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3

2006.02.21

모성애로 일군 ‘감동의 터치다운’

미식축구 영웅 워드 어머니 김영희 씨 … 눈물겨운 30년 뒷바라지 “겸손·노력하라” 가르쳐

  • 맥도너=김승련/ 동아일보 워싱턴특파원 srkim@donga.com

    입력2006-02-15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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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이상하다 싶었다. 그동안 겪은 차별과 가난을 생각하면 펑펑 울거나 활짝 웃는 감정의 굴곡이 있어야 했다. 아들 하인스 워드 주니어(30)가 2월5일 슈퍼볼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면서 부와 명예를 함께 얻었으니까.

    그러나 2월7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외곽 맥도너 시(市)의 자택에서 만난 김영희(59) 씨는 눈물과 웃음의 기제가 말라버린 상태였다. 그는 웬만한 ‘자극적’ 질문에도 투박한 답변만 내놓았다.

    -아들이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멋진 득점을 했고, MVP 상도 탔다. 얼마나 기쁜가.

    “뭘…. 솔직히 색다를 게 없다. 경기는 늘 봐왔다. 그냥 이겼으니까 좋은 거지.”

    -아들은 “어머니가 나의 전부다”라고 말한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어떤 존재인가.



    “별거 없다. 잘 커줬으니까 좋은 거지.”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지만, 줄곧 이런 식이다. 누선(淚腺)을 자극할 찡한 스토리를 기대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에게 부담 주기 싫어 졸업파티 불참

    김 씨는 “주니어(Junior)는 홀어머니 밑에서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잘 울고 잘 웃는 아이로 커줬지. 고마운 일이야”라고 했다. 그는 아들을 주니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은 아들을 부르는 말이다. 아들에게 엄마는 ‘마마(Mama)’였다.

    언젠가 하루는 김 씨가 호텔 청소, 버거킹 근무 등 두세 가지 일을 마치고 귀가해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고교생이던 아들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둘은 아무런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모자(母子)가 나눈 사랑은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는 탯줄 같은 구실을 했다.

    애틀랜타 남쪽의 포리스트 파크 고교에 다닐 당시 아들은 인기 만점의 학생이었다. 뛰어난 운동 실력, 잘생긴 외모, 여기에 좋은 학과 성적. 여학생들의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겐 졸업 파티의 추억이 없다. 턱시도 빌려 입고, 관행처럼 돼버린 리무진 빌려 타는 값에 수백 달러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돈이면 엄마가 몇 시간을 더 몸으로 일해야 하는데….” 그가 엄마에게 들려준 ‘불참의 변’이었다.

    김 씨가 아들에게 “겸손하라(Be humble)”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인생엔 기복이 있게 마련이잖아. 좋을 때 기고만장하는 것은 절반만 보고 사는 거야. 그렇잖아”라고 했다. 어려울 때가 더 많을 운명을 타고난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현실적인 보호본능의 산물인지 몰랐다.

    슈퍼볼 우승 직후 모자는 전화로 기쁨을 나눈 적이 있다.

    “자기 팀이 우승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녀석은 ‘너 MVP 탄 거 봤다’고 내가 말하기 전까지 자기 상 받은 이야기는 안 해. ‘마마, 이기면 되는 거잖아. 원래 그건 개인경기도 아니야’라고 해.”

    그는 아들에게 매를 든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물건을 남에게 ‘퍼주는’ 걸 좋아했다.

    “없는 살림에 뭐가 자꾸 없어져. 주니어가 자기보다 어려운 친구에게 준다며 다 들고 가더라고. 고교 졸업식 때 축구팀 코치가 ‘하인스 점심은 내가 다 샀다’고 하잖아. 매주 20달러를 점심 값으로 줬는데, 늘 다른 친구에게 줬다는 거야. 요즘도 대학친구 가운데 프로팀 진출에 실패한 친구에게 1만 달러도 쥐어주고, 차도 사줘. 하지만 이게 능사는 아니잖아. 정에 굶주린 탓이겠지만, 친구를 사귀는 방식 때문에 마당 빗자루로 때려준 적이 몇 번 있었지.”

