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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하늘의 별’딴 5인의 일기 … “전문성은 기본, 성실하고 진실해야 기회 잡아”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 하나같이 가난했다. 학력도 별 볼일 없다.
  • 대부분 고졸이다. ‘주경야독’은 기본. 몸이 부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 ‘신화’는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그렇게 힘겹게 완성됐다.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공무원 시험 접수 장면.

공직의 안정성 때문에 9급 공무원 공개 채용 시험에 매년 사상 최대 인원이 몰리지만 이런 인기와는 달리 9급 공무원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9급은 행정직 공무원 중 가장 말단 직급이다. 단순 업무부터 시작해 일정한 근무연수가 쌓여야 급수가 올라간다. 그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그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대부분의 9급 공무원은 관리직의 시작인 5급까지도 오르지 못한 채 정년퇴임을 맞는 경우가 많다.

좀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여도 7급 공무원 시험이나 외무·행정·사법·기술고시(5급)에 합격한 나이 어린 상급자들에게 평생 머리를 숙여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을 뛰어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매우 드물게 9급에서 시작해 1급이나 정무직에까지 오른 이들에게 ‘입지전적인’ ‘신화적인’ ‘기적을 이룬’ 등의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완기 대통령 인사수석비서관을 비롯해 김태환 제주도지사, 이종규 재정경제부 국세심판원장, 김애량 전 여성부 기획관리실장 등이다. 김동회 대전지방노동청장은 비록 3급에 해당하는 직위지만 중졸 출신의 9급 공무원에서 그 위치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 못지않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성공 뒤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을까.

◆ 김완기대통령 인사수석비서관 “易地思之 자세로 이해하고 포용 … 쉬지 않으면 이루어지리”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김완기(62) 대통령 인사수석의 트레이드마크는 ‘백두(白頭)’다. 광주의 명문 광주동중을 수석 졸업하고 광주고에 수석 입학했지만 그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 첫 직장은 9급 공무원. 다른 사람들처럼 공직생활 중에 야간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지 않은 ‘순수한 고졸 출신’이다. 공직생활 37년 만인 2003년 차관급인 중앙인사위원회 소청심사위원장에 임명된 데 이어 지난해 1월 대통령 인사수석 자리에 올랐다.



- 9급 공무원을 시작한 계기는.

“태어날 때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밥을 얻어먹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전남 곡성이라는 시골에 살다가 도시에 살면 좀 나아질 것 같아 광주로 이사해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행상을, 아버지는 날품팔이를 하셨다. 2남4녀 중 지금 전북대 법대 교수를 하고 있는 동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나는 61년, 동생은 64년 광주고 수석 입학을 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광주지역에서는 그나마 조금 활개를 칠 수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7군데 정도에서 가정교사를 해서 살림에 보탰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 갈 형편이 못 돼 흙벽돌을 만들어서 1개당 4원50전에 팔았다. 그때 백양담배가 18원이었다. 그런데 그도 쉽지 않아 결국 손쉬운 9급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 생활이 어느 정도 펴면 공부의 꿈을 다시 펼칠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늘 마음 한구석에는 초·중·고 때 수석했던 나에 대한 우월감 같은 것이 있었다. 서울대학교면 모를까 다른 야간대학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까 ‘대학 가지 않고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않느냐. 표본적인 사람이 한번 돼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오기가 생겼다. 30대 이후로는 아예 학교 갈 생각을 버렸다.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다면.

“사실 젊은 시절 조금 위태롭게 지냈다. 오랜 세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탈출하고자 몸부림쳤다. 공무원 생활도 늘 그만두고 싶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광주에서 운동권 활동을 하던 좋은 선후배를 많이 만났다. 광주도청에 근무하던 때였는데 그들과 함께 공직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도 했다. 반독재 운동을 위한 지하신문도 만들고…. 낮에는 모범 공무원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밤에는 지하활동을 하는, 철저한 ‘이중생활’을 했다. 그때 만난 선후배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 난 늘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돈복은 없지만 사람복과 일복은 타고난 것 같다.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해도 아무런 불평 없이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와 자식들도 큰 복이다.”

- 성격은 어떤가.

