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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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디 자유로운 잡놈 돈 없는 세상서 사는 연습”

  • 정현상 기자 doppleg@donga.com

    입력2007-08-22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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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본디 자유로운 잡놈 돈 없는 세상서 사는 연습”
    점심때 서울 서교동 주택가에 자리한 ‘문턱 없는 밥집’에 갔다. 17년 전 ‘변산공동체’를 세운 윤구병(64) 씨가 기획한 밥집이다. 변산공동체, 홍성유기영농조합 등에서 유기농 식재료를 가져다 저렴한 가격에 도시민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이어서 알음알음으로 회자되고 있는 집이다.

    그야말로 ‘문턱’ 없는 식당을 들어서자 운영자인 신혜영 대표가 “여기서 빈 그릇 운동 하는 거 아시나요?”라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간단한 설명이 이어진다. 조금이라도 남기면 벌금이 1만원이란다. 비싼 유기농 식재료 때문에 비빔밥 한 그릇의 원가가 5000원이지만, 도시 서민을 위해 밥값을 2000원부터 받고 있다고 한다.

    사발을 들고 밥을 푸는데 조금 많이 퍼 담았다. 잡곡밥에 반찬은 콩나물, 가지무침, 묵은 김치, 상추절임 네 가지. 여기에 매운 고추와 강된장으로 버무리자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숭늉으로 그릇을 깨끗이 닦아 마시고 설거지한 것처럼 반짝반짝하는 밥그릇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딱 먹을 만큼만.’

    식당 입구에 적힌 이 글귀가 상징하는 바가 참 크다. 한 해 15조원어치의 음식쓰레기가 버려지는 세상. 식당에서 가정에서 음식을 줄여간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돌아오는 이익도 커질 것이다. ‘문턱 없는 밥집’이 정토회에서 시작해 100만명 이상이 참가한 ‘빈 그릇 운동’에 동참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식당 옆에는 재활용품과 변산공동체에서 만든 미숫가루차, 백초효소차 등을 파는 ‘기분 좋은 가게’가 있다. 이곳은 또 농촌이 유기농산물을 도시에 공급하는 직거래 가게 구실도 한다.

    대학교수 생활 접고 95년 농사꾼 변신

    ‘가난한 유기농가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취지로 이 밥집과 재활용 가게를 기획한 윤씨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전남 함평 태생인 윤씨는 아홉 번째 태어난 아들이라고 해서 이름이 ‘구병’이다. 넝마주이 공동체로 유명한 윤팔병 씨가 그의 바로 위 형이다. 서울대 철학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한국브리태니커 회사를 다니면서 어린이책 기획에 눈떴고, ‘뿌리 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81년엔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됐고 88년 보리출판사를, 89년에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만들었다.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혈안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직을 15년 만에 마감하고, 1995년 전북 부안군 변산으로 농사지으러 들어갔다. 그가 세운 변산공동체는 지금 20여 가구 50여 명이 느슨한 지역공동체 형식을 유지하며 논 7000평과 밭 8000평을 일구고 있다.

    그는 평소 인터뷰를 청하면 3박4일간 변산공동체에서 같이 일하며 지내야 허락해준다. 그런데 기자는 운 좋게도 그가 변산과 서울을 오가는 동안 ‘삼고초려’한 끝에 인터뷰 기회를 얻어냈다.

    -공동체 생활은 어떻습니까.

    “종교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단지 같이 일하고 나누는 아주 느슨한 형태의 생활공동체입니다. 초기에는 저도 긴장해서 징을 치면 일어나고, 밥 먹고 일하는 시간을 정해두는 등 엄격한 규칙을 정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밥 먹는 시간만 같이 지키고, 저녁시간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갖습니다.”

    - ‘문턱 없는 밥상’을 사람들이 신기해합니다.

