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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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적 손해배상제’를 許하라!

반사회적 기업 행위 사전예방 효과 …美와 FTA 타결, 같은 사안이라도 한국 소비자 더 큰 손해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7-05-16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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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許하라!
    [사례1] 자동차 옵션이 며칠만 지나면 가격변동 없이 기본 품목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돈을 내고 구입했다. 이 돈을 나중에 자동차회사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을까? 1년 넘게 걸렸으나 결국 소비자와 자동차회사가 서로 유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끝나버린 썰렁한(?) 사건이 최근 있었다.

    2005년 7월 13명의 장애인 소비자들은 르노삼성자동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들은 2004년 8월 르노삼성의 SM5를 사면서 장애인용 안전장치인 ‘세이프티 패키지’를 적게는 48만원에서 많게는 98만원을 내고 구입했다. 그런데 이 옵션이 같은 해 9월1일부터 가격변동 없이 기본 품목에 포함된 것. 이에 소비자들은 “대리점 측이 ‘9월부터 차량 판매조건이 더 나빠진다’며 적극적인 구매를 조장한 것은 기만행위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르노삼성은 “통상 매달 말일에 판매조건 변경이 승인되기 때문에 대리점 직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맞섰고, 결국 양측이 서로에게 유감을 표시한 조정조서를 나눠 갖는 선에서 소송이 마무리됐다.

    [사례2] 전국의 소비자들이 가격담합 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된 정유 4사(SK,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나서기로 했다.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이하 녹소연)를 중심으로 모두 650명이 모인 소송인단은 가격담합으로 입은 재산상 손해에 대한 배상과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방침이다.

    하지만 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소송인단이 받아낼 수 있는 배상금은 구매금액의 15% 정도인 실질적 피해액에 불과해, 담합행위를 한 기업들에 강력한 경고로 작용하지는 못할 전망이다(담합 기간에 20만원어치를 주유했다면 배상금은 3만원 내외다). 담합으로 인한 손해배상의 경우, 우리 법원이 정신적 피해는 인정하지 않은 채 실질적 피해액만 배상토록 판결 하기 때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다. 앞으로 더 많은 미국 기업이 국내 소비자들을 상대로 영리활동을 펼치고, 반대로 더 많은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소비자 보호정책으로 한국 소비자, 한국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 우려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Punitive Damages)가 바로 그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민사재판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고의적이고 악의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제도다. ‘있을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와 유사한 행위가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처벌 성격을 띤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것. 이 제도는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다. 그리고 우리 민법에서는 가해자의 고의성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오직 피해자가 실제 입은 손해액만 배상토록 하고 있다. 정신적 피해배상에 해당하는 위자료도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인정된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소송 비용과 시간을 고려해보면 기업의 악의적 행위에 대한 소비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엄두도 내기 힘들다.

    우리나라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이에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집단소송제도와 더불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을 적극 검토했지만, 지난해 9월 결국 도입을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제도가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이중처벌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한미 FTA 타결을 계기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許하라!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에 자리한 포드 본사. 포드는 1980년대 자동차 연료탱크의 결함을 고의로 숨겼다는 사실이 적발돼 무려 1억250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판결받았다.

    미국 자동차회사가 안전에 결함이 있는 자동차를 미국과 한국 시장에서 똑같이 판매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 결함으로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국 측 피해자는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지만, 한국 측 피해자는 실제 피해액만 받는 정도로 끝날 수 있다. 한국소비자원 정책연구실의 김성천 시장분석팀장은 “미국의 엄격한 손해배상제도 아래에서 활동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처럼 국내 시장에 진출하려는 미국 기업들에도 비슷한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녹소연은 정유 4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면서 GS칼텍스와 S-Oil에 대해서는 미국 법원에 제소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그러나 이 소송을 맡고 있는 김선양 변호사(법무법인 이인)는 “가격공동행위 현장과 피해 소비자 등이 모두 한국에 있는 사정을 감안해 소가 각하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는 한미 FTA 체결 이후 벌어질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즉,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국내 소비자가 활용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존재 자체가 시장질서 바로잡는 것”

    ‘사법 마찰’도 생길 수 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따라 미국 법원으로부터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국에 있는 이 기업의 재산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한국 법원으로부터 승인 집행 판결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인정하지 않아 승인 집행 판결이 나기 어려울 수 있다. 실제로 1995년 우리 법원은 미국 법원이 판결한 5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액 중 25만 달러만 승인 집행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공정위는 2월, 2004년 4월1일부터 70일 동안 휘발유 등유 경유 등에 대해 가격담함 행위를 한 정유 4사에 52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는 가격담합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 추정액 2400억원의 4분의 1 수준에 그친 금액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이 2005년 이후 과징금 10억원 이상의 담합사건(총 9건)을 조사한 결과, 소비자 피해 추정액은 3조8480억원이었지만 그에 대한 과징금은 7.7%인 2960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의경 소장은 “과징금이 적고 집단소송제도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는 소비자 보호정책의 미비함으로 인해 적발 위험성이 있더라도 담합행위를 하는 것이 기업으로서는 유리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목적은 배상금을 무겁게 판결함으로써 기업의 불법행위를 예방하는 데 있다. 이 소장은 “제도의 존재 자체가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면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소비자원 김성천 팀장은 “특히 소비자 불만이 높은 보험, 방문판매, 전자상거래 분야에 우선적인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앙대 장재옥 교수(법학과)는 “당장 도입이 어렵다면 우리 법원이 전보(塡補)적 성질의 위자료 얼마, 제재적 성질의 위자료 얼마 식으로 현행법상의 위자료 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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