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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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한미 FTA 도장만 찍으라고?”

협정문에 특정사안 구체 명시돼 국회 차원 논의 무의미 ‘입법권 침해 논란’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7-05-16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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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는 한미 FTA 도장만 찍으라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미 FTA 협상단으로부터 협상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Korea committed to ensure re-gulatory reforms in the financial services sector….”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4월2일 한국 정부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합의한 이후 홈페이지에 올린 글 중 일부다. 이를 해석하면 “한국이 금융서비스 분야의 제도개혁을 확실히 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된다.

    USTR는 이어 한국이 약속했다는 각종 금융서비스 제도개혁 내용을 열거하고 있다. 모두 금융서비스 분야의 개방과 관련한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 같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점. 사실상 정부는 미국 측에 법 개정을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법 제·개정은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이에 따라 국회 한미 FTA 대책특별위원회(이하 국회 특위) 소속 일부 의원들은 정부가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美 주장대로 금융서비스 개혁 약속했나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은 “그동안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법 개정 사항은 국회와 사전 협의를 거칠 것을 정부 측에 수차례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면서 “그래 놓고 국회 비준 절차를 밟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한미 FTA 시행일 이전까지 법 개정을 해달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정부 협상팀은 법 개정 사항이 20개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금융서비스 분야에서만 20개가 훨씬 넘고, 전체적으로 100여 개의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할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 측은 그러나 “금융서비스 제도개혁을 미국 측에 ‘커미트(commit)’해준 적이 없다”며 USTR의 발표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국회 특위에 참석해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협정문 부속서 등을 잘 읽어보면 정확히 알겠지만, 정부가 어떤 내용을 커미트하거나 그것(커미트한 것과 같은) 관련 내용으로 돼 있기보다, 전체적인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 전략의 하나로 여러 가지 제도개혁 방향을 환영한다고 돼 있다.”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FTA기획단 관계자는 “협정문과 부속서 어디에도 커미트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US welcome’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만일 USTR가 커미트했다고 발표했다면 아마도 오버한 것 같다. 그 (USTR가 발표한) 문서는 법적 효력도 없다”고 주장했다.

    권 부총리와 재경부 관계자의 말을 종합해보면, 금융서비스 제도개혁에 대해 ‘한국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환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문제의 단어가 포함된 USTR 문서 제목은 ‘Trade facts(협정사실)’다. 한미 FTA 협상 결과를 설명하거나 해석 내용을 담은 문서가 아니라, 실제 협정 내용을 산업부문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협정을 맺은 당사자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일방적으로 발표할 수 있을까.

    국회 특위 한 관계자는 “정부가 미국 측에 금융서비스 개혁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은 조만간 공개할 협정문이나 부속서 에 커미트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하지만 한국 정부가 커미트했다고 미국 정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그 내용상 한국 정부가 약속했다는 의미인 듯하다”면서 “우리 정부가 과연 관련 법 개정 없이도 한미 FTA가 시행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지 의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국회는 한미 FTA 도장만 찍으라고?”

    USTR 홈페이지와 한국이 금융서비스 제도개혁을 ‘약속했다(committed)’는 내용을 담은 문서 일부.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이런 논란과 관련해 “문서 내용을 보면 미국 측에서는 한국이 약속했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굳이 미국 측 문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협정문의 문장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회 특위가 입법권 침해 우려를 제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미 FTA 협정문이 특정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자동차 관련 세제개편 조항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국회 특위 위원들에 따르면, 한미 FTA 협정문에는 자동차 세제를 배기량 기준 현행 5단계에서 1000cc 이하, 1000~2000cc, 2000cc 이상 등 3단계로 개편하는 것뿐 아니라 세율액까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고 한다.

    최근 국회 특위에서 권오규 부총리와 박영선 의원이 주고받은 질의응답 내용을 보면 국회와 정부 간 입법권 침해 논란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박) “영문 협정문을 보면 자동차세제 부분에서 굉장히 구체적으로 합의했다. 세율을 어떻게 매길지에 대한 단가까지 나와 있다. 만일 국회에서 문제가 있다고 제기하거나, 국회 차원에서 검토했을 때 세제 기준을 협정문 그대로 고치지 못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권) “자동차뿐 아니라 협정서의 핵심 내용인 관세안 전체가 그렇다. 결국 협정 전체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국회에서 잘 분석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지지해주리라 기대한다.”

    (박) “이렇게 구체적으로 합의한 탓에 국회는 합의대로 도장만 찍어줘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이는 월권이 아닌가?”

    (권) “전체적으로 한미간의 자동차 교역을 놓고 볼 때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무리가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국회에) 협정 내용을 잘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국가간 협정문에 단 단위까지 적시”

    권 부총리의 답변은 마치 큰 무리가 없으니 전체적으로 국익을 위해 이해하고 협조해달라는 투다. 하지만 국회 특위에서는 이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한다. 당장 국회와 정부는 1200cc로 올려놨던 경차 기준을 다시 1000cc로 내리고, 중형차 기준도 2500cc에서 2000cc로 하향 조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자동차산업 전반에 끼칠 영향은 적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세금의 형평성 문제도 거론된다. 예를 들어 2000cc 수입차 BMW와 3000cc 국내차 에쿠스를 비교해보면, 가격이 훨씬 비싼 BMW가 단지 배기량이 작다는 이유로 에쿠스보다 세금을 적게 내는 결과가 되는 것.

    이런 문제는 국회가 입법 과정에서 관련 기업과 국민 여론 등을 수렴하고 충분히 논의를 거쳐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이미 한미 FTA 협상이 끝난 상황에서 국회 차원의 논의는 무의미해졌다. 국회 특위 한 관계자는 “국가간 협정문에 단 단위까지 세제 기준을 정하면 국회에서는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배기량 기준은 물론 세율을 조금이라도 조정하면 미국 측에선 당장 협정 위반이라고 문제제기를 할 텐데, 그 책임은 누가 질지 정말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일부 국회 특위 위원들은 “조만간 공개될 협정문과 부속서를 보면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견될 수도 있다. 국회가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회 비준 동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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