“비교적 무던한 편이다. 낙천적이지 못했다면 어린 시절 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또 낙천적이기 때문에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 삶의 원칙이나 좌우명은.

“‘쉬지 않으면 이루어지리’가 내 좌우명이다. 목표를 갖고 꾸준히 해나가면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뜻이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좋은 환경에서 일류대학 나오고, 고시에 합격한 사람보다 좋은 위치에 오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 자신에 대한 확신과 오기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 성공은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조직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남의 입장이나 형편을 이해해주려고 했다. 그런 자세와 태도가 인간관계나 조직 속에서의 입지 등 여러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고 덕이 됐다.”

- 요즘 공무원에 대한 인기가 대단하다. 9급부터 시작하는 후배 공무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일의 성취나 주변으로부터 평가, 그것을 통한 공직에서의 관운 등 모두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일과 사람 모두가 자기 자신의 문제이고 자신이 하기에 달려 있다.

또 사적으로 욕심을 부리려면 한이 없다. 늘 절제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 김태환제주도지사“행정실무 갖추기 최선의 노력 …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제주 4·3사건과 6·25전쟁의 참화 속에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태환(64) 지사는 전북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전주의 명문 북중과 전주고를 졸업한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야 했다. 제주대 법대를 졸업하고 두 차례 사법시험을 실패한 후 김 도지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9급 공무원은 3선 도지사의 토대가 됐다.

- 9급 공무원부터 공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는지.

“아무래도 임명 초창기였던 것 같다. 그때는 9급 공무원 중에 대학 졸업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말단이다 보니까 세금을 일일이 받으러 다녀야 했다. ‘내가 이걸 받으러 다녀야 하나’하는 자괴감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한때는 학교 교사 쪽으로 방향을 바꿔볼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 스스로에 대해 많은 것을 돌아보게 됐다.”

-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길 수 있었나.

“어린 시절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왔다. 외유내강이랄까, 겉으로는 약해 보여도 내면은 무척 강하다. 어린 시절부터 단련됐기 때문이다. 그 내면의 힘과 노력에 의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 공직생활 중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내무부에 근무할 때다. 서울 을지로 청사부터 광화문 종합청사 시절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는 특정 지역 인맥이 인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사이에서 나는 제주 출신이라 특별한 인맥도 없고 해서 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성실하게 일했다. 연세대 행정학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전국 단위의 행정 실무와 이론을 고루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빠른 나이에 승진할 수 있었다.”

- 어떤 자세가 공직생활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성실한 자세가 필요하다. 상사들과 동료들한테서 신망을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

-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3선 도지사까지 됐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잃은 것도 적지 않을 텐데.

“사생활을 잃어버렸다.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전혀 돌아보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정말 많은 것을 잃은 것 같다. 가족에게도 참 소홀했다. 요즘도 함께 저녁을 먹은 적이 없다. 아내에게는 남편 역할을 못하고, 자식들에게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못한 것이 맘에 걸린다.”

- 요즘 공무원에 대한 인기가 대단하다. 후배 공무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요즘 공무원들을 보면 충성심이 부족한 것 같다. 업무에 대한 애착도 부족하다. 공직이라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공직에 진출하기를 바란다.”

◆ 이종규 재정경제부 국세심판원장‘걸어다니는 세법’ 별명 땀과 노력의 부산물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2004년 8월 재정경제부에서 열린 부동산 실무기획단 헌판식에 참석한 이종규(왼쪽 두 번째) 국세심판원장. 당시는 재경부 세제실장이었다.

이종규(59) 재정경제부 국세심판원장은 고졸 출신으로도 최초, 비(非)고시 출신으로도 최초로 재경부 세제실장(1급)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충남 홍성고를 졸업하고 1966년 9급 재경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인천세무서 서기보를 시작으로 2004년 3월 세제실장에 올랐다. 공직생활 38년 만에 이룩한 쾌거다. 뒤이어 지난해 6월 국세심판원장으로 발령받았다.

이 원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로 전문성을 꼽는다. 이 원장이 9급 공무원이 된 것은 당시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다. 그땐 공개채용으로 직원을 뽑는 기업 수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지원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공무원 생활 도중 군에 입대하면서다.

