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3

2006.02.21

아시아 굿판 지도, 렌즈로 그렸다

故 김수남의 사진세계…사라져가는 민속신앙과 통과의례 사명감으로 기록

  • 김승곤/ 사진평론가

    입력2006-02-15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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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굿판 지도, 렌즈로 그렸다

    고인이 촬영한 황해도 내림굿

    굿 사진 하나로 살아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수남 씨가 2월4일 태국 치앙마이의 설 축제를 취재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져 숨졌다. 향년 57세.

    탄생과 죽음, 질병, 결혼 같은 삶의 중요한 마디마디에서 치러지는 굿에는 인간의 삶뿐 아니라 사후의 영적인 세계가 이어져 있다. 김 작가가 본격적으로 굿 사진을 찍기 시작한 1970년대는 경제발전이라는 지상 목표를 향해 온 나라가 한 덩어리가 되어 치달리던 때였다.

    미신으로 몰린 굿은 갖은 탄압에 시달리다 역사의 어두운 그늘 속으로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관의 눈을 피해 굿판을 여는 것도 어려웠거니와 그런 굿판을 찾아내어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때를 회상하며 그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정열로 무당들의 세계에 접근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무당들도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굿판에서 얼굴이 알려지자 그의 작업에 가속이 붙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큰 굿판에서는 어김없이 벌겋게 익은 얼굴로 사진을 찍는 그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93년 그는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 ‘한국의 굿’(전 20권, 열화당)이라는 큰 사진집으로 엮어냄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독보적인 위치를 굳힌다. 무려 1000여 점의 사진을 지역과 유형별로 분류한 이 책은 사진계의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

    아시아 굿판 지도, 렌즈로 그렸다

    옹진 배 연신굿.

    80년대에 그는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무속신앙과 민속학, 인류문화학에 관한 책 속에 파묻혀 지낸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현장 체험을 함께 갖춘 최고 전문가가 되었고, 연세대 김인회 교수와 함께 굿 학회를 결성한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사진과 글로 기록하고 발표하던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활동 영역을 넓혀 1년의 반 이상을 중국, 일본, 타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네팔, 티베트, 인도, 타이완, 미얀마 등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시아 오지의 소수민족 마을에서 보낸다. 아시아의 민속신앙과 통과의례 등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의 어느 민속학자도 갖고 있지 못할 아시아의 문화지도가 그려졌다. 그의 수첩에는 언제 어느 나라, 어느 지방에서 무슨 축제가 열리는지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그곳에 가 있었다.

    비의적인 의식이 치러지는 곳은 어디나 외부 사람들을 극도로 꺼린다. 오지를 찾아가는 데만도 며칠씩 걸리고, 범죄 집단이 관할하는 마약 재배지나 게릴라의 전투 지역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시아 굿판 지도, 렌즈로 그렸다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 사진가가 카메라 하나 들고 그런 곳에 뛰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는 서구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문화의 원형을 기록하는 일을 ‘증인의 사명’으로 자신에게 부과했다.

    그의 꾸밈없는 큰 목소리와 어린애 같은 웃음도 사진만큼이나 일품이었다. 동그란 얼굴과 처진 눈초리에 피어나는 웃음은 어느 오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순식간에 열어놓았다. 몇 차례 그를 겪어본 무당들은 한결같이 그를 사위로 삼고 싶다고 말들 한다. 그가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마누라는 한 사람이지만 장모는 수십 명”이라고 뽐내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세상이 다 아는 얘기지만, 그는 술을 무척 좋아했다. 문화계에선 ‘김수남’이란 이름을 들으면 ‘술’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술꾼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잘 모르는 소리다. 세상에 술이 빠진 축제나 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지의 전통 축제를 찍는 그에게 술은 마을 사람 혹은 영매들과 소통하는 수단이고, 신들과 교감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그는 자신의 일만큼이나 사람과 신들의 거리를 좁혀주는 술을 사랑했다.

    1995년, 그는 일본 ‘히가시가와(東川)국제사진페스티벌’에서 최고의 영예인 해외작가상을 받았다. 또 1988년에는 일본 국제교류기금을 받아 산과 바다 축제를 촬영했으며, 오키나와 류큐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의 굿과 제례를 취재하는 한편, 1995년부터 3년간 연세대와 일본 게이오대학 지역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하는 ‘한·일 문화 비교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서는 그의 책 ‘한국의 굿’이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002년부터 경상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인도의 굿에 나타난 춤사위 비교 연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숱한 고비 넘기며 취재…그가 남긴 사진 더욱 소중

    ‘한국, 마음의 아름다움-민(民)의 문화’(일본, 오리진 쇼보), ‘한국의 굿’,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 ‘아시아의 하늘과 땅’(타임스페이스), ‘한국의 탈, 탈춤’(전 2권, 행림출판),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석필) 등 40여 권의 저서와 사진집을 펴냈고 ‘삶의 경계’(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살아 있는 아시아’(연세대박물관), ‘한국 샤머니즘’(함부르크 민속박물관), ‘빛과 소리의 아시아’(인사아트센터)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를 치렀다.

    실은 그 와중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작년에는 러시아 변방의 민속 축제를 취재하던 중 의식을 잃어 비행기에 실려 오기도 했다. 그 뒤로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술도 끊고 2년 넘게 요양생활을 하면서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까지 찍어온 방대한 양의 사진들을 깨끗이 정리해놓았다.

    지금 그의 대표작들을 모은 사진전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97’이 사진갤러리 ‘와(瓦)’에서 3월2일까지 열리고 있다. 그가 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시작된 이 회고전이 유작전이 되고 말았다.

    아시아 전역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문화적 변혁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그가 남긴 사진들은 더없이 소중한 문화사적 가치를 갖는다. 그가 카메라에 담았던 한국의 무당 중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이 많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굿도 많지만 그의 사진들은 ‘영원한 순간’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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