싸움에 기댄 황제 또한 전선으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영적이던 초기 교회도 부유하고 강력해지자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이때쯤 야만족이 변방을 두드렸다. 하지만 로마 본토인의 군대는 더는 없었다. 몇몇 이방인을 용병으로 썼지만 그들은 동족과 싸우는 경우가 많아 전투에서 관대하기 일쑤였다. 특히 4세기 훈족의 서진으로 인해 다뉴브강의 고트족을 비롯한 반달족, 부르고뉴족, 동고트족, 알레마니족, 프랑크족 등의 대이동은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251년 데키우스 황제, 378년에는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과 싸우다 죽었다.

결국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동로마제국은 15세기까지 지속됐다. 기번은 국경선의 길이가 긴 서로마가 그만큼 군비로 인한 재정 압박이 심해 더 일찍 망했다고 진단하면서도 ‘종교와 지도층의 수준 저하’가 로마제국 쇠망의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제국은 외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정치적 질병이라는 심장부의 출혈로 쓰러졌다는 말이다.

중국 역사상 최전성기였던 청나라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강건성세(康乾盛世)도 환관 화신(和?)의 부패로 ‘전성기·쇠락기’의 조종이 함께 울렸듯,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밝고 태양은 오후 2~4시에 가장 뜨겁게 빛난다. 굴기와 쇠락은 이렇듯 겹치게 마련인가 보다. 그래서 기번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년), 나폴레옹전쟁(1797~1815년)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굴기한 영국에 교훈적 메시지를 주기 위해 1776년부터 12년에 걸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지 않았을까.



주간동아 2008.03.11 626호 (p90~91)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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