“군에 입대했을 때 국방부 특수정보 분석 업무 부서로 배치를 받았다. 장교와 하사관, 일반 병 등 5~6명이 1개조로 편성돼 정보를 분석했는데 매우 전문적인 일이었다. 그때 ‘어떤 일이든 전문적인 일을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군 제대 무렵에 학력과 출신지를 써내라고 했는데, 그때 고졸 출신이라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국방부 근무 병사들 대부분이 대졸 출신이었다. 그래서 군 제대 후 재무부 세제국으로 발령받은 차에 조세분야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동시에 건국대 경제학과(야간)에 입학했다.”

그 후 이 원장은 ‘주경야독’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다. 34년 동안 국세청과 재경부 세제실을 오가며 세정과 세제 분야를 섭렵했다. 조세 분야 전문가가 드물던 70~80년대에 언론 기고와 기업 초청 강의는 그가 전문성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1시간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3~4시간 이상 준비했고, 글을 쓰기 위해 그 이상의 책을 읽었던 것. ‘세무의 달인(達人)’ ‘걸어다니는 세법’이라는 평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 땀과 노력의 부산물이 바로 85년에 출간한 ‘법인세법 해설’이다. 이 책은 한때 조세 분야의 ‘바이블’로 통했다.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한 것은 물론이다. 이 원장은 조세 분야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이 책을 손질해 개정판을 내고 있다.

전문성만 있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 원장의 성실성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자기 계발에 시간을 투자하고, 남들보다 30분 정도 빠른 8시30분쯤 출근해 밤 10시를 넘기면서까지 일하는 날이 허다했다. 숨 막힐 정도로 빡빡한 일상생활 때문에 한때 이 원장도 월요병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일요일 오후 12시만 넘어가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군요.”

낙천적이고 겸손한 성격도 이 원장의 성공 비결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난다.

“내세울 게 없다. 젊었을 때 고생한 사람들이 한둘인가. 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들이 나에게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그러던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시 출신이나 좋은 대학 출신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내가 일을 못해서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다 보니 발전하게 된 것 같다.”

남들보다 그다지 고생한 게 없다는 이야기인데 정말 그럴까. “그동안 달려온 삶을 뒤돌아보면 언덕 아래로 구르기 시작한 눈 덩어리가 어느 순간 속도를 내면서 갑자기 커졌는데 중간에 멈추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온 것 같다”는 이 원장의 말에는 남들과는 다른 40년 공직생활의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 김애량 전 여성부 기획관리실장“오늘이 마지막 날 각오로 일했다”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여성 가운데 9급 출신으로 1급까지 오른 공직자는 김애량(57) 전 여성부 기획관리실장이 유일무이하다. 김 전 실장도 고졸 출신이다. 이화여고를 졸업한 해인 68년 가정형편상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던 그는 서울시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도전했다. 공무원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남녀차별을 받지 않고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어서였다. 민간기업은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성차별이 심했다.

김 전 실장의 첫 발령지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사무소. 동사무소에 여직원이 거의 없던 그 시절, 김 전 실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 이외에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일은 물론 ‘차 심부름’까지 도맡아야 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주민들에게 세금을 직접 받으러 다녀야 했고, 주민등록제도가 시행되면서 동네 전 주민이 최소한 한 번 이상 동사무소를 찾았다. 대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시험을 쳐뒀던 성균관대 영문학과 야간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결국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라고 해서 남녀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급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업무평가 점수가 배수 안에 들어야 하는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보직은 남성들 차지였고 그게 당연시됐다. 김 전 실장은 그 ‘성(性)벽’을 몸으로 깼다.

“물불 안 가리고 일만 했다. 동사무소에서 1년 6개월 근무하는 동안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맡으면 오히려 더 악착같이 해냈다. 그런 점이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신뢰감을 줬고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결국 김 전 실장은 승진시험을 통해 13년 만에 5급 사무관에 올랐다. 오히려 동료 남자들보다 빨랐다. 김 전 실장은 그 공을 주변 사람들에게 돌렸다. “어떤 일이든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상사와 동료를 만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것.

김 전 실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성실하고 노력하는 자세와 더불어 진실한 인간관계에서 찾고 있다.

