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8

2007.01.09

웃음과 감동 주러 “조랑어사 출두요”

  • 안중규 만화가 titicaca@korea.com

    입력2007-01-08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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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과 감동 주러 “조랑어사 출두요”
    “아버지 박목월 시인은 만화책을 쥐여주며 ‘책이라는 것은 마음의 양식을 키우는 것이고 만화책은 상상의 날개를 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지’라고 하셨다. 지금도 나는 이 어린이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박목월 시인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식들이 만화책을 보고 싶어하는 걸 알고 어린이날 만화책 한 보따리를 건네주던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에세이집 ‘아버지와 아들’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40~60대 저명인사 가운데 어릴 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매체로 만화책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보월(步月) 정한기(76) 선생의 작품도 많은 인사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지금도 가끔 그들에게서 연락이 온다고 한다.

    선생의 경력은 매우 다양하다. 만화가, 삽화가일 뿐 아니라 필명으로 20여 편의 소설을 썼고, 고향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또한 만화신문 편집국장, 주간지 편집국장, 잡지사 발행인을 두루 거쳤고, 작곡과 클래식 음악 감상 취미까지 있으니 한마디로 팔방미인이라 할 수 있다.

    발행한 단행본만 2000여 편 …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



    선생의 이 같은 ‘끼’는 다분히 어머니 이준례 여사에게서 물려받았는데, 이 여사는 기자와 교수를 지낸 인텔리 여성이었다. 이 여사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기타를 비롯해 20여 개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미술 실력도 뛰어나 국전에서 입상할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천부적 소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의 전신) 부설 초·중·고등학교를 나왔고, 홍익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1회 졸업생이다.

    선생은 군복무 시절인 1951년 데뷔해 각종 인쇄매체에 작품을 게재하면서 거의 모든 만화 장르를 섭렵했고, 지금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선생은 초창기에 신문 만화를 그리다가 절친했던 만화가 김경언 씨의 권유로 단행본을 그리게 됐다. 그 뒤 20년 넘게 만화 단행본을 그렸는데 ‘소년한국일보’에서만 2000여 편의 작품을 발행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선생은 ‘아리랑’ ‘야담‘ ‘명랑’ ‘학원’ 등의 잡지에서 인기 작가로 활동했고, ‘돌바위’ ‘조랑어사’ ‘작은 어사’ ‘협객’ ‘초승달’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선생의 명성은 1960년대 말 ‘조랑어사’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조랑어사’ 시리즈는 암행어사에 대한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어린이의 시각에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으로 그려 당시 어린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조랑어사’는 제주도의 탄탄한 조랑말과 암행어사의 합성어로, 출판사 사장과 나눈 잡담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선생이 ‘조랑어사’를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고향 금강변에서 말을 탔고, 유도와 검도 등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이다. 말은 광복 후 일본 사람이 두고 간 것을 사서 키웠는데, 기병대 생활을 한 친구에게 승마기술과 발톱 청소, 징 갈기 등 말 관리법까지 직접 배웠다.

    웃음과 감동 주러 “조랑어사 출두요”
    선생은 만화주인공 이름을 만들 때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곤 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는지, 유명 여자 탤런트들이 예명으로 선생의 만화주인공 이름을 붙이곤 했다. 그중 대표적인 이름이 ‘금보라’다.

    선생은 전성기 때 5개 팀에서 5가지의 만화를 동시에 작업할 정도로 분주했다. 그 팀들이 풀가동돼 한 달에 약 100쪽짜리 만화책 24권까지 만들어냈다고 하니, 하루에 거의 한 권을 제작한 셈이다. 모든 스토리는 선생이 직접 썼고, 주인공의 캐릭터를 잡아주면 문하생들이 그것을 따라 밤새워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선생 화실의 작업 분위기는 전투를 방불케 했다. 식사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빠 작업 의자에 앉은 채 밥을 먹으며 일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작업에만 몰두해 원고료를 얼마나 받고 어떻게 관리하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작가들은 ‘원고료를 누구보다 더 많이 받는가’보다 ‘누구보다 좋은 작품을 만드느냐’를 중시했다. 선생도 작품을 만드는 데 정성을 쏟았지 책이 얼마나 팔리고 인기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최대 히트작 ‘조랑어사’에 가장 애착

    웃음과 감동 주러 “조랑어사 출두요”
    선생은 스토리를 구성할 때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클라이맥스라는 큰 산 3개를 설정한 뒤 그 사이에 작은 산의 클라이맥스를 여러 개 만들어 이야기를 박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엮어 나가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선생이 직접 쓴 만화 스토리가 3000편에 달한다.

    선생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는 고래와 인간의 싸움을 그렸던 ‘검은고래’로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만화대상을 받았다. 그때 금상을 받은 이가 순정만화계의 최고봉 엄희자 씨였는데 그녀도 선생의 제자였다.

    선생의 부친은 보성전문학교 출신으로 교장 선생님을 하셨는데, 선생이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교직이나 정치계 쪽으로 나아가길 원했지만 만화를 그려 실망이 컸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의 부친이 만화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한글 해독조차 못하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많았다. 한글을 모르던 한 아이가 수업 시간에 이순신 장군의 생일까지 알아맞혔다.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만화를 보고 알았다고 해 그제야 만화의 가치를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부친은 “만화가 교육의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생은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해왔지만, ‘조랑어사’의 만화가 ‘정한기’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8부작인 ‘조랑어사’는 책을 쌓으면 사람 키 높이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선생은 지금도 특수 주간지와 지역신문에 만화와 만화 삽화를 그리고 있으며 이 일을 큰 보람과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선생은 만화를 그리다가 책상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게 가장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선생은 정말 타고난 만화가다.

    .‘조랑어사’ 캐릭터는
    진지하면서도 스릴 있고 코믹한, 성룡 영화풍의 무협만화 캐릭터다. 어느 영화인은 어릴 때 봤던 ‘조랑어사’를 영화로 제작하고 싶어하는데 아쉽게도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균형 잡힌 구도에 힘 있는 그림체와 완벽한 스토리 구성력을 지닌 ‘조랑어사’가 복간되어 새로운 캐릭터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경력
    。1951년 만화승리국방부, 사병만화육군본부 등에 작품 게재

    。1956년 연합신문에 시사만화 '허사비' 연재

    。1958년 서울신문에 4칸 시사만화 '허모아' 연재

    。1959년 대한만화가협회 창립 멤버

    。1960년 대한일보 '포플러 가족' 연재

    。1960년 만화신문 창간에 편집국장으로 참여

    。1962년 아동만화자율위원회 위원, 한국만화가협회 제 3대 감사, 제6대 이사

    。1969년 어린이 만화 단행본 '조랑어사' 발표

    。1972년 한국아동만화윤리상 수상

    。1999년 한국주택신문, 강남내일신문, 현대주택 등 월간 주간지에 만화 연재

    。충북 옥천군 안내초등학교 교사

    。화랑무공훈장 수여

    。월간 '한방과 건강' 발행인

    대표작 : 조랑어사, 손자병법, 돌바위

    데뷔 : 군복무 중 정훈감실에서 김용환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독학


    ‘추억의 만화가를 찾아서’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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