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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찾는 논술 비전|‘천 개의 얼굴, 웃음’

웃음은 슬픔의 아들

  •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웃음은 슬픔의 아들

웃음은 슬픔의 아들

웃음을 통해 우리 안의 서양 숭배주의를 되돌아보게 하는 TV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

웃음에는 악의 없는 ‘농담 따먹기’에서부터 풍자, 익살, 조롱, 이죽대기, 빈정대기 등 갖가지 형태가 있다. 프로이트는 웃음을 순진한 농담(innocent joke)과 자의적 농담(tendentious joke)으로 나눈 뒤 밤에는 꿈이, 낮에는 농담이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농담은 두 명의 주인, 즉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비위를 맞추는 악당인 만큼, 꿈은 순전히 개인적인 데 반해 농담은 사회적이라고 한다. 농담은 화용론(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다. 화자와 청자, 때론 제삼자의 집단적 협력에 의해서만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웃는 것일까. 브레히트 식으로 표현하면 웃음은 ‘소격 효과(비판적 거리 현상)’다. 웃는 사람과 웃게 한 대상 간의 거리가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어이없는 자신을 향해 혼자 웃더라도, 거기에는 자의식이라는 거리가 존재한다. 추억에 잠겨 웃을 때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래서 웃음은 감정이입을 통해 자신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연민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1권 비극편에서, 비극을 맞은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껴 울면서도 그 대상과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 공포감에서 쉽게 벗어나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바로 비극의 기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희극, 즉 웃음의 기능은 무엇일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 나치수용소에 갇힌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관객들을 웃긴다. 그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해 연민을 느끼면 울게 되지만, 우리가 그 영화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과 내가 다른 존재라는 거리감 때문이다.

생리학적으로는 뇌가 엔도르핀을 분비하기 때문에 웃는다. 엔도르핀은 마약처럼 환각효과가 있어 고통을 잊게 해준다. 물론 엔도르핀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분비되게 만드는 주체에겐 목적이 있다. 단, ‘그냥’ 농담을 하는 주체와 상대방을 비판하는 풍자를 내놓는 주체는 웃음을 유발하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

“스트레프시아데스 : 천만에, 그게 아니에요. 내가 죽으면 아무도 기소하지 못한다 이겁니다.



소크라테스 : 잠꼬대 같은 소리. 꺼져! 이제 가르치는 것도 진저리난다!”

-아리스토파네스(BC 445?∼BC 385?)의 희극 ‘구름’, 연세대 2004년 정시

기소되지 않기 위해 미리 목매 죽는다는 논리는 궤변이다. 희극 ‘구름’은 풍자적으로, 스트레프시아데스로 상징되는 ‘철학 주류 권력’ 소피스트들의 본질이 궤변이라는 점을 폭로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라블레(16세기)는 ‘가르강튀아의 소름끼치는 이야기’에서 성서에 나온 말이라면 아무리 황당무계해도 의심하지 않는 교조적 프랑스 사회를 ‘엽기적’으로 풍자했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

-김수영의 시, ‘풍자냐 자살이냐’

김수영 시인의 풍자시들은 이처럼 날카로운 침이 튀기로 유명하다. 이는 김지하 시인의 논문 ‘풍자냐, 자살이냐’로 이어졌다. 김지하는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풍자(諷刺), 비판하더라도 연대의식과 연민의 정을 깔고 있는 것을 해학(諧謔)이라 했다. 풍자는 지배계층의 비윤리성과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침이지만, 해학은 민중끼리 서로 이죽대는 농담이기에 비적대적인 침방울이다. 풍자는 비판하는 대상이 비판받는 대상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 반면, 해학은 꼭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골계(滑稽)다. 박지원의 ‘양반전’ ‘허생전’이 풍자라면, 김유정의 ‘봄봄’ ‘동백꽃’은 해학이다. 그런데 풍자, 농담도 아닌 것이 웃음을 유발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할 때가 있다.

반공교육이 한창이던 시절 초등학교 교실. 선생님이 6월 중순경 한 학생에게 6월25일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다. “아버지 월급날인데요.” 선생님의 얼굴은 굳었고 빨갱이처럼 시뻘게졌다. 6·25전쟁이 ‘유교(儒敎)전쟁’이라고 ‘그냥’ 농담을 했다면 뺨 한 대 맞았겠지만, 어린이의 순수함은 선생님의 근엄함을 무력화했고 ‘제삼자들의 광범위한 동의(웃음바다)’를 순식간에 창출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웃음의 행복정치학 때문이다. 선생님의 6월25일은 ‘기억해야 할 체험(무찌르자 공산당)’인데, 어린이의 영혼은 좌우 이데올로기 그 어디에도 착륙하지 않은 채 더 원초적인 집으로 날아가 아버지의 월급, 어머니의 웃음, 혹시 모를 선물꾸러미, 그러니까 선생님(권력자)이 전횡하고자 하는 기호 6월25일을 자신도 모르게 해체한 ‘해방의 정치학’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웃음의 사회적 기능이 권력 논리 부수기라는 점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웃음은 슬픔의 아들

소설 ‘장미의 이름’을 통해 웃음의 양면성을 고찰한 움베르토 에코(왼쪽).
영화 ‘장미의 이름’.

