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2

2007.02.06

예술의 민주화와 인간 회복의 길

  • 박진열 ㈜엘림에듀 ‘늘품 논술’ 상임연구원

    입력2007-02-05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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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민주화와 인간 회복의 길

    프랑스혁명 때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형상화한 그림.

    [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이룩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으로서 오늘날 대다수 인간들이 처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요즘 흔히 들리는 ‘인간 회복’의 부르짖음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실상 이 ‘회복’이라는 단어에는 불가피하게 어떤 저항의 가락이 끼어든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그나마 있던 것마저 잃어버렸다는 통탄1)과 분노의 목소리가 곁들이게 마련인 것이다.

    [나] 하지만 ‘회복’은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창조해가는 인간의 회복, 미래로 뻗은 갈 길의 되찾음이어야지 ‘인간’이라는 어떤 완제품(完製品)의 회복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뜻에서 ‘인간 회복’보다 ‘인간 창조’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창조의 측면이 배제된 인간 회복론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방해할 뿐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한 반동세력의 인간성 불변론(人間性不變論)이 그러했듯이, 오늘날의 이른바 복음주의2) 기독교의 입장이나 봉건 사회 유물로서의 성리학자의 입장처럼 ‘인간’이 무엇인지 미리 다 알아서 남은 것은 그것을 가르치는 일, 그런 규범에 맞는 인간을 복원하는 일뿐이라고 믿는 일체의 주장은 역사를 통한 인간의 자기 창조라는 인간 회복의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것이다.

    [다] 하지만 ‘회복’이라는 낱말이 단순한 저항의 수사(修辭)만은 아니다. ‘인간 회복’에서 창조의 측면이 빠져서는 안 되듯이 ‘인간 창조’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있는 것의 회복이요 실현이라는 측면을 잊어서도 안 된다. 미래 인간의 창조는 어디까지나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간성에 근거한 창조요, 현재 인간의 인간답지 못함이 비본질적이라는 깨달음에 입각한 일종의 복원 작업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인간 창조론은 한갓 공상에 그치기 쉽다. 아니, 공상으로만 그친다면 또 좋다. 오늘날 인간다운 삶의 실현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저 현대 산업사회 특유의 공학 만능주의가 바로 이러한 빗나간 인간 창조론의 표본이다. 즉,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기 나름이므로 그 기술적 조작 능력을 보유한 다른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과 인류의 장래 자체에 저지르고 있는 온갖 범죄 행위도 합리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이기는커녕, 소수인에게만 편리한 특수한 인간 현실의 폭력적 연장(延長)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라] 그러면 ‘인간 회복’과 ‘인간 창조’의 구호가 각기 지닌 함정을 동시에 피하는 중용지도(中庸之道)는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손쉬운 답변은 있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현재의 인간 현실에 대한 단호한 저항과 이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간 본연의 그 무엇에 대한 한없는 신뢰 및 애정을 아울러 갖춘 자세여야 함은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의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신념과 결의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예술의 경우에도 그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는 길은 기존하는 예술 가치의 단순한 보급도 아니요, 임의로 설정된 미래 사회의 규범에 뜯어 맞춘 새 가치의 조달3)도 아닌 것이다. 종래 예술의 반대중성·반민주성을 냉철히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틀에서 엿보이는 예술 본연의 인간 옹호, 진리 구현 능력에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주는 길뿐임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마] ㉠예술의 민주화는 현대문명이 개발한 엄청난 물질적 생산 능력을 더욱 확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그와 동시에 현대문명의 병폐인 공학 만능주의의 근본적인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시 인간 회복 과업의 어려움을 집약하고 있다. 인간의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습성과 욕구마저 변경시키는 현재 기술의 위력을 받아들이되 그 과정에서 또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인지하고 쟁취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인 주문이다. 흔히는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해 지배되지 말고 인간이 과학기술을 지배하면 된다고 간단히 말해버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하이데거가 지적하듯이 전형적인 과학기술적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과학기술의 인간 지배를 지양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기 쉽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성의 ‘창조’와 이미 있는 인간성의 ‘회복’을 하나의 작업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우리의 다분히 역설적인 요구에도 부적합할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기술 및 기술문명과 본질적으로 친숙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지배 영역에 편입되어 있지 않은 사고방식이요 존재양식이다.



