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9

2007.06.12

자본시장 새 장 여는 한국의 워런 버핏 꿈꾼다

전업투자자들의 일과 희망 “시장 읽는 실력 갖추고 돈 벌면 좋은 일에 쓰고싶어”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7-06-07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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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시장 새 장 여는 한국의 워런 버핏 꿈꾼다
    30대 중반의 전업투자자 L씨의 생활은 여느 직장인보다 더 빡빡하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울 것 같지만 실제는 정반대인 것. 그는 사무실로 쓰는 24평형 오피스텔에 아침 7시까지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3년째 계속하고 있다. 정장 차림은 기본이고 낮에도 일에만 몰두한다. 저녁 술자리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귀가 전에는 반드시 독서실에 들러 2시간씩 공부한다.

    “사실 많이 힘들죠. 그래도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으니 버틸 수 있습니다.”

    증권사에서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업투자자의 길을 택한 ‘L’씨. 그의 재산은 현재 100억원대에 근접해 당장 은퇴해도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다. 올 상반기 수익률만 80%이고, 배당수익만 해도 여느 직장인 연봉의 2배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가 이처럼 긴장을 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업투자자들 처지에서 보면 시장에 투자된 자본금은 이미 내 돈이 아닙니다. 액수보다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철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죠. 액수를 늘리는 것보다 ‘밝은 눈’을 갖고 싶다는 욕심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실력을 쌓고 싶다”



    L씨가 말하는 ‘밝은 눈’이란 대체 무엇일까. 젊은 가치투자자들이 집결한 증권정보 사이트 ‘밸류스타’(www.valuestar.co.kr) 강우석(35) 대표는 “마침내 시장을 이기는 실력”이라고 정의한다. 강 대표에 따르면 냉혹한 투자 세계에서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만질 수 있는 눈 먼 돈은 없다. 결국 ‘내공’의 깊이에 따라 수익률이 정해질 수밖에 없는데, 시장에서 실력 있는 플레이어로 인정받으려면 ‘실력’과 돈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몇십억원이니 몇백억원이니 하는 액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시장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실력이 쌓이면 돈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또 다른 증권정보 사이트인 ‘아이투자’(www.itooza.com)에서 ‘와이즈인베스터’란 필명으로 잘 알려진 박기태(32) 씨 역시 L씨와 비슷한 이력과 목표를 가진 전업투자자다. 그가 잘나가는 투자자문사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실력을 기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칙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회사가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아 시장에서 검증받고 싶었다는 것. 이들이 온라인 칼럼이나 분석 보고서, 단행본 등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알리는 것은 이런 ‘오기’ 때문이다.

    “펀드매니저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세태를 이길 수 있는 ‘철학’입니다. 그러나 자산운용사들은 ‘리스크 관리’를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투자자로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 회사에 남아서는 절대 워런 버핏 같은 대투자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업 운영에 참여하고 싶다”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5월 말, 전업투자자들의 관심은 ‘스포츠서울’을 인수한 한 ‘슈퍼개미’에 집중됐다. 증권사 직원 출신인 조명환 씨는 빌린 돈으로 코스닥 기업에 투자해 이미 100억원대 이익을 남겼고, 이번엔 185억원(47%)을 들여 언론사의 경영권까지 인수했다.

    ‘슈퍼개미’란 시가총액이 크지 않으면서 최대 주주지분이 적은 코스닥 기업을 대상으로 상당한 지분을 사들이는 일반투자자를 말한다. 물론 시세차익을 노리고 사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상당수 슈퍼개미들은 실질적인 경영 참여를 노린다. 나아가 ‘숨어 있는 진주’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인수·합병(M·A)에 나서 경영권 장악을 목표로 하기도 한다.

    개미들의 우상으로 불리는 박성득(51) 씨는 2005년 말부터 현대약품 주식을 꾸준히 늘려왔다. 식당 보조로 시작해 주식투자로 큰돈을 번 그는 직접투자로 현대약품 지분 18%(시가 약 180억원)를 확보해 이 회사의 1대 주주로 뛰어올랐다. 박씨처럼 중소기업의 대주주로 올라선 슈퍼개미들을 이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한때 벤처기업에서 일한 밸류스타 강 대표 역시 전업투자자로 변신한 이유에 대해 “이공계 직장인들은 자본시장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는데, 이런 흐름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최근 전업투자자가 증가한 데는, ‘실력 있는’ 젊은이들이 노동시장의 부속품으로 안주하기보다 자본시장에서 경영권 참여 등을 통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는 셈이다.

    경영 참여에 관심을 가진 전업투자자들의 공통점은 ‘투자 황제’ 워런 버핏의 인생관을 적극 추종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저평가돼 있다고 판단해 ‘올인’한 종목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그러다 보니 우리 주식시장에서도 장기간에 걸쳐 하이닉스, LG전자, SK㈜, 현대중공업 등 우량기업 중 한 종목만 집중 매수해 대박을 터뜨린 개미들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버는 법보다 쓰는 법이 중요

    “어떻게 돈을 버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런 철학에 따라 버크셔 헤더웨이의 워런 버핏은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대부분을 빌 게이츠 재단에 기탁해 화제가 됐다. 워런 버핏보다 금액은 적을지 모르지만, 국내 시장에서도 이런 철학을 실천하는 전업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일성신약 지분 4.99%를 보유한 전업투자자 표형식 씨는 이 회사의 배당금과 주식 일부를 장학재단이나 대학에 기부함으로써 몸소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본고사’란 필명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형곤 씨는 최근 선물·옵션으로 얻은 투자수익 가운데 2000만원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쾌척해 화제를 모았다.

    전업투자자들에게 이런 ‘나눔’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시장 선도력을 가진 투자자의 위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소형 ‘투자클럽’을 만드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들의 꿈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처럼 ‘투자 클럽’을 사모 형태의 헤지펀드로 발전시키는 것.

    20대 전업투자자로 유명세를 떨친 이재완(28) 씨는 “SK에 투자했던 소버린 같은 헤지펀드를 만들어 대한민국 자본시장에 충격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소규모 헤지펀드 하나가 한국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순식간에 변화시켰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는 최근의 주식열기를 타고 전업투자자로 나서려는 개미들에게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단순히 거래이득을 얻기 위해 전업투자에 뛰어들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결국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전업투자자들이 늘수록 한국의 자본시장은 진화를 계속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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