“호르헤 수도사 : 웃음은 잠시 동안 농노들을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공포, 신의 두려움으로부터 부여된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 : 희극은 보통사람들의 약점과 악덕을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달성합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훈적 가치가 있는 선(善)의 힘으로 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서강대 2007년 정시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론이다. 지금은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희극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뿐 아니라 희극(웃음)도 쓸모가 있고 진리를 나르는 수레라고 주장했단다. 하지만 중세의 대변자인 호르헤 수도사에게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악마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웃는 순간 자신의 원죄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탄의 마약인 웃음을 인간이 찬미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능멸하는 행위다. 그래서 호르헤는 희극론을 금서로 규정하고 페이지마다 독약을 바른다. 터부 깨기에 기갈난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 둘 죽어간다. 반면 영국 철학자 윌리엄 오컴을 상징하는 윌리엄 수도사는 웃음을 옹호한다. 웃음의 기능은 억압과 고통을 해방하는 선(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 은총, 용서 등 모든 미덕이 다 들어 있는 성경에 유일하게 없는 것이 바로 유머다. 중세다.

그런데 현대에는 웃음을 작위적으로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1965)에서 주인공 루드빅은 엽서를 보내면서 ‘그냥’ 농담을 한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빅.”

뭇 남성의 우상이자 열렬한 공산당 신봉자인 마르께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루드빅은 그녀의 행동과 말에 사사건건 앵돌아지다, 방학 동안 자신을 남겨두고 당 훈련학교에 들어간 그녀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늘 근엄하기 짝이 없는 그녀를 낭창낭창하게 만들기 위해 농담 한마디를 적어 보낸 것이다. 너무나, 너무나 사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검열의 그물망에 걸려든 루드빅은 결국 대학에서 추방당하고,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다 중년에야 비로소 풀려난다. 이는 공산주의의 유토피아 낙관론만 강요하면서 사회비관이나 비판을 통제하는 스탈린주의의 광기, ‘당과 사회에 멸사봉공’하는 낙천적 공산주의형 인간만이 건전한 사람이라는 절대 공식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근엄’이 종교가 돼버린 중세의 해악을 반면교사 삼아 ‘성찰과 비판정신이 결여된’ 웃음 찬양 또한 좌파적 교조주의임을 지적한 셈이다.

물론 웃음은 말장난, 풍자, 해학, 조롱 등 천의 얼굴이다. 하지만 오늘날 시청률이나 돈만을 위해 소비되고 있는 온갖 유희적 웃음(명랑만화, 텔레비전의 인위적 폭소장치)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무의미한 웃음의 무조건적 확산 경향 또한 우파적 농담 과잉 현상이니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는 슬랩스틱 코미디 ‘골목대장 마빡이’, 말장난 ‘킬리만자로의 개’, 연예인들의 사생활과 약점을 까발리는 폭로 토크 ‘무한도전’이 식상해질 무렵에 나온 ‘미녀들의 수다’는 각별하다. 미스유니버스대회 같은 관음주의를 바탕 삼아 말장난과 게임으로 유희적 웃음을 주다가도 우리 안의 서양 숭배주의, 오리엔탈리즘, 문화절대주의 등을 제삼자의 내실 있는 토크로 되돌아보게 하는 이 프로그램은 성찰적 웃음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웃음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결론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말처럼 웃음에 설령 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주위를 미소로 감싸고자 하는 유머는 매사 꼭 의미를 찾으려는 근엄한 사람의 것도, 아무런 의미도 찾지 않으려는 경박한 사람의 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유머러스한 사람은 웃을 일이 있을 때 너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웃는 사람이라고 했다. 웃음에도 중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웃음의 뒤통수는 울음이라는 마크 트웨인, 웃음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보들레르의 역설이야말로 웃음의 진정한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 & 토론거리



1. 웃음은 사회적인가, 개인적인가?

2. 장자는 아내가 죽자 노래를 부르면서 희희낙락한다. 이해 가능한가?

-서강대 2001년 정시

3. ‘장미의 이름’에서 엄숙을 강조한 호르헤 수도사의 입장은 무조건 틀린가?

-서강대 2002년 예시

4. 중세의 절대권력은 종교였다. 그럼 현대의 절대권력은?

5. ‘축제’(이청준)의 장례식에서처럼 슬픔과 웃음이 양립할 수 있나?

-서강대 2007년 정시

6. 동물우화와 같은 예를 통해 웃음의 사회적 기능을 논해보자.

. -연세대 2004년 정시

7. 쿤데라는 ‘농담’에서 웃음을 지나치게 권장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반면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웃음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어느 사회가 더 불행한가?

*추천도서 : ‘농담’(밀란 쿤데라, 방미경 옮김, 민음사),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주간동아 2007.04.24 582호 (p91~93)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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