    예술의 민주화와 인간 회복의 길
    [바] 예술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존재양식을 그 본질로 삼고 있다. 이것은 물론 모더니즘의 예술관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다수 대중의 생활과는 절연4)된 예술, 오직 심미적 가치의 결정체로서 우주 속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작품이란 얼핏 보면 현대 기술문명에서 가장 초연한 존재 같지만, 실상은 가장 철저히 기술 중심적 사고방식에 예속되어 있는 태도의 표현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기술적 이용의 대상이냐 아니냐 양단간의 하나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사] 그에 반해 예술의 민주화를 진심으로 추구하는 입장은 예술의 본질 속에 인간과 기술문명 간의 좀더 다른 차원의 관계가 제시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술의 민주화란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기술문명의 혜택을 대폭 확대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빈곤과 질병과 탄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중이 예술의 창작과 감상만을 고루 즐기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기반의 확대에만 우선권을 주고 기존 예술관에 입각한 대중 교육에 희망을 거는 것은 민중의 창조적 역량을 위축시키는 일이 될뿐더러 정치적·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노력에도 차질을 가져오기 쉬운 것이다.

    [아] 그런데 애초부터 기술이면서 기술 아닌 것이 바로 예술이다. 좁은 의미의 기술적 요소와 비기술적 요소가 혼재(混在)한다는 뜻을 넘어서, 예술은 철두철미 하나의 기술이면서 전혀 다른 그 무엇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선 예술은 기술이다. 현대 건축이나 영화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성악가의 성대(聲帶)에서부터 시인의 낱말에 이르기까지 각기 제 나름의 재료와 도구를 동원하여 자기 뜻을 전하는 기(技)요 예(藝)인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러한 전달에 성공했을 때 예술을 기술과 혼동할 수는 없다. 성공한 작품의 어느 한구석이 기술 아닌 것이 없건만, ‘시는 곧 사무사(思無邪)5)’라는 공자의 말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마음이요 생각이다. 의당 드러날 것이 드러났고 원래 있는 것이 있게 만들어진 순간의 기쁨인 것이다.

    [자] 이러한 예술의 본질은 오늘날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더욱 가중되고 있는 인간 상실을 극복하는 데 어떤 암시를 던져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암시지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는 식의 또 하나의 복음주의를 빚어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술은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는 기술문명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동시에 기술 중심의 사고방식·존재양식에서 생래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백낙청 ‘예술의 민주화와 인간 회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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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예술관을 150자 내외로 쓰시오.

    2. ㉠의 의미를 200자 내외로 분석하시오.

    각 단락의 소주제문

    [가]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본래 지니고 있던 것을 되찾는 인간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 진정한 인간 회복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창조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 창조를 이루어야 한다.

    [다] 인간 창조는 현재 인간을 위협하는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서의 복원 작업이어야 한다.

    [라] 인간 창조를 위해서는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는 예술 본연의 인간 옹호,진리 구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통해 가능하다.

    [마] 예술의 민주화는 물질적 생산 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그 병폐인 공학 만능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바] 모더니즘적 예술관,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은 기술 중심적 사고방식에 예속된 사고의 소산이다.

    [사] 예술의 민주화는 예술의 본질 속에 인간과 기술문명 간의 관계 이외에 다른 차원의 관계가 제시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아] 예술에는 기술적 요소와 비기술적 요소가 혼재하나, 작품의 의미 전달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기술의 의미를 초월하게 된다.

    [자] 예술은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 상실을 극복해준다.

    이 글에 대하여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참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평론가 백낙청의 예술관이 잘 나타난 글이다. 이 글은 현대사회에서 참된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팽배해 있는데 이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의 인간 회복, 나아가서는 인간 창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주요 논지다. 그리고 인간 창조를 위해서는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예술 본연의 인간 옹호, 진리 구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휘풀이

    1) 통탄(痛歎) : 몹시 탄식함, 또는 그 탄식. 탄통(歎痛)

    2) 복음주의(福音主義) :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고, 복음에 대한 신앙의 실천만을 구원으로 삼는 주의.

    3) 조달(調達) : ①필요한 자금이나 물자 따위를 대어줌. ②고르게 어울려 서로 통함.

    4) 절연(絶緣) : 인연이나 관계를 끊음.

    5) 사무사(思無邪) : 마음이 올바름. 마음에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

    예시답안

    1. 필자는 상실한 인간성 회복과 새로운 인간 창조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예술의 민주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예술의 민주화는 인간 옹호, 진리 구현의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통해 가능하며, 기술문명의 폐해를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2. 현대는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로서, 과학문명은 인간의 삶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대중이 다양한 예술을 향유하면서도, 현대문명이 가져온 부작용, 가령 인간 소외나 인간성 상실 등을 극복함으로써 예술의 민주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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