    대화가 30분을 넘어가면서 한국에서 온 기자에 대한 거부감이 좀 줄어들었다. 처음엔 사진 촬영을 할 때마다 “찍지 말아. 뭐 한 게 있다고…”라며 연신 손사래를 쳤지만, 계속 터지는 플래시가 익숙해진 것 같다. 가족의 사진첩도 내왔고, 하나하나 사진을 꺼내며 설명해줬다.

    그런데 아들의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시간당 2달러80센트를 받으며 생존을 위해 일하던 어머니에게 아들과 단란하게 찍은 사진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을 일이겠다.

    김 씨가 지금 사는 곳은 아들이 사준 두 번째 집이다. 첫 번째 집은 너무 큰 탓에 불편해서 방 2개인 이곳으로 이사 왔다. 3년 전 결혼한 아들 부부는 첫 정착지로 고교, 대학을 마치면서 고향이 돼버린 애틀랜타 인근에 200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해 살고 있다. 물론 홈구장인 피츠버그에도 집이 따로 있다. 부인은 아들이 고교 때부터 사귀던 사람이었다. 제이든(Jaden)이라는 손자도 봤다.

    집 안은 한국식으로 꾸며져 있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을 한자로 쓴 액자도 보였고, 길이가 1m 남짓한 장식장에는 처녀 총각, 나무꾼, 전통 혼례식을 테마로 한 한국의 전통인형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김 씨에게는 이미 알려진 대로 아픈, 아니 어려웠던 과거가 있다.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던 흑인 병사를 만나 아이 낳고 결혼한 것도 모두 가난 때문이다. 서울 토박이라는 그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서울 친구를 묻는 과정에서 “여고시절 친구라도 만나시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중·고교를 못 다녔어. 한 끼 먹으면 다음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니까. 자랑거리도 아니지만,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라고 말했다.

    남편을 만나 하인스를 76년 서울에서 낳았다. 미국으로 온 것이 77년. 남편은 미국 도착 1개월 만에 헤어졌다. 일부 보도와 달리 남편의 독일 근무가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원래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헤어짐의 감정도 없었다”고 했다.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김 씨에게 미군과의 결혼은 미국행의 ‘수단’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고리를 끊는 사금파리 같은 존재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대학시절 운동장에 나타났다. 김 씨는 “나도 만났어. 하지만 얼굴도 기억에 없어졌더라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라고 말했다.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냥 가세요”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모자의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인터뷰를 위해 새벽에 애틀랜타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김 씨는 오후가 되도록 집을 비우고 있었다. 그는 부근의 U 고교 식당에서 오전 6시 반에 출근해 오후 2시에 퇴근하는 정규근무를 한다. 월 소득은 600달러(약 60만원)쯤. 아들이 연간 60억원을 버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액수일 수 있다.

    “주니어가 그만두라고 펄펄 뛰어. 마마는 이젠 편하게 지내셔야 한다고. 하지만 놀면 뭐 해. 얼마 전에 2개월간 일을 쉬었더니 우울증에 빠졌어.”

    아들은 어려서도 흑인보다는 한국, 베트남 아이와 훨씬 더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하루는 아들이 엄마에게 “내 이름을 한글로 써주세요. (한글은 못 쓰지만) 외우고 싶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렇게 그림 그리듯 익힌 이름을 팔뚝에 문신으로 새겼다.

    김 씨의 첫인상은 차가운 쪽이었다. 아들에 대한 잔잔한 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고, 세상을 달관한 듯 시큰둥한 태도도 보였다. “아들의 성공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뤘느냐”는 말을 몇 차례 되물어야 비로소 “그런 셈이지”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월드스타로 떠오른 ‘주니어’가 한국인에게 준 감동의 크기에 대해서는 그도 놀라는 눈치였다. 초등학교 학력으로, 흑인 혼혈을 낯선 미국 땅에서 혼자 키우고, 육체노동으로 30년을 감당해온 그가 한국인들에게 기쁘고 자랑스러운 휴먼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것을 꿈에라도 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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