“인간관계는 계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진심으로 대해야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은 잘 못하면서 인간관계만 잘 한다고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도 못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상사나 동료들한테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비로소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이고 인간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김 전 실장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가 일 속에서 즐거움과 남다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성격 덕분이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왔다.

“항상 떠날 준비를 했다. 오늘이 직장생활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서 일해왔다. 내일 후임자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일을 말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 전 실장은 2001년 서울시 여성정책관(1급), 2003년 3월 여성부 여성정책실장으로 중앙부처 1급 공무원의 위치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 6월 여성부 기획관리실장에 올랐다. 그가 감사담당관·부구청장·중앙부처 기획관리실장 등을 맡을 때마다 ‘여성 최초의’ 기록이 됐다. 그는 지난해 3월 37년간의 공직생활을 접고 현재 휴식 중이다.

김 전 실장은 9급 고시를 준비하는 예비 공무원들에게 “안정적이라는 이유에서 도전하기보다는 국가나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면서 “요즘 신세대들을 보면 자기중심적인 경우가 많은데 공직은 자기희생의 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 김동회 대전지방노동청장“남이 하기 싫은 일에 열정 쏟아부어”

‘9급 성공 신화’는 아무나 쓰나

2005년 6월2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최저임금위원회 회의실에서 전원회의 위원 및 노조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당시 김동회 최저임금위원회 상임위원(가운데).

지난해 7월 중앙부처 사상 첫 중졸 출신 노동청장(3급)이 탄생해 화제를 모았다. 김동회(55) 대전지방노동청장이 그 주인공이다.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김 청장은 충남 홍성군 광천중학교를 졸업한 직후 철공소와 서울 남대문시장 리어카 인부 등으로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이를 탈출하기 위한 대안은 아무런 자격제한이 없는 9급 공무원 응시가 유일한 길이었다.

1969년 만 19세의 나이에 노동청 산하 대전직업안정소에 공채로 들어간 김 청장은 공무원의 실상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첫 월급을 탔는데 하숙비를 주고 나니까 남는 게 없었다. 특히 동료들이 담배 한 갑 살 돈이 없어서 민원인이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깊은 좌절에 빠졌다. 그렇다고 중학교 학력에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4년간을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냈다. 조직에서조차 ‘부적격자’로 찍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따위로 하려면 그만둬라. 제대로 해서 승진도 하고 해야 하지 않느냐”는 한 선배의 따끔한 충고가 그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때부터 김 청장은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 자신이 맡은 일보다 항상 ‘플러스 α’만큼 더 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씩 앞서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30대에 들어서 6급에서 5급 관리자로 오르려니 결국 학력이 문제였다. 83년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국제대 경제학과(야간)에 입학한 당시 그의 나이는 33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살림에 낮에는 직장에, 밤에는 대학에 다니면서 ‘3중고(重苦)’를 치러야 했다.

힘겹게 대학을 졸업하고 도전한 첫 번째 5급 사무관 승진시험은 그에게 또 한번 자극이 됐다. 경제학과를 전공했으면서도 경제학 과락 때문에 시험에 떨어진 것. 계속된 피로의 누적으로 눈이 나빠져 ‘가격 결정을 논하라’는 문제를 ‘가격 결점을 논하라’로 잘못 읽은 것.

그 다음 해 5급 승진시험에서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관리직으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비고시 출신이라는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고시 출신과 비고시 출신 간의 견제와 경쟁이 만만치 않았던 것. 그는 그 돌파구로 언론을 이용했다. 중졸에 검정고시, 야간대학 출신인 그가 특별한 연줄이나 처세로 고시 출신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철저하게 전문성을 키우면서 내가 한 일을 국민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한 일을 언론에 보도되도록 노력했다.”

김 청장의 좌우명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이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치열하게 살아왔다.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된다. 어떤 일이든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하고,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오히려 찾아가는 열정이 필요하다. 순간적인 결단과 행동이 중요하다. 내가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사람도 모인다.”

김 청장은 “요즘 공무원 경쟁률이 크게 늘었는데 그렇다고 기회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의지를 가지고 한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6.02.21 523호 (p28~32)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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