    “희망의 싹을 봅니다. 유기농 농사도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판로를 찾지 못하는 농부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동네에도 웰빙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서민들도 쐬어야 한다는 생각에 밥집을 기획했어요. 고생하는 농민들이 유기농산물을 건강관리를 잘 못하는 도시 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도시와 농촌 간 연대를 돈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업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남는 게 있는지요.

    “나는 본디 자유로운 잡놈 돈 없는 세상서 사는 연습”

    ‘문턱 없는 밥집’ 운영자들과 윤구병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비빔밥 한 종류만 파는 점심만으로는 어려워서 저녁에는 삼합, 버섯전골, 부추전 등의 안주에 술을 팔아 보충하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가게’도 넝마공동체 하는 형님이 옷가지를 저렴하게 제공해주고 관계자들이 열심히 하는 덕분에 전망이 좋다고 합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이곳에서 생기는 재원으로 지역공동체에서 어렵게 사는 분들, 거동이 불편한 이들, 고통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유기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집이 들어선 5층짜리 건물은 보리출판사가 그동안 모은 공익기금으로 마련했다. 여기에는 민족의학연구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사무국, 토박이출판사도 자리잡고 있다. 모두 그가 지대한 관심을 쏟는 곳들이다.

    밥집과 재활용 가게를 출범시킨 뒤로 그가 서울 토박이출판사에 머무는 일이 많아진 것은 그동안 미뤄왔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중국과 북한, 남한의 민간요법과 한의학을 집대성한 의료백과대전서와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우리말 사전인 ‘남북 어린이가 함께 볼 수 있는 초등 국어사전’(가제) 출간이 그것이다.

    “5년 뒤면 ‘동의보감’이 세상에 나온 지 400년이 됩니다. 이후 지금까지 국가가 국민을 위한 의서를 낸 적이 없었어요. 직무유기를 한 셈이지요.”

    우리말 초등 국어사전은 아이들 교육에 열심인 그가 특히 애착을 갖는 책이다. 일본, 옌볜 등지를 다니며 취재를 해왔지만 워낙 힘든 작업이라 2005년 12월로 계획했던 출간일이 1년 반이나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농사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대학교수의 손이 아니다. 뭉툭하고 마디마다 옹이가 져 있으며, 손톱에는 공동체 부역하다 생긴 쪽물이 얼금얼금 남아 있다.

    “1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이 하던 방식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벼 보리 밀 콩 옥수수 등 주곡 위주의 농사입니다. 퇴비를 직접 만들어 쓰고 화학비료나 제초제를 쓰지 않습니다. 비닐도 쓰지 않습니다. 단, 경운기를 쓰는 것은 다르지요.”

    -유기농을 하면 소출량이 많이 떨어지지 않나요.

    “당연하지요. 그러나 GNP 5%만 성장해도 대단하다고 하는데, 곡식 한 알을 뿌리면 수천 알을 만들어내는 게 자연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씨 뿌리고 김매주면서 흙이나 바람, 비가 24시간 하는 일을 조금 거들 뿐이지요. 정말 자연 앞에선 옷깃이 여며집니다.”

    대학에 재직했다면 그는 내년 2월 정년 퇴임한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자신이 관여해온 일들에서도 ‘퇴직’하고 젊은이들에게 미루고자 한다.

    “본디 자유로운 잡놈이었으니까 그 본질을 살려서 살겠습니다. 어디 매이고 싶지 않아요. 올해 다 정리할 계획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돈 없는 세상에서 사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빈자와 부자가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는 것은 권정생 선생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누구나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임금노예제에서 해방되는 세상을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 꿈을 꾸는 공동체가 늘어나면 사회도 그것을 닮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영락없는 농부의 말투로 “이야기 나누는 게 서툴고 낯을 가려서…”라며 경계하는 표정을 늦추지 않던 그가 인터뷰를 마칠 무렵엔 철학자로 돌아가 있었다. 변산공동체에서 가져왔다며 그가 건네준, 백 가지 약초를 섞어 만든 백초효소차가 더위를 잊게 했다. 거리에도 더위를 앗아가는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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