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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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썼어, 네 맘대로 읽어”

노벨문학상 수상자 옐리네크 ‘이상한 글쓰기’ 인터넷에만 연재, 비평은 절대 사절

  • 빈=임수영 통신원 hofgartel@hanmail.net

    입력2007-05-09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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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맘대로 썼어, 네 맘대로 읽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특히 객관적 잣대로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문학상의 경우 이래저래 말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오스트리아의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61)가 선정됐다는 소식이 오스트리아 사회를 뒤흔든 강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건만, 오스트리아의 여론은 기쁨보다는 ‘하필이면 왜 저 사람인가’라는 식의 충격과 분노가 주류를 이뤘다.

    오스트리아 일간지 중 발행부수 1위인 ‘크로넨 차이퉁’의 독자투고란에는 ‘옐리네크가 노벨문학상을 타다니 노벨상도 끝장났다’는 비판은 물론, ‘조국에 먹칠한 사람에게 무슨 노벨상이냐’ 등 작가에 대한 조롱과 원색적인 비난이 몇 주간 이어졌다. ‘문학계의 교황’이라 불리는 독일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옐리네크는 대단한 여자지만, 좋은 책을 쓰는 데는 실패했다”는 혹평을 해댔다. 언제부터 노벨상에 대한 논평까지 했는지 모르지만 바티칸조차도 ‘허무적이며 신경증적인 여성’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 유감의 뜻을 표했다.

    “상 받을 자격 없는데 왜 나를”

    옐리네크를 포함해 역대 2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오스트리아는 이제는 수상 자체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지, 수상자에 대한 일부 국민의 냉대가 예사롭지 않다. 옐리네크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가 “조국에 먹칠을 했다”고까지 주장한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에 합병됐다. 그러나 일본에 강제합방된 우리나라와 달리 오스트리아 국민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를 빈시 한가운데의 ‘영웅광장’에서 환호로 반겼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잘못을 시인한 독일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우리는 나치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라며 희생자의 탈을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유대인 화학자였던 옐리네크는 오스트리아 국민이 다시는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 이 치부를 가차없이 까발림으로써 ‘시대와의 불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국민배우로 칭송받는 파울라 베셀리가 나치 홍보영화에 출연해 출세한 것을 주제로 ‘궁정극장’이라는 희곡을 썼다. 이 연극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반발로 독일에서 겨우 초연을 했다. 또 2000년 극우당인 자유당이 연정에 참여하자 옐리네크는 데모대 선두에 서서 투쟁연설을 했다.

    옐리네크는 노벨상 수상이라는 엄청난 홍역을 치렀다. 오죽하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FAZ)’이 옐리네크를 ‘노벨상 수상자(Tragerin)라기보다 노벨상을 견디는 작가(Ertragerin)’라고 표현했을까. 옐리네크 또한 “노벨상이 개인의 영광인 동시에 엄청난 고문”이라고 심정을 털어놨다. 광장공포증이 있는 옐리네크는 노벨상 탓에 몇 배로 커진 대중의 시선이 못 견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음 내키지 않으면 다 삭제”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그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처럼 옐리네크는 병적으로 지배적인 어머니 아래서 무남독녀로 자랐다. 어머니에게서 ‘천재아동’으로 ‘훈련’받으며 자란 그는 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하는 등 어머니의 강압을 아무 말 없이 모두 소화해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때 옐리네크의 세계는 붕괴되고 말았다. 광장공포증이 발병해 근 1년 동안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집 안에서 TV만 보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옐리네크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근 옐리네크가 쓰는 새로운 소설이 화제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www.elfriedejelinek.com)에 ‘시기(猜忌·Neid)’라는 소설을 연재 중이다. 옐리네크는 FAZ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은 인터넷에만 연재하고 절대로 책으로 출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옐리네크는 이런 형태의 글쓰기 목적을 ‘자유’라고 규정한다. 공식적인 계약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언제든 쓰기 싫으면 쓰지 않을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내용 전체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대로 썼으니 읽고 싶은 대로 읽으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옐리네크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출력해 읽을 수 있다”면서도 “사전허락 없는 인용을 불허한다”는 규칙을 정해놓았다. 옐리네크는 이 규칙으로 비평가들의 비평을 우아하게 원천 봉쇄해버렸다. 일일이 문장을 잡고 늘어지는 비평가들은 인용권 없이는 비평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월에 1편이, 4월에 2편이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후 하루 500여 명이 90장에 가까운 이 소설을 내려받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가 나간 뒤 폭발적으로 접속 횟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언제 3편이 올라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옐리네크는 “총 5편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내키지 않으면 팔과 다리가 잘린 토르소처럼 그대로 두거나 소설 전체를 다 삭제할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된다면 독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기 전